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2) 교육구국운동
  • (2) 교과서 편찬운동

(2) 교과서 편찬운동

애국계몽가들은 민족교육에 필수적인 국사와 국어교육 등을 올바로 시키기 위하여 교과서 편찬을 추진하였다. 당시 일제 통감부는 한국의 교육정책을 장악하고 한국의 자주적 민족교육에 제약을 가하고 있었다. 국사과목은 이미 1895년 갑오개혁 이후 學部가 설치되면서 교과과정으로 중요시되었으며, 국사교육이 애국사상 및 독립사상 고취에 중요하다고 인식되어 러일전쟁 이후에는 국사교육의 붐이 일어났다.0893)金成俊,<舊韓末의 國史敎育에 對하여>(≪大東文化硏究≫8, 성균관대, 1971), 189쪽. 이에 통감부는 학부에 일본인을 배치하여 교육과정과 교과서 등 교육정책 전반에 관여하며, 민족주체성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지 못하도록 억압하였다.

더욱이 통감부는 日文敎科書를 편찬하여 식민지화 교육을 실시하려고 하였다. 일본인 學部 參與官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가 日文으로 초등 및 중등 교과서를 편집하려고 하자,0894)≪大韓每日申報≫, 1906년 6월 6일, 잡보<敎育禍胎>. 대한자강회는 일문교과서에 의한 교육은 한국정신을 소멸시킬 것이라 주장하고, 학부대신에게 일문교과서 편집문제를 강력하게 항의하였다.0895)≪大韓自强會月報≫제2호, 36∼37쪽. 결국 일제가 추진한 일문교과서 편집은 애국계몽가들이 이끈 사회 여론에 의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일제는 1908년 ‘사립학교령’과 ‘교과용도서 검정규정’을 공포케 하여, 관찬 교과서에는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내용이 제외되었으나, 민간 교과서는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을 위주로 편찬되었다. 당시 대표적인 민간교과서 편찬자는 玄采·安國善·장지연·신채호·유근·鄭寅琥·元泳義·安鍾和·金宇植 등이다. 가장 많은 교과서를 편찬했던 玄采는≪普通敎科東國歷史≫·≪東國史略≫·≪萬國史略≫등의 역사교과서와≪幼年必讀≫·≪幼年必讀釋義≫·≪大韓地誌≫등을 저술했고,≪淸國戊戌政變記≫·≪越南亡國史≫등을 번역했다. 그는 이와 같은 저서·역서를 통하여 열강에 침탈당하고 있는 중국의 현실과 越南과 폴란드의 멸망을 귀감으로 삼아 조국이 자강하여 열강의 대열에 서기를 염원하였다.0896)盧秀子,<白堂 玄采硏究>(≪梨大史苑≫8, 1969), 6쪽. 또 다른 대표적인 교과서 편찬자인 안국선은≪禽獸會議錄≫·≪政治原論≫·≪比律賓戰史≫등을, 장지연은≪大韓新地誌≫·≪녀독본≫·≪埃及近世史≫등을 편찬 번역하였다.0897)東亞日報社,≪日政下禁書 33권≫(≪신동아≫別冊附錄, 1977), 254∼276쪽.

그리고 교육단체와 정치사회단체도 독자적으로 교과서를 편찬하였다. 사립학교인 徽文義塾은 교과용 도서로≪高等小學修身書≫·≪中等修身敎科書≫등을 편찬하였다. 국민교육회에서는 인쇄소를 설치하고,≪大東歷史略≫·≪新撰小博物學≫(1906. 6)·≪初等小學≫(1906. 10)·≪新撰小物理學≫·≪初等地理敎科書≫(1907. 7) 등을 간행하였다.0898)申惠暻, 앞의 글, 156쪽.≪대동역사략≫은 조선왕조의 개국기원을 사용하고 ‘任那日本部說’을 배제하는 등 당시 일본사학의 영향이 지배적인 학계, 교육계에서 民族史書로서 출간되었다.0899)趙東杰,<韓末史書와 그의 啓蒙主義的 虛實>(下)(≪韓國學論叢≫10,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1987), 155∼159쪽. 보통학교용 국어 교과서로 쓰인≪초등 소학≫은 일제가 의도하는 일어수업, 일어교과서 사용에 대한 위기감에서 편찬되어, 국한문 혼용체로 발행되었는데,≪황성신문≫이 국가사상을 주입하는데 적절한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국가독립의 원동력’이라고 평론할 정도로 민족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0900)≪皇城新聞≫, 1907년 7월 15일, 논설<初等小學>. 興士團에서도≪初等本國略史≫·≪初等本國地理≫등을 독자적으로 간행하였는데, 이 책들은 철저한 민족주의적 사상과 배일사상을 담고 있었다.0901)白淳在,<敎科書 編纂>(≪한국사≫20, 국사편찬위원회, 1984), 221∼222쪽.

한편 민간에서 민족교육의 실시를 목적으로 교과서 편찬이 널리 확산되면서 교과서 편찬을 목적으로 한 전문회사도 등장하였다. 1906년 4월에 설립된 廣學社는 동서의 서적을 참작하고 한국의 성질을 절충하여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에까지 널리 쓰일 교과서를 편찬하고자 했다.0902)≪大韓每日申報≫, 1906년 4월 28일, 잡보<廣學社趣旨書>.

그리고 애국계몽가들은 애국주의·민족주의 교육을 위한 교과서와 각종 서적을 널리 배포하였다. 서우학회는 민족교육에 필요한 교과서를 평양의 지방사무소를 통하여 각지의 사립학교에 배포하였다.0903)≪西友≫제6호, 會報, 46쪽.
≪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24일, 잡보<敎育模範>.
신민회는 1908년 평양에 太極書館을 설립하고 서울에 지점을 두어, 경향 각지의 학교에 각종 서적과 교과서를 공급하였다. 태극서관은≪三國史記≫·≪東國通鑑≫·≪擇里志≫·≪海東小學≫과 각급 학교에서 사용하던≪漢文讀本≫과 梁啓超의≪飮氷室文集≫등을 취급하였다.0904)尹慶老,<新民會 活動의 經濟的 基盤>(≪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1992), 156∼158쪽.

애국계몽가들이 민족교육을 위한 교과서를 편찬하여 보급하자, 일제 통감부는 검정제도에 의거 학부에서 인가하지 않은 교과서의 사용을 금지시켰다.0905)高橋濱吉, 앞의 책, 178∼185쪽. 이에≪대한매일신보≫는 학부의 교과서검정 방법은 한국을 멸망케 하는 행위라고 비판했고,0906)≪大韓每日申報≫, 1909년 3월 16일, 논설<國家를 滅亡케  學部>. 민족적 교육기관은 인가받지 않은 교과서를 等寫하여 몰래 사용하기도 하였다.0907)김종덕,<한말계몽운동의 계보와 성격>(≪韓國의 社會와 文化≫1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 200쪽.

대한협회 평의원 장지연은 애국교육을 무리하게 금지하는 교과서 검정규정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당분간 대한협회와 각 학회가 심사위원을 정하여 교과서를 균일케 할 것을 주장하였다.0908)金項勼,≪大韓協會 硏究≫(단국대 박사학위논문, 1992), 120∼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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