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1) 민중계몽운동
  • (2) 회지·잡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

(2) 회지·잡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

당시 애국계몽단체들은≪大韓自强會月報≫·≪大韓協會會報≫·≪西友≫·≪西北學會月報≫·≪畿湖興學會月報≫·≪湖南學報≫·≪嶠南敎育會雜誌≫·≪太極學報≫등의 會誌를 발간하였다.

애국계몽단체들은 회지를 통하여 주장을 회원들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알리고자 하였다. 예컨대 대한자강회는 “전국 동포 모두가 대한자강회월보를 읽어 조국정신을 배양하며 세계의 現狀을 이해하게 함이 국권회복의 正路이다”0842)尹孝定,<大韓自强會月報刊行祝辭>(≪大韓自强會月報≫제1호), 5쪽.라고 하여, 모든 회원에게 회지 구독을 의무조항으로 부과했고, 일반 민중에게도 구독을 권유하여,0843)≪大韓自强會月報≫제1호, 卷末<注意>참조. 회지발간의 목적이 국권회복운동의 기초로서의 국민의 의식계발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애국계몽단체들의 회지 내용은 그들 단체의 취지·목적·사업과 관련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체로 일반논설·교육논설·식산논설과 국내외 정세와 사건에 관련된 기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구체적 내용은 사회진화론·민권론·실력양성론·애국정신론·사회관습개혁론 등으로 특히 교육·식산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한 국권회복사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애국계몽단체들은 회지를 통하여 교육의 필요성과 그 효과, 학교교육과 가정교육, 여성교육과 의무교육, 그리고 실업교육과 尙武敎育의 중요성을 계몽하였다.≪대한자강회월보≫의 경우 1호에서 13호까지에 게재된 논설 181건 중 제목이 교육관계의 논설이 26건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0844)柳永烈,<大韓自强會의 愛國啓蒙運動>(≪韓國近代民族主義 運動史硏究≫, 一潮閣, 1987), 50쪽.≪대한자강회월보≫는 논설을 통하여 약육강식·적자생존의 국제사회에서 교육을 통한 국민의 開明과 문명의 高度化가 약자를 강자로 만드는 길이며,0845)金成喜,<敎師의 槪念>(≪大韓自强會月報≫제8호), 25쪽. 교육에 의한 국민개명이 정치발전을 통한 강국화의 길이라는 교육자강의 논리를 보급하였다.0846)林炳恒,<官吏의 事業과 人民의 事業>(≪大韓自强會月報≫제7호), 58쪽.
李鍾濬,<敎育論>(≪大韓自强月報≫제7호), 1∼2쪽.
이처럼 애국계몽가들은 회지를 통하여 서양 문명국가의 근대적인 교육이념과 교육내용, 교육제도와 교육방법 등을 소개하며, 신교육에 의한 신학문과 신사상 보급의 중요성을 계몽하였다.

애국계몽가들이 교육자강론과 함께 중요하게 다루었던 부분은 식산자강론이었다. 그들은 회지를 통하여 생존경쟁·우승열패의 국제사회에서 식산을 통한 국가부강의 실현이 국권회복의 길이라고 하여 경제구국의식을 계몽하였다.0847)張志淵,<殖産興業의 必要>(≪大韓自强會月報≫제1호), 34∼35쪽.
張志淵,<國家貧弱之故>(≪大韓自强會月報≫제6호, 10∼15쪽·제7호, 6∼8쪽).
大韓子,<土地와 國家 人民의 關係>(≪大韓協會會報≫제6호), 12쪽.
또한 그들은 한국의 식산부진과 국가빈약의 요인은, 수백년 간의 압제정치와 가렴주구, 그리고 전제국가의 重士主義(선비존중주의)와 관존민비의 폐습 등에 의한 국민의 근로의욕 상실과 산업기술의 부족에 있다고 주장하였다.0848)張志淵,<國家貧弱之故>(≪大韓自强會月報≫제6호), 10∼15쪽.
金成喜,<殖産部論說>(≪大韓自强會月報≫제6호), 38∼40쪽.
따라서 그들은 회지를 이용하여, 정치개혁을 통하여 국민의 자유·평등의 권리를 보장하고, 관존민비·직업존비의 의식을 타파하여 국민의 근로정신과 생산의욕을 고취시키고, 각종 산업의 기술을 개발하여 생산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 국민의 경제적 자립과 국가의 부강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849)金成喜, 위와 같음.
張志淵,<殖産興業의 必要>(≪大韓自强會月報≫제1호), 34쪽.
呂炳鉉,<殖産部論說>(≪大韓自强會月報≫제2호), 14∼16쪽.

