•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2. 애국계몽사상
  • 2) 국권회복의 논리
  • (1) 자강독립론

(1) 자강독립론

한말 애국계몽파의 국권회복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실력 양성에 의한 국권회복이라는 自强獨立論이었다. 그럼 애국계몽가들의 자강독립론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애국계몽가들은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자강독립론을 폈다.

사회진화론은 1880년대에 개화인사들에 의하여 우리 나라에 수용되기 시작하였고, 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운동기를 거쳐, 1900년대 애국계몽운동기에는 ‘生存競爭’·‘優勝劣敗’·‘弱肉强食’·‘適者生存’의 용어가 당시 사회를 풍미하였다. 한말에 사회진화론이 본격적으로 수용되어 일반화된 데에는 양계초의≪음빙실문집≫이 깊은 영향을 끼쳤다.0736)田口容三,<愛國啓蒙運動期の時代認識>(≪朝鮮史硏究會論文集≫15, 朝鮮史硏究會, 1978), 92쪽.
李光麟, 앞의 글(1981), 257∼266·286∼287쪽.
愼鏞廈, 앞의 글(1980), 278쪽.

대한자강회 부회장 尹孝定은<생존의 경쟁>이란 연설에서,

금일의 생존경쟁은 도저히 면코자 하여도 가히 면치 못할 것이니 … 개인의 생존경쟁뿐만 아니라 국가의 생존경쟁을 計圖치 아니함이 불가하니, 대저 優勝劣敗는 人事의 常이며 弱肉强食은 現世의 例어늘 … 생존경쟁을 不知하면 개인이 능히 노예의 耻를 요행히 면할 자가 없고, 생존경쟁을 不知하면 국가가 능히 版圖의 色을 불변할 자가 없다(尹孝定,<生存의 競爭>(≪大韓自强會月報≫(이하≪月報≫라 略함) 제11호), 6∼7쪽).

고 하여, 생존경쟁의 원리 곧 사회진화론을 개인 대 개인, 국가 대 국가의 경쟁 등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원리로 인식하였다.

대한자강회 평의원 張志淵은<團體然後 民族可保>라는 논설에서,

무릇 국가의 성립은 민족의 團體集合에서 말미암는 것이라, 비롯 광막한 토지와 허다한 민족이 있다 해도 團合之義와 團合之力이 결핍하면 야만의 一部落에 불과하며, 오늘날 競爭極烈의 사회에서 어찌 劣敗澌滅의 근심을 피할 수 있겠는가. 무릇 優勝劣敗는 天演界의 公理라, 優劣의 道가 不一하나 단체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가 그 주요점이니, 단체 협동이 곧 민족을 보전하고 독립 기초를 공고케 하는 길이다(張志淵,<團體然後民族可保>(≪月報≫제5호), 1∼7쪽 축약).

고 하여, 사회진화론적인 시각에서 국제사회의 현상을 설명할 때에는 競爭極烈·優勝劣敗의 시대임을 강조했지만, 국내사회의 현상을 설명할 때에는 민족의 단합과 협동을 강조하였다.

大韓協會 교육부장 呂炳鉉은<의무교육의 필요>라는 논설에서,

오늘날은 全球人族이 생존경쟁하는 20세기라. 이 경쟁의 결과가 반드시 優者勝 劣者敗로 돌아감은 대세일진대, 금일 我韓民族의 위치가 불행히 劣者敗의 地에 처함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남은 문명에 爭進하는데 우리는 昏愚에 甘處하고, 남은 실질적 학문을 힘쓰는데 우리는 허문적 학문을 숭상하였으니 이것이 큰 원인이라. … 금일 劣敗한 我韓民族도 養力蓄銳하여 高獲勝捷할 날이 어찌 없으리요(呂炳鉉,<義務敎育의 必要>(≪大韓協會會報≫(이하≪會報≫라 略함) 제2호), 9∼10쪽).

