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4) 정치구국운동
  • (1) 을사조약 반대운동

(1) 을사조약 반대운동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전쟁 개전 직후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간섭의 강도를 높였고, 5월에는 ‘對韓方針’과 ‘對韓施設綱領 및 細目’을 정하여 각종의 이권을 탈취하여 갔으며,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제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사회 각계각층으로부터 을사조약에 반대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첫째로 趙秉世 등 유생·관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보호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의 처벌과 강제로 체결된 조약의 폐기를 황제에게 촉구하는 상소운동이 일어났다.0981)國史編纂委員會,≪高宗時代史≫6(探求堂, 1972), 381∼394쪽. 둘째로 고종황제와 왕실 측근들은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을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일본에 대한 국제적 압력으로 조약을 취소케 하려는 외교운동을 시도하였다.0982)董德模,<韓國과 20世紀初의 國際政勢>(≪한국사≫19, 국사편찬위원회, 1976), 32∼33쪽
李光麟,≪韓國史講座≫5(一潮閣, 1981), 470∼471쪽.
셋째로 閔泳煥·조병세 등 국권상실에 울분한 우국지사들은 죽음으로써 굴욕적인 ‘보호조약’에 항거하였다.0983)朴殷植,≪韓國痛史≫(三乎閣, 1946), 90∼96쪽.
國史編纂委員會,≪高宗時代史≫6, 392∼396쪽.
넷째로 위정척사론의 입장에 있던 수구유생들은 무력으로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0984)李元淳,<대한제국의 종말과 의병항쟁>(≪한국사≫19, 국사편찬위원회, 1976), 8∼10쪽. 다섯째로 개화자강계열의 인사들은 일본에 의한 국권의 일부 상실이 일본의 침략에 그 원인이 있지만, 우리의 실력부족에 그 근본 원인이 있다고 파악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들 애국계몽가들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운동을 폈다.

애국계몽단체의 을사조약 반대운동은 조약 체결을 10여 일 앞두고, 일진회가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위임하여 일본의 지도와 보호를 받음으로써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국가의 안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함0985)≪皇城新聞≫, 1905년 11월 6·7일, 잡보<一進會宣言書>.에 따라 촉발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상동청년회·국민교육회·동아개진교육회·대한구락부·공진회·헌정연구회 등 애국계몽단체들은 일본의 ‘보호정치’에 찬성하는 일진회를 규탄하는 범국민적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0986)李求鎔,<主權守護運動>Ⅰ(≪한국사≫19, 국사편찬위원회, 1978), 231쪽.

≪황성신문≫·≪제국신문≫·≪대한매일신보≫등 애국계몽언론들은 기만적인 을사조약 체결의 무효를 주장하는 한편, 경향 각지의 조약반대운동을 상세히 보도하여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키고 반일운동을 고취시켰다.0987)申載洪, 앞의 글, 234∼235쪽. 황성신문사 사장 겸 주필 장지연은<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통하여 일본의 교활한 침략술책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을사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비판하여 민족적 분노를 일으켰다.0988)≪皇城新聞≫, 1905년 11월 20일, 논설. 이 논설 게재를 이유로 장지연은 경무청에 구금되고≪황성신문≫은 압수 및 정간당하고 말았다(≪大韓每日申報≫, 1905년 11월 21일, 논설<皇城義務>).≪대한매일신보≫는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민영환과 조병세의 순국을 찬양하고, 그 유서 전문을 신문에 공개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국권회복에 매진할 것을 호소하였다.0989)≪大韓每日申報≫, 1905년 12월 3일, 논설<讀桂庭閔輔國遺書>·12월 5일, 논설<讀趙元老遺書>. 애국계몽언론을 통한 이들의 순국 소식은 온 국민의 반일감정을 격화시켰다.

기독교 청년학생들은 서울과 지방에서 을사조약 반대시위를 벌였다. 한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외세의 침탈과 지배층의 압제로부터 고통받는 한국민중의 영적인 구원과 현실생활의 구원을 위한 선교교육을 실시하여, 당시 한국교회와 기독교학교는 강한 민족적 성향을 띠고 있었으며 항일구국운동의 온상이 되었다.0990)崔永禧,<乙巳條約을 前後한 韓國民의 抗日鬪爭>(≪史叢≫12·13, 1968), 612쪽.
韓根祖,≪高堂 曺晩植-偉大한 韓國人≫10(太極出版社, 1972), 84∼85쪽.
기독교 민족운동 단체인 尙洞靑年會0991)상동청년회는 전덕기·정순만 등의 주도로 이준·이동휘 등의 후원을 얻어 1903년 조직된 단체였다. 상동청년회 출신들은 신민회 등 애국계몽단체에서 활약하였고 신민회 창건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미주·연해주·간도 등 해외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하였다. 명실공히 1900년대 국권회복운동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韓圭茂,<尙洞靑年會에 대한 연구>,≪歷史學報≫126, 1990).는 중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고 학문을 통한 빈곤추방과 국세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0992)申惠暻, 앞의 글, 163쪽. 상동청년회는 1905년 11월 일진회의 을사조약 체결 책동에 반대하여 회원 천여 명이 구국기도회를 열어 항의했으며, 조약반대 상소를 올리고 大漢門에서 강제적인 조약체결반대 가두연설을 하였다.0993)金 九,≪白凡逸志≫(敎文社, 1979), 147∼148쪽. 그리고 회장 全德基와 鄭淳萬 등은 좀더 강경한 투쟁방법으로 박제순 등 을사오적의 암살을 모의했으나 일본군대의 삼엄한 경비로 실패하고 말았다.0994)鄭 喬,≪大韓季年史≫下 (국사편찬위원회, 1967), 191쪽.

평양의 숭실학교 학생들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한동안 수업을 전폐하고 을사조약 반대시위에 나섰다. 金永瑞 등 시위에 적극적인 학생들은 서울로 올라와서 200여 명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한문 앞에서 연 3일 동안 을사조약 취소투쟁을 벌였다. 이때 평양 숭실학교 학생들은 서울의 기독교 민족운동 단체인 상동청년회와 연계하여 가두시위를 벌여, 서울과 평양의 항일 청년학생 연합시위를 연출했던 것이다.0995)William M. Baird, Pyeng Yang Academy, K. M. F. vol. 2, No. 12 (October, 1966) p. 221. Lak-Geoon George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 Union Christian Press, 1927, p. 330.
金永瑞의 對政府褒賞申請書 寫本 참조.

한편 羅喆·吳基鎬 등은 계몽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을사5적의 암살을 목적으로 비밀결사인 自新會를 조직하였다.0996)崔永禧, 앞의 글, 616∼617쪽. 자신회는 을사조약 체결의 책임이 다섯 대신에게 있다고 판단하고, 보호국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으로서 을사오적의 암살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자신회 회원들은 폭탄장치를 한 상자를 선물 상자로 가장하여 참정대신 박제순과 내무대신 李址鎔의 암살을 기도했으며, 군부대신 權重顯을 권총으로 저격하는 등 다섯 명의 매국대신을 암살하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0997)申載洪, 앞의 글, 251∼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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