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2. 애국계몽사상
  • 2) 국권회복의 논리
  • (2) 실력양성론과 독립전쟁론

가. 실력양성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애국계몽가들은 당시 시대를 사회진화론적 시각에서 보고, 우승열패·약육강식의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국권을 상실하여 보호국 상태에 처한 원인은, 외국의 침략 때문만이 아니라 실력양성·자강실현에 힘쓰지 않는 한국 자체에 있다는 자가반성의 입장에서, 실력의 부족으로 상실된 국권의 회복·독립의 실현은 실력의 양성·자강의 실현에서 가능하다는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자강독립론 곧 ‘선자강 후독립론’을 주장하였다.≪대한매일신보≫가 1910년 1월 13일자 논설에서, “아무리 기회가 있더라도 실력이 없으면 성공치 못할 것”이므로 먼저 실력을 양성하여 장차 독립의 기회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선실력 후기회론’도 같은 맥락의 자강독립론이었다. 대한협회가 국난극복을 위하여 실력주의, 곧 부강주의를 국시로 삼자고 주장0753)≪大韓民報≫, 1909년 6월 13일, 논설<我韓의 國是>.할 정도로, 애국계몽가들에게 있어 실력양성은 국가적 과제이며 국권회복의 관건이었다.

그럼 애국계몽가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가. 주로 대한자강회·대한협회·신민회·서우(서북)학회 등에 속한 애국계몽가들의 주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애국계몽가들은 교육진흥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폈다.

대한자강회가 그 취지서에서, 국가의 독립은 오직 자강 여하에 있을 뿐이며, 자강의 방법은 ‘振作敎育’하여 民智를 개발하고 ‘殖産興業’하여 國富를 증진시키는 것이라0754)≪月報≫제1호,<大韓自强會趣旨書>, 9∼10쪽. 했듯이, 애국계몽가들은 교육과 식산을 자강실현의 양대 지주로 간주하고 교육자강을 주장하였다.0755)≪皇城新聞≫, 1906년 2월 27일, 논설<感謝大垣君高義>와 1908년 9월 8일, 논설<實業界의 新光線>에서도 교육과 식산을 통한 국권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애국계몽가들은 “오직 人群이 진화하여 문명이 고도에 달한 즉, 약자가 강하고 劣者가 優하여 장차 천하에 無敵하게 됨은 物競天演의 공리라”0756)金成喜,<敎師의 槪念>(≪月報≫제8호), 25쪽.하고, 문명부강한 국민의 요건은 학업의 증진과 지식의 확대에 있음0757)朴殷植,<敎育이 不興이면 生存을 不得>(≪西友≫제1호), 9∼10쪽.을 강조하여, 약육강식·우승열패의 국제사회에서 교육을 통한 국민의 개명과 문명의 高度化가 ‘약자의 강자화의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서구 근대문명국가의 교육에 준하는 문명교육과 실업교육 및 애국교육을 통하여, 근대적 문명지식과 경제적 자립능력 그리고 강력한 애국심을 가진 패기 있는 국민을 육성해야 한다는 ‘교육자강론’을 폈다.0758)李鍾濬,<敎育論>(≪月報≫제7호), 1∼2쪽.
呂炳鉉,<殖産部論說>(≪月報≫제2호), 15∼16쪽.
尹孝定,<專制國은 無愛國思想論>(≪月報≫제5호), 19∼22쪽.
비밀결사인 신민회도 그<通用章程>에서 실력 양성의 방법으로 “학교를 건설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과 “각처 학교의 교육방침을 지도할 것”을 규정하여, 교육진흥이 실력양성의 요체임을 제시하였다.0759)≪韓國獨立運動史≫1, 국사편찬위원회, 1965),<大韓新民會通用章程>, 1,028쪽.