라 하여, 당시 생존경쟁·우승열패의 국제사회에서 한민족이 劣敗者의 처지에 떨어진 책임은 문명과 실질적 학문에 힘쓰지 않은 우리 자신에 있다는 ‘劣敗者自責論’을 펴고, 우리도 실력을 양성하면 優勝者의 위치에 설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대한자강회도 그 취지서에서, 국가의 독립은 자강 여하에 달려 있는데, 한국은 과거 自强之術을 강구하지 않아 인민이 우매해지고 국력이 쇠퇴해져서 외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自强之道에 뜻을 두지 않은 까닭이라 하고, 奮勵自强이 국권회복의 길임을 천명하였다.0737)≪大韓自强會月報≫(이하 月報라 略함) 제1호,<大韓自强會趣旨書>, 9쪽. 대한협회도 우국지사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 한국이 외국의 지도 보호를 받는 것은 국가의 불운이며 국민의 치욕이지만, 그것은 개항 이래로 정부가 興國之策을 강구하고 인민이 愛國之誠을 발휘하여 국력을 양성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보고, 모든 국민이 일치 단결하여 실력을 양성하면 후일에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0738)≪大韓協會會報≫(이하 會報라 略함) 제8호,<敬求志士同情>, 57쪽. 이것은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보호국 상태에 처한 원인은 자강에 힘쓰지 않은 자신에게 있다는 保護國自責論의 입장에 선 先自强 後獨立의 논리였다.

신민회의 대변지 역할을 했던≪大韓每日申報≫도

各族이 경쟁하는 세계를 당하여, 進하여 强한 者가 退하여 弱한 者를 滅함이 어찌 可尤할 바리오. 人은 進하는데 我는 不進함이 可尤할 바며, 人은 능히 他族을 멸하는데 我는 자기도 생존치 못함이 可尤할 바니라(≪大韓每日申報≫, 1908년 9월 27일, 奇書<進步하라 동포여>).

고 하고, ‘不進者自責論’의 입장에서 실력양성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機會와 實力>이란 논설에서는, 실력이 없으면 아무리 기회가 주어져도 성공할 수 없으므로, 먼저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의 기회에 대비해야 한다는 先實力 後機會論을 폈다.0739)≪大韓每日申報≫, 1910년 1월 13일, 논설<機會와 實力>.

요컨대 애국계몽가들은 약육강식·생존경쟁의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국권을 상실케 된 것은 실력의 부족 때문이라는 자가반성과, 앞으로도 실력의 준비가 없으면 기회가 주어져도 독립회복으로 활용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실력양성을 통한 자강실현으로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을 확고히 할 수 있다는 논리, 곧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자강독립론을 전개하였다.

둘째로 애국계몽가들은 자력에 의한 자주적 자강독립론을 폈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국제 여론에 호소하여 일본에 대한 국제적 압력으로 조약을 취소케 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외교운동이 전개되었다. 대한자강회 회장 尹致昊는 러일강화조약이 체결된 직후에, 고종이 미국과 프랑스에 밀사를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으려 한 데 대하여, “황제가 워싱턴과 파리의 거리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우려 한다”고 그 불가능함을 지적하였다.0740)≪尹致昊日記≫, 1905년 10월 28일. 그는 외교운동에 대하여 ①어느 열강도 일본에 돌을 던질 만큼 정의롭지 않으며, ②한국이 열강과 독립적 외교 관계를 가진 과거 20년 동안에 세계의 동정을 살 만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으며, ③어느 나라도 부패한 한국인을 위하여 세계적 강대국이 된 일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0741)≪尹致昊日記≫, 1905년 12월 17일. 열강의 외교적 압력 수단에 의한 국권회복 곧 외교독립론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독립의 길은 자강에 달려 있다”0742)≪高宗實錄≫, 광무 9년 12월 1일,<尹致昊上疏>.라고 하여 자력에 의한 자강독립론을 주장하였다.

대한자강회 평의원 朴殷植은<自强能否의 問答>이란 논설에서,

현금 시대는 생존경쟁을 天演이라 논하며 약육강식을 公例라 말하는지라. 저 문명을 가장 중시한다고 하는 영국도 인도와 애급에 대하여 어떠한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德義를 숭상한다고 하는 미국도 비율빈에 대하여 어떠한 수단을 취하였는가. 현금 열국의 鷹揚虎躍者는 그 말씨는 보살이요 그 행동은 夜叉(악마)라, 누구를 가히 믿으며 누구를 가히 의지하리요. … 만일 다른 열강의 어떠한 事機로 우리를 원조할까 희망하면 비단 妄想이 될 뿐더러 실로 막대한 불행이라. … 吾國의 독립은 吾國의 自力으로 할 것이요 타국의 힘을 빌리지 않으리라 하고, 自强의 성질을 배양하여 自立의 기초를 부식할지니, 만약 능히 그럴 수 없으면 영구히 타인의 노예가 될 뿐이라(朴殷植,<自强能否의 問答>(≪月報≫제4호), 1∼3쪽 축약;金成喜,<國民的 內治 國民的 外交>(≪會報≫제4호), 25∼26쪽).

