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1) 민중계몽운동
  • (3) 강연회·토론회를 통한 민중계몽운동

(3) 강연회·토론회를 통한 민중계몽운동

애국계몽가들은 신문·잡지를 통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강연회와 토론회를 통하여 직접 민중 앞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신문·잡지가 구독 대상에 제약을 받는 것에 비해, 애국계몽강연은 전국에 걸쳐 직접 민중을 상대할 수 있었다. 애국계몽강연은 각종 단체의 通常會·강연회·토론회·친목회·학교 운동회 등 각종 집회에서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애국심의 고취, 신지식·신사상·신산업을 통한 실력의 양성,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애국계몽강연은 단체 또는 회원 개개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초기의 강연활동은 명망있는 인사를 초빙하여 연설회 및 토론회를 개최하는 형태였다. 전국적인 국민교육의 보급을 위해 창립된 國民敎育會는 일부 有志인사들을 초빙하여 ‘생명재산 보호’, ‘民智開發’, ‘교육발달 事’ 등을 주제로 연설회나 토론회를 개최하여 회원들의 애국심 고취에 노력하였다.0856)申惠暻,<大韓帝國期 國民敎育會 硏究>(≪梨花史學硏究≫20·21, 1993), 156쪽. 나아가 국민교육회 간부들은 각종 애국계몽단체의 통상회·총회, 지회 및 학교 연합운동회·간친회 등에 참석하여 강연활동을 벌였다. 대한자강회는 존속기간 17개월 동안 16회에 걸친 정기연설회를 개최했으며, 여기에서 42명의 연사들이 계몽강연을 했을 정도로 애국계몽강연에 주력하였다.0857)≪大韓自强會月報≫제1호에서 제3호까지의<本會會報>와<本會會錄>및≪大韓每日申報≫관련기사.

서북학회는 강연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서북학회는 지식계발을 위한 강연활동을 목적으로 西北協成學校 내에 心學講演所를 설치하여 강연활동을 벌였다. 그 설립 취지는 당시 어려운 시대적 상황을 극복할 청년들의 올바른 방향을 이끌며, 민중의 양심을 계발하기 위하여 도덕을 연마하려는 데에 있었다.0858)≪西北學會月報≫제10호,<心學講演>, 19∼21쪽. 이와 같은 취지에 따라 심학강연소는 민중, 특히 청년층을 주대상으로 강연활동을 전개하여 당시 청년들의 삶의 가치를 애국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이러한 애국계몽강연은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소년≫지는 잡지의 간행 외에 ‘少年雜誌社 公開講演會’의 개최를 시도하여, ‘失敗主義’(崔麟) 등 여섯 주제를 가지고 민중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가지려 하였으나, 일제의 금지로 무산되고 말았다.0859)≪大韓每日申報≫, 1910년 2월 26일, 광고.

애국계몽강연에서 민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으로 이름을 떨친 인사로는 안창호·이동휘·崔光玉·이상재·윤치호 등을 들 수 있다. 당대의 대표적인 강연가였던 안창호는 연설을 통하여 “民族競爭時代에서 독립한 국가 없이 민족이 서지 못하고 개인이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국민 각자가 각성하여 큰 힘을 모아야만 조국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큰 힘을 발하기 위해서는 국민 각자가 분투하고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0860)島山紀念事業會,≪島山安昌浩≫(1947), 17∼18쪽.
주요한,≪安島山全書≫(三中堂, 1971), 57∼63쪽.
또한 그는 “지금은 군사력이 미약하나 장기적으로 착실히 전쟁을 준비하여 우리 나라를 侵害하는 강국과 開戰하여 국권을 회복하자”0861)安昌浩, 雜俎<演說>(≪西友≫제7호), 25쪽.고 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전쟁 준비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안창호의 강연활동으로 청중들은 많은 감명을 받아 婦女들이 비녀와 指環을 빼서 애국사업에 헌납하는 사례가 빈번하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0862)李松姬,≪大韓帝國末期 愛國啓蒙學會硏究≫(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1985), 54쪽. 특히 巨商 이승훈을 감화시켜 교육·식산을 통한 구국운동에 헌신케 하였고, 안중근과 여운형도 안창호의 강연에 감동하여 민족교육에 진력하게 되었다. 역시 당대의 대표적인 연설가로 활약한 李東輝도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교육계몽을 위한 강연활동을 벌여 수많은 민족학교의 설립을 촉진시켰다.

이와 같이 애국계몽가들은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개최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각지의 사립학교에서 운동회 개최를 주도하며 계몽강연을 실시하였다. 서우학회는 각지의 사립학교들이 연합운동회를 열도록 주선하고, 운동회에 반드시 總代를 파견하여 강연을 통해서 교육구국활동을 촉구하였다.0863)李松姬, 위의 책, 44쪽. 그리고 그들의 운동회 개최는 강연활동 외에도 또다른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 學部次官 俵孫一은 당시 운동회의 성격을 “武裝的 시위의 운동회이며 교육의 本旨와는 相符되지 않는다”0864)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1, (1965), 919쪽.고 하였다. 이처럼 당시의 운동회는 단순히 체력의 증진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학생들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표출시키고, 장기적으로 실전에 대비하자는 목적하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애국계몽가들은 운동회를 개최하여 애국계몽강연을 실시했고, 나아가 미래의 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실전훈련을 실시했던 것이다.0865)高橋濱吉,≪朝鮮敎育史考≫(京城帝國地方行政學會 朝鮮本部, 1926), 301쪽.

이와 같이 전국 순회강연과 각 지역의 지회활동, 대운동회를 통한 계몽강연은 민중의 지식계발과 애국심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곧 애국계몽강연은 애국계몽운동의 취지를 전국적으로 파급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무엇보다도 민중으로 하여금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에 나서게 한 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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