그리고 애국계몽가들은 이러한 교육자강을 실현하기 위하여 학교교육은 물론 가정교육과 사회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0760)≪大韓每日申報≫, 1906년 5월 9일, 논설<申勉家庭敎育>.
安秉瓚,<敎育의 宗旨>, (≪西友≫제5호), 8쪽.
≪皇城新聞≫, 1909년 2월 5일, 논설<根本的 敎育>.
여성교육과 의무교육 및 노동야학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0761)여성교육을 강조한 글은 다음과 같다.
≪皇城新聞≫, 1909년 9월 16일, 논설<女子敎育界의 大缺點>.
≪大韓每日申報≫, 1909년 11월 17일,<女子敎育에 對 一論>.
의무교육을 강조한 글은 다음과 같다.
≪西友≫제3호, 43∼44쪽.
朴殷植,<祝義務敎育實施>(≪西友≫제7호), 2쪽.
≪皇城新聞≫, 1908년 6월 6일, 논설<義務敎育先自貧民始>.
≪大韓每日申報≫, 1908년 12월 6일, 논설<書告敎育家諸公>·1910년 1월 14일, 논설<敎育界의 悲觀>등이 있다.
또한 노동야학을 실시하여 자주독립의 정신과 견인불굴의 성질을 양성할 것을 강조한 글로는≪皇城新聞≫, 1908년 2월 20일, 논설<勸勉勞動同胞夜學>등이 있다.
그들이 중요시한 교육은 ‘국민의 정신’을 고취하고 ‘국민의 氣力’을 배양하는 진정한 국민교육이었다.0762)≪大韓每日申報≫, 1909년 11월 24일,<國民敎育을 施라>. 그러므로 그들은 근대화에 역행하는 수구적인 유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신교육에 의한 신학문·신사상의 보급 확대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교의 근본은 變通意識·富强之術·民權意識을 내포하고 있어 근대·문명사상에 부합될 수 있다고 보아, 孔孟儒敎를 개신하여 신학문·신사상과 상호 보완해야 한다는 신구학 절충보완의 논리도 폈다.0763)薛泰熙,<抛棄自由者爲世之罪人>(≪月報≫제6호), 21∼23쪽.
李鍾濬,<宗敎를 不可不崇奉이요 新舊를 不可不參酌이라>(≪月報≫제9호), 14∼16쪽.
白洛居士,<人民의 敎育>(≪嶠南敎育會雜誌≫제5호), 24∼25쪽.
李起金憲,<學問은 不可不參互新舊>(≪畿湖興學會月報≫제6호), 4쪽.
李輔相,<學無新舊로 勸告不學諸公>(≪畿湖興學會月報≫제7호), 6∼7쪽.
李光麟,<舊朝末新學과 舊學의 論爭>(≪韓國開化史의 諸問題≫, 一潮閣, 1986), 202∼206쪽.

이처럼 애국계몽가들은 民智를 계발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자강교육의 실시를 국권회복의 기초로 생각했으며,0764)≪西友≫제1호,<本會趣旨書>, 5쪽.
朴殷植,<警告社友>(≪西友≫제2호), 5쪽.
邊昇基,<革去舊習(續)>(≪湖南學報≫제6호), 12쪽.
≪畿湖興學會月報≫제1호,<本會記事>, 47∼48쪽.
국권회복을 위한 자강교육의 전제로 의무교육의 실시를 강조하였다.0765)≪西友≫제3호, 43∼44쪽.
姜 曄,<義務敎育>(≪湖南學報≫제7호), 2∼3쪽.
李宣鎬,<今日嶠南>(≪嶠南敎育會雜誌≫제2호), 45쪽.
鄭國采,<國民敎育論>(≪畿湖興學會月報≫제8호), 8∼9쪽.

둘째로 애국계몽가들은 식산흥업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다.