하여 약육강식·침략경쟁의 국제사회에서 열강의 원조로 독립을 기대하는 것은 妄想임을 지적하고, 자국의 독립은 자국의 자력에 의한 자강·자립으로 가능하다는 자주적 자강독립론을 역설하였다.

≪대한협회회보≫에 실린 白星煥의 논설<學人不學人의 關係>에서도,

금일 세계는 自立自强의 大競爭局이라. 그 국가를 세움도 오직 내가 스스로 세우는 것이고 남이 나로 하여금 세우게 하는 것이 아니며, 그 국가의 강함도 역시 내가 스스로 강하게 하는 것이고 남이 나로 하여금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즉 그 나라를 세우고 강하게 함이 실로 남에게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남에게 속박 당하지 않을 능력과 自治自新의 사상이 확립된 연후에야 優勝劣敗의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다(白星煥,<學人不學人의 關係>(≪會報≫제3호), 6쪽).

고 하여, 국가의 자립·자강을 강조하는 자주적 자강독립론이 주장되고 있다.≪대한매일신보≫도 논설에서, “大韓의 독립은 大韓人의 자력으로 획득하고 자력으로 保守하여야 완전한 독립이 될 터이니”0743)≪大韓每日申報≫, 1907년 10월 1일, 논설<귀중한 줄을 認하여야 保守할 줄을 認하지>.라고 하여, 자주적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애국계몽가들은 약육강식·침략경쟁의 국제사회에서 모든 열강을 일본과 동일한 침략국가로 간주하여, 외세의존적인 외교독립론을 기대할 수 없는 것으로 배제하고, 자력에 의한 자주적 자강독립의 논리를 폈다.

셋째로 애국계몽가들은 점진적 실력양성에 의한 자강독립론을 폈다.

을사조약의 체결로 주권의 일부가 상실되자, 위정척사론의 입장에 서 있던 수구 유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무력으로 일본 세력을 물리치고 주권을 회복하려는 항일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의병운동은 국권을 빼앗긴 이상 승패를 초월하여 즉각결전에 의해 즉시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무장투쟁노선에 섰던 가장 강렬했던 항일투쟁이었다.

점진적인 자강독립론을 폈던 애국계몽가들은 이러한 항일의병운동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다. 그들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군사강국이고 열강으로부터 한국의 보호권을 인정받은 상황에서, 열세한 의병의 무력으로 막강한 일본군을 격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대한자강회 회장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일본인, 일진회원, 부패한 왕실,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 등 한국의 일반적인 병폐에 더하여, 충청남도와 전라도의 백성들은 최근에 義兵 또는 抗日暴徒들에 의하여 지독하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그 소요 진압의 구실로 일본 군대는 주요 중심지를 점령한다(≪尹致昊日記≫, 1906년 6월 15일).

고 하여, 의병은 일본 군대를 격퇴하기는 고사하고 일본 군대에게 점령지 확대의 구실을 주고 있으며, 일본인·일진회·왕실·정부와 마찬가지로 백성을 크게 괴롭히는 존재가 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대한협회 임원 金成喜도 무모한 의병항전은 전국 인종을 殄滅하는 행위라고 의병활동을 격렬히 비판하였다.0744)金成喜,<國民的 內治 國民的 外交>(≪會報≫제4호), 26쪽.

대한자강회 총무이며 대한협회 부회장이었던 윤효정도, 義兵은 국권이 축소되고 외국의 지휘 감독을 받게 된 원인과 그 타개 방법을 연구하지 않고, 비분강개하여 폭도의 행동을 하고, 양민을 도탄에 빠지게 한다고 하고, “이러한 행동으로는 국가의 앞길을 구제할 수 없고 오히려 국가의 나아갈 大道를 끊게 한다”0745)尹孝定,<時局의 急務>(≪會報≫제2호), 62∼63쪽.거나, 의병은 “조국의 사상으로써 反히 조국을 斲喪하는 자”라고 비판했으며,0746)尹孝定,<大韓協會의 本領>(≪會報≫제1호), 47쪽. “의병처럼 시국과 國勢를 헤아리지 않고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국가를 自亡케 할 뿐이며 自强케 할 수 없다”0747)尹孝定,<本會의 趣旨와 特性>(≪月報≫제1호), 20쪽.고 하여 ‘무력행사불가론’ 또는 ‘義兵害民害國論’을 폈다.

