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3) 경제구국운동
  • (4) 민족경제 건설운동

(4) 민족경제 건설운동

애국계몽가들은 식산흥업을 통한 민족경제의 건설을 국권회복의 중요한 방책으로 삼았다. 그들은 생존경쟁·우승열패의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낙오된 이유 중의 하나는 경제적 침체에 있다고 파악하고, 국민의 경제적 자립과 국가 부강의 실현이 곧 국권회복의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국민의 근로의식과 생산의욕을 고무시키고, 각종 산업의 생산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식산진흥론을 제시했으며, 일제의 경제 침탈에 대한 경각심과 근대적인 경제의식을 일깨워 민족산업의 발흥에 노력하였다.0970)柳永烈,<大韓自强會와 新民會의 民族運動>(≪大韓帝國期의 民族運動≫, 一潮閣, 1997), 193∼194쪽. 애국계몽가들은 경제적 계몽운동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민족경제의 확립을 위한 실천운동을 전개하여, 근대적 회사를 설립하고 한국인 상공회의소와 경제연구단체 및 실업장려단체들을 조직하여 경제적 자립과 국가의 부강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산업의 진흥에 상당한 성과를 낸 단체는 비밀결사인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민족산업 진흥을 위한 방법으로 “실업가에 권고하여 영업방침을 지도할 것”과 “본회에 합자로 실업장을 設하여 실업계의 모범을 作할 것”0971)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1(1965),<大韓新民會通用章程>, 1,028쪽.을 제시하고, 자립적 실업가 육성 및 합자회사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곧 신민회는 민족산업을 개발하기 위하여 신민회 회원들이 합자형태의 공장과 근대적 기업을 설립 발전시켜 민족자본을 육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실천운동으로서 신민회는 商務同事·平壤磁器會社 등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경제단체를 설립하였다.

1908년 2월, 신민회는 서구의 근대적인 수입상품을 취급하는 잡화업에 진출하여 龍川 場市에 상무동사를 설립하였다. 상무동사는 신민회 지도부를 중심으로 100여 명의 주주가 참여한 합법적인 주식회사였는데, 자본금이 무려 9천여 원에 달하여 당시의 경제 상황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회사였다. 상무동사는 이탈리아의 무역상사 巴馬洋行과 1만 5천여 원에 달하는 대규모 서구상품의 직무역을 시도했으며, 특히 일본 상품의 불매운동과 항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4월 통감부가 市場稅를 제정 공포함에 따라 한국상인들의 항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반일항세운동은 상무동사의 임원이었던 宋子賢·黃菊保 등이 주도하였다. 이후 항세운동은 일본인을 타살하는 商民蜂起로 비화되어 범국민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였다.0972)尹慶老, 앞의 글, 146∼151쪽. 요컨대 상무동사가 주도했던 항세운동은, 궁극적으로 일본의 경제침략에 반대하여 토착자본을 수호하고 민족자본을 형성하고자 한 경제구국운동이었으며, 李昇薰이 외래 자본의 침투에 맞서고자 제창한 이른바 ‘關西資門論’과 상통하는 것이었다.0973)金道泰,≪南岡 李昇薰≫(韓國印刷株式會社, 1950), 42∼46쪽. ‘관서자문론’은 서북지방의 상업공자들이 토착자본을 규합하여 민족자본을 형성하자는 주장으로 이후 영남, 호남지방의 토착자본과의 연계를 계획한 명실상부한 민족자본 형성론의 한 방책이었다.

평양 자기회사 역시 ‘관서자문론’의 실천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 신민회는 민족산업 부흥의 상징으로서 磁器에 주목하여, 1908년 2월 평양에 磁器製造株式會社를 설립하여 도자기를 생산하였다.0974)愼鏞廈,<新民會의 創建과 그 國權恢復運動>(下)(≪韓國學報≫9, 一志社, 1977), 143∼154쪽. 이승훈 등은 총 1,200주를 공모, 자본금 6만 원을 모금하여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를 거족적인 민족산업으로 운영하려 하였다.0975)≪大韓每日申報≫, 1908년 10월 16일, 광고. 그러나 총 주식 1,200주를 다 채우지 못하고 800주만 소화하였고, 제품의 생산단계에서 판매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자기회사는 일제의 경제적 침투가 심화된 당시 상황에서 토착자본을 규합하여 민족적 회사로 운영하려 했던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0976)尹慶老, 앞의 글, 154∼155쪽.

상무동사·자기회사 외에도 신민회는 평안북도 納淸亭에 무역상사 겸 都賣商社로서 ‘協成同社’를, 安岳에는 소규모의 모범 방직공장과 연초공장을 설립 운영함으로써 민족경제 건설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0977)愼鏞廈, 앞의 글(1977), 145∼146쪽.

대한협회도 신민회와 마찬가지로 민족산업의 진흥에 노력하였다. 대한협회의 본회와 경성지회·부안지회·제주지회·덕원지회·광주지회 등은 實業部를 설치하고 식산흥업의 장려에 노력하였다. 대한협회 직산지회·영흥지회·창성지회·선천지회는 식목과 조림운동을 폈고, 군산지회는 모범농장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대한협회 자인지회는 실업권장회를 실치하여 농작물의 개량과 농산물품평회를 열었고, 경주지회는 근면회를 조직하여 식산흥업과 근면저축을 장려했으며, 전주지회와 군산지회는 회사와 상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기도 했다.0978)柳永烈,<大韓協會支會의 組織과 활동>(앞의 책, 1977), 267∼270쪽. 또한 서북학회도 민족산업의 진흥에 노력하여, 숙천 갈산동에 農會, 평양에 농림학교와 농사시범장, 그리고 철산에 製紙會社를 설립하여 실업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0979)李松姬, 앞의 책, 9쪽.

이와 같이 애국계몽단체들이 각지에 상회사와 공장, 농회와 농장, 실업학교 등을 설립하여 민족산업을 진흥시키고, 외래자본에 대항하여 토착자본을 모아 민족경제를 확립하려 했던 경제구국운동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소규모의 민족자본으로 대규모의 일본 독점자본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국계몽가들이 일제의 경제침탈에 대한 경각심과 근대적 경제의식을 일깨워 주었고,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근대산업의 진흥과 민족산업자본의 발흥에 기여한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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