애국계몽가들은, 국권회복은 실력양성에 있으며 실력의 요체는 식산흥업, 곧 농공상업의 발달에 있다고 보고,0766)玉東奎,<實業의 必要>(≪西友≫제8호), 30쪽.
≪西友≫제6호,<切實意見>, 2쪽.
특히 당시 세계를 ‘商業戰鬪時代’로 규정하였다.0767)≪大韓每日申報≫, 1909년 12월 18일, 논설<商業上知識의 必要≫. 그들은 당시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된 주요 원인의 하나는 식산의 부진에 따른 국가의 빈약에 있다고 인식했으며, 식산흥업이 국부증진의 근원이라 믿고, 생존경쟁·우승열패의 국제사회에서 식산을 통한 국가부강의 실현이 국권회복의 길이라고 하여 ‘식산자강론’을 주장하였다.0768)張志淵,<殖産興業의 必要>(≪月報≫제1호), 34∼35쪽.
―――,<國家貧弱之故>(≪月報≫제6호, 10∼15쪽·제7호, 6∼8쪽).
大韓子,<土地와 國家 人民의 關係>(≪會報≫제6호), 12쪽.
비밀결사인 신민회도 그<通用章程>에서, “실업가에 권고하여 영업방침을 지도할 것”과 “본회와 합자로 실업장을 열어 실업계의 모범을 보일 것”을 규정하여, 식산흥업이 실력양성의 요체임을 제시하였다.0769)≪韓國獨立運動史≫1,<大韓新民會通用章程>, 1,028쪽.

애국계몽가들은 한국의 식산부진과 국가빈약의 요인을, 수백년 간의 압제정치와 가렴주구, 그리고 전제국가의 ‘重士主義(문인존중주의)’와 관존민비의 폐습 등에 의한 국민의 근로의욕의 상실과 산업기술의 부족으로 파악하였다.0770)張志淵,<國家貧弱之故>(≪月報≫제6호, 10∼15쪽·제7호), 6∼8쪽.
金成喜,<殖産部論說>(≪月報≫제6호), 38∼40쪽.
따라서 그들은 정치개혁을 통하여 국민의 자유·평등의 권리를 보장하고, 국민계몽을 통하여 관존민비·직업존비의 의식을 타파하여 국민의 근로정신과 생산의욕을 고취시키고, 국민교육을 통하여 각종 산업의 기술을 개발하여 생산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 국민의 경제적 자립과 국가의 부강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771)金成喜, 위의 글.
張志淵,<殖産興業의 必要>(≪月報≫제1호), 34쪽
呂炳鉉,<殖産部論說>(≪月報≫제2호), 14∼16쪽.

애국계몽가들은 이같은 식산흥업의 활동이 현실적으로는 일제의 경제적 침탈을 억제하고, 교육진흥에 필요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부강을 통한 국권회복의 기초가 된다고 믿었다.0772)張志淵,<嵩齋漫筆>(≪月報≫제2호), 17∼18쪽.
―――,≪月報≫제3호, 9∼10쪽.
그러므로 교육과 식산에 의한 국민의 지식과 경제적 향상을 유일한 자강책 또는 국권회복의 실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0773)≪月報≫제1호,<大韓自强會趣旨書>, 9∼10쪽.
尹孝定,<志士의 眼淚와 學生의 指血>(≪月報≫제8호), 52쪽.

셋째로 애국계몽가들은 교육진흥·식산흥업과 더불어 정치개혁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폈다.

대한협회는 그 취지서에서, “정치·교육·산업을 강구하여, 사회지식을 발달하며 신진 德性을 도야하며 전국 富力을 증진함으로써 국민적 자격을 양성한다” 하고, 계속하여 “국가의 비운과 인민의 행복은 전적으로 실력 여하에 있는데, 실력은 오직 정치·교육·산업의 강구 발달일 뿐이다”0774)≪會報≫제1호,<大韓協會趣旨書>, 1쪽.고 하여, 애국계몽가들이 실력양성에 있어 교육진흥·식산흥업뿐만 아니라, 정치개혁에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였다.