애국계몽가들은 회지를 통하여 경제발전의 구체적 내용으로 농공상의 균형있는 발전과 임업·광업·鹽業 등 각종 자원의 개발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들은 國家富源增進策, 황무지 개간, 임업의 필요성, 토지개량, 종자개량 등에 관한 연구성과를 소개하고 산업발달을 촉구하였다. 나아가 일제의 경제침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일본의 황무지 개간 요구의 底意를 폭로하며 민중들의 반대투쟁을 이끌어 냈다.0850)鄭 灌,≪舊韓末期 民族啓蒙運動硏究≫(螢雪出版社, 1995), 35쪽. 한편 그들은 경제적 자주운동이었던 국채보상운동의 취지를 홍보하여 국민의 참가를 호소함으로써 그 운동을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전환시키기도 하였다.0851)≪大韓自强會月報≫제9호, 54∼71쪽.

애국계몽단체들은 회지 외에도≪소년≫·≪朝陽報≫·≪가뎡잡지≫·≪少年韓半島≫·≪大同報≫·≪敎育月報≫등 수많은 일반 잡지를 발행하여 국민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08년 11월에 창간된≪소년≫은 신민회의 외곽 기관지로서 그 목표가 새로운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애국계몽잡지였다.≪소년≫의 편집 방침은 ①애국정신 배양 ②신지식 교육 ③勇敢한 志氣 장려 ④세계로의 시야 확장 ⑤애국주의적 국사·지리 교육 ⑥애국계몽문학 창건 보급 ⑦장차 국권회복의 일꾼 양성에 있었다. 이에 부합하는 내용으로≪소년≫은 각국의 위인 영웅전·지리·국사·세계사 등을 게재하고, ‘애국계몽문학’이라 할 수 있는 新文學을 통하여 민중계몽에 힘썼다. 특히 ‘애국계몽시’라 할 수 있는 李光洙의 <우리 영웅>과<곰>, 그리고 崔南善의<海에게서 소년에게>등 많은 시를 게재하여 청년들의 의식 계몽에 영향을 끼쳤다.0852)愼鏞廈,<新民會의 創建과 그 國權恢復運動>(下)(≪韓國學報≫9, 一志社, 1977), 135쪽. 尙洞靑年會에서 한글 전용으로 발간한≪가뎡잡지≫는 부녀자를 주대상으로 하는 계몽잡지였다.0853)李基文,<開化期의 國文使用에 관한 硏究>(≪한국문화≫5,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84), 72쪽. 그러나 계몽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가정으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한 잡지였다.0854)韓圭茂,<尙洞靑年會에 대한 연구(1897∼1914)>(≪歷史學報≫126, 1990), 104쪽.

한편 회지·잡지 외에 창가집도 간행되었다. 그 내용은 愛國歌·少年冒險猛進歌·獨立歌·血竹歌·勸學歌 등 주로 애국심의 고취와 국권회복의 사상을 담고 있었다. 민족의 얼이 담긴 창가가 널리 애창되어 애국적 운동으로 확산되자, 일제 통감부는 민간인 저술의 창가집을 압수하여 창가를 통제하였다.0855)孫仁銖,≪韓國開化敎育硏究≫(一志社, 1980), 390∼397쪽.

이와 같이 회지·잡지 등 출판물을 통한 자강독립사상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일제는 1909년 출판법을 공포하여 모든 원고는 통감부의 사전 검열을 받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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