신민회의 대변지≪대한매일신보≫도 잡보<非義伊狂>에서, 의병투쟁은 “擾民之端일 뿐 國事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행동”이라 하여 ‘義兵無用論’을 펴고,0748)≪大韓每日申報≫, 1906년 3월 30일, 잡보<非義伊狂>.
≪大韓每日申報≫, 1905년 9월 10일, 잡보<義兵消息>과 1907년 10월 10일 金翼河<寄書>에서는 의병들에게 교육과 식산 등 실력양성에 힘쓸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의병>이란 논설을 통하여, 越王 句踐, 燕의 昭王, 프러시아의 君臣이 장기간의 인내로 실력을 양성하고, 시기를 기다려서 강대한 적국에 설욕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때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일시의 血憤에 따라 烏合之衆을 모아 妄擧함은 국가의 禍亂을 증대하고 生民을 문드러지게 하는 것”이라 하여, 의병의 일본군에 대한 무력 대결은 실력의 파괴를 초래하는 ‘不度時 不量力’의 무모한 행동이라고 비판하였다.0749)≪大韓每日申報≫, 1906년 5월 30일, 논설<義兵>.≪皇城新聞≫역시 의병은 국가에 해를 끼치는 백성, 곧 ‘自促亡國之敵’이라고 비난하고,0750)≪皇城新聞≫, 1905년 10월 13일, 논설<警告義兵之人>. 국권회복은 武를 통해서가 아니라 文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0751)≪皇城新聞≫, 1906년 5월 29일, 논설<警告義兵之愚昧>.

이와 같이 애국계몽가들은 우리와 일본 사이의 실력의 차이가 현저한 상황에서 전개되는 항일 무력투쟁은 국권회복의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침략정책을 강화시키고 국력의 손실을 가져오며 양민을 괴롭히게 되어 국가와 국민에게 해롭다고 판단하여, 점진적 실력양성에 의한 국권회복을 주장하였다.

대한자강회 평의원 장지연은<自强問答>이란 논설에서,

애국에 뜻을 둔 인사는 결코 앉아서 멸망을 기다려서는 안될 것이니, 지금 비록 자강의 능력이 없다 해도 사람마다 모름지기 자강의 道에 힘써, 천리 길을 가는 사람이 반드시 한 걸음부터 시작하는 것 같이 해야 한다. 오늘 일보 전진하고 내일 또 일보 전진하여 매일 한 걸음이라도 멈추지 않아, 日久月深하여 歲積年累하면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할 날이 있을 것이다(張志淵,<自强會問答>(≪月報≫제2호), 6쪽).

고 하여, 점진적으로 장기적인 노력을 통하여 자강을 실현해야 한다는 점진적 자강론을 폈다. 그리고 그는<自强主義>라는 논설에서는,

대저 我國의 형세를 비유하면 潰癰廢疾(불치병)의 사람과 같아서 반드시 세월이 걸려야 효과가 있을 것이며 급속한 효과를 바라기는 어려울 것이니, 금일에 自强會를 발기하여 명일에 自强力을 발생케 할 이치는 결코 천하에 없을 뿐더러, 自强主義는 强暴强勇의 强이 아니라. 진실로 自强之術에 힘쓸 것이니…(張志淵,<自强主義>(≪月報≫제3호), 6쪽).

라 하여, 한국의 자강은 장기적으로 효과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감정에 치우친 급진주의와 실력의 뒷받침이 없는 폭력주의를 배격하였다.≪황성신문≫도 우리 민족이 생존경쟁의 장에 나아가 열심히 노력하면, 10년 또는 20년 이내에 일본과 같은 위치에 도달하여 보호국의 수치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장기적 노력에 의한 자강독립을 전망하였다.0752)≪皇城新聞≫, 1906년 11월 19일, 논설<競爭時代>(續).

이와 같이 애국계몽가들은 자력에 의한 자주적 자강독립을 강조했으나, 자력에 의한 자주적 방법이라 해도 의병투쟁과 같은 충분한 실력을 갖추지 않은 무장투쟁의 방법을 지양하고, 장기적으로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점진적 자강독립의 논리를 폈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비밀결사인 신민회가 독립전쟁론을 폈으나, 그것은 일제와 近代戰을 전개할 수 있는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일본이 타국과 침략전쟁을 벌이는 기회를 포착하여 수행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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