애국계몽가들은 전제정치 하에서는, ①지배자가 국가를 私有하여 국민의 생명·재산 등 민권보장이 불가능하여 民力이 쇠잔해지고, ②국민에 대한 정치참여를 불허하여 국민이 국가의 일을 남의 일 보듯이 하므로 애국심이 생길 수 없고, ③국민에 대한 가혹한 압제와 수탈로 국민의 생산의욕이 감퇴되어, 산업이 피폐해지고 국력이 쇠퇴해진다고 하여, 국가 쇠망의 큰 원인의 하나를 전제정치에 두었다.0775)薛泰熙,<法律上 人의 權義>(≪月報≫제9호), 12∼13쪽.
尹孝定,<專制國民은 無愛國思想論>(≪月報≫제5호), 19∼22쪽.
張志淵,<國家貧弱之故>(≪月報≫제6호), 11∼12쪽.
金成喜,<國民的 內治 國民的 外交>(≪會報≫제4호), 25∼26쪽.
따라서 한말 애국계몽단체들은 전제정치를 폐지하고 입헌대의제(신민회는 공화제)를 채용하여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함으로써, 민권의 보장과 산업의 발전, 국민의 참정과 애국심의 앙양을 이루어, 국민의 힘에 기초한 국권회복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폈다.0776)尹孝定,<地方自治制論>(≪月報≫제4호), 18∼19쪽.
金成喜,<政黨의 事業은 國民의 責任>(≪會報≫제1호), 28∼30쪽.
張志淵, 위의 글.

대체로 애국계몽가들은, 지방자치제와 입헌대의제를 실시하면, 국민의 자치정신과 자치능력이 향상되어 국민의 독립능력과 독립유지의 기초가 될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개명한 인민 위에 惡政府가 없고, 미개한 인민 위에 善政府가 없다”0777)林炳恒,<官吏의 事業과 人民의 事業>(≪月報≫제7호), 58쪽.고 하고, “정치의 우열이 국가의 강약을 좌우하며, 정치의 발전은 교육에 달렸다”0778)李鍾濬,<敎育論>(≪月報≫제7호), 1∼2쪽.고 하여, 교육에 의한 국민개명과 정치발전이 국가자강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논리를 폈다.0779)金成喜,<國民的 內治 國民的 外交>(≪會報≫제4호), 26쪽. 김성희는 “국가의 정도는 반드시 국민의 정치사상에 의하여 발달한다”는 몽테스큐의 말을 인용하고, “국가정치의 본원은 곧 국민의 사상이라”고 강조하였다.

넷째로 애국계몽가들은 애국정신 또는 조국정신의 강화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폈다.

애국계몽가들은 교육진흥·식산흥업·정치개혁과 더불어 大韓精神(사상)·자국정신(사상)·조국정신(사상)·독립정신(사상)·애국정신(사상)·국가정신(사상) 등 민족의 정신적인 측면을 각별히 중요시하였다.0780)朴殷植,<大韓精神>(≪月報≫제1호), 58쪽.
尹孝定,<本會의 趣旨와 特性>(≪月報≫제1호), 22쪽.
蘆浪居士,<敎育問題>(≪會報≫제7호), 13∼14쪽.
≪皇城新聞≫, 1908년 4월 25일, 논설<問愛國精神在處>.
≪大韓每日申報≫, 1909년 1월 5일, 논설<國家의 精神을 發揮할지어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한정신·조국정신·독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신교육을 실시해야만 국가부강과 국권회복이 가능하다고 강조하고,0781)朴相穆,<敎育精神>(≪西友≫11호), 17∼18쪽.
≪西北學會月報≫제1호,<敎育部-敎育方法 必隨 其國程度>.
애국정신·민족정신을 결여한 상태의 맹목적인 신교육의 추종은 결국 자강독립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였다.0782)朱東瀚,<學生의 職分과 義務>(≪西北學會月報≫제3호), 15∼17쪽.

그들이 애국정신·조국정신 등을 중요시한 것은 국권회복운동에 있어 가시적으로 부족한 실력의 격차를 정신면에서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애국심이란 국가구성의 핵심 정신을 이루는 것으로, 국민의 애국심 또는 자국정신이 없으면 국가는 形骸化되고 국권회복은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0783)尹孝定,<專制國民은 無愛國思想論>(≪月報≫제5호), 21쪽. 나아가 그들은 조국정신이 있어야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을 통하여 국가의 자강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으며, 실현된 자강을 독립으로 연결시킬 수 있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0784)朴殷植,<大韓精神>(≪月報≫제1호), 58쪽.
尹孝定,<本會의 趣旨와 特性>(≪月報≫제1호), 22쪽. 윤효정은 이 연설에서, 敎育과 殖産의 실제 발달이 大韓精神에 의거하지 않으면, 汽船이 氣力을 잃은 것과 같고 電車가 電力을 떠난 것과 같아서, 활동 진행의 勢力이 없게 될 것이니, 大韓精神이 국권회복의 大機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국사와 국어 교육을 통하여 自國의 연원을 알게 하고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갖도록 하여 자국정신을 개발시키고,0785)玄 檃,<國朝故事>(≪月報≫제8호), 34∼35쪽.
尹孝定,<議案>(≪月報≫제2호), 36∼37쪽.
申采浩,<歷史와 愛國心의 關係>(≪會報≫제3호), 3쪽.
李鍾一,<國文論>(≪會報≫제2호), 12∼13쪽.
≪大韓每日申報≫, 1908년 1월 26일, 논설<國文學校의 日增>.
≪皇城新聞≫, 1908년 6월 3일, 논설<歷史著述이 爲今日必要>및 1910년 4월 29일, 논설<國文發達을 注意함>.
입헌대의제도의 실시로 국민의 국정참여를 실현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와 일체감을 갖도록 함으로써 애국심과 조국정신을 고양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786)尹孝定,<專制國民은 無愛國思想論>(≪月報≫제5호), 19∼22쪽.
―――,<國家的 精神을 不可不發揮>(≪月報≫제8호), 8쪽.
金成喜,<政黨의 事業은 國民의 責任>(≪會報≫제1호), 28∼29쪽.
元泳義,<人民의 共同的 責任>(≪會報≫제2호), 8쪽.
그들은 조국정신을 교육과 식산을 통한 自强實現(실력양성)의 원동력으로, 실현된 자강을 獨立恢復(국권회복)으로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간주했던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조국정신이야말로 자강 실현의 양대 지주인 교육과 식산의 발전을 고무시키고, 이를 통하여 실현된 자강을 독립으로 연결시킴으로써 결국 자강실현의 양대 지주를 받쳐주는 불가결의 정신적 기반이라고 간주했던 것이다.

애국계몽가들은 교육진흥·식산흥업·정치개혁·조국정신을 통하여 양성된 실력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국권회복에 연결시키고 있는가.

대한자강회·대한협회·서우(서북)학회 등 합법단체의 애국계몽가들은 양성된 실력을 직접 독립전쟁에 연결시키는 주장을 펴지는 않았다. 그들은 국민이 근대지식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자립능력이 있으며, 강건한 애국정신을 가지고, 정치참여의 능력이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실력이 양성되고 문명화가 이루어지면, 보호국체제는 철폐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0787)大垣丈夫,<本會趣旨>(≪月報≫제1호), 25쪽.
金嘉鎭,<我國有識者의 日本國에 대한 感念>(≪會報≫제6호), 1∼2쪽.
그러므로 합법단체에 속한 애국계몽가들이 실력의 양성, 문명화의 성숙 이후에, 최종 단계에서 우선적으로 정치적 차원에서 국권회복을 시도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된다. 그러나 정치적 노력이 실패했을 경우에, 군사적 차원의 국권회복을 시도하리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후술하는 바와 같이, 비밀결사였던 신민회가 실력양성을 독립전쟁으로 직결시키고 있었는데, 신민회 주도 회원의 대다수가 대한자강회·대한협회·서북학회 등 합법단체의 주도 회원을 겸하고 있었던 사실은 주목할만 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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