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4) 정치구국운동
  • (2) 고종양위 반대운동

(2) 고종양위 반대운동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제는 통감정치를 실시하여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잠식해 오는 식민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애국계몽가들은 정치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국민적 단결을 모색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대한자강회의 지방자치제도의 실시 주장이었다.

대한자강회를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가들은 자강독립의 전제와 목표로서의 ‘국민국가건설론’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국가란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국가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민국가 수립의 필요성을 계몽하였다. 그들은 국민국가에 부합되는 정치체제로서 共和政體가 가장 진보적이고 우월한 정체라고 인식했으나, 현실적인 실현 불가능성 때문에 立憲代議政體의 점진적인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입헌대의제도의 실시를 위해서는 국민의 자치능력 배양이 선행되어야 하며, 국민의 자치능력 배양은 지방자치제도의 실시에서 가능하다고 보았다.0998)柳永烈, 앞의 글(1987), 63쪽.

대한자강회 등 애국계몽단체들의 입헌대의제도 확립을 전제로 한 지방자치제도 실시의 요구는 회원들의 논설과 연설 등 언론을 통하여 주장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중추원에 반영되어 1907년 1월 30일의 중추원 회의에서는 인민의 자치제도를 우선 서울에서부터 실시하자는 안건을 결의하여 정부에 조회했고, 같은해 2월 25일의 중추원 회의에서는 인민자치제도의 실시를 정부에 촉구하기도 하였다.0999)≪大韓自强會月報≫제8호,<樞院議決自治制>, 66쪽·<樞院議決>, 71쪽.

그러나 일제의 보호국 체제하에서, 더욱이 일본이 대한제국의 병합을 획책했던 상황에서, 한국민의 자치능력을 배양시킬 지방자치제도의 실시가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자강회를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가들의 국민에 대한 정치의식의 고취와 그들의 정치개혁의 주장은 당시의 민족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1000)柳永烈, 앞의 글(1987), 63∼64쪽.

1907년 전반기 애국계몽가들의 지방자치제도 실시운동 등 정치제도 개혁운동이 한창일 때, 일제는 헤이그 密使事件을 트집잡아 고종을 양위시키고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자국의 황제가 외국의 강제력에 의해 양위되는 정치적 비상사태에 직면하여, 애국계몽단체들은 고종양위 반대를 통한 반일적 정치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은 미국·영국 등 열강의 국제적인 밀약으로 진행되었으나, 국제정세에 어두운 고종은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3명의 밀사를 헤이그 平和會議에 파견하였다. 밀사 일행은 1907년 6월 25일 현지에 도착하여 외교활동을 벌였으나, 대한제국에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참석이 거부되고,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각국 위원들로부터 면회조차 거절당한 채, 萬國記者協會에서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상과 을사조약의 강제성을 폭로하였다.1001)國史編纂委員會,≪高宗時代史≫6, 625∼627·629쪽.

이에 일본 정부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이용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에 관한 전권의 장악을 목표로 세우고, 고종의 양위와 통감의 동의에 의한 행정, 그리고 대신·차관 등 주요 관직에 일본인 임명 등을 실현할 방안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훈령하였다.1002)위의 책, 634쪽. 이토는 한국의 총리대신을 불러, 고종의 밀사파견은 일본에 대한 적대행위이고 협정위반이므로, 일본은 한국에 선전포고할 권리가 있다고 위협하여 고종의 양위를 강박했으며, 한국의 총리대신과 내각대신들은 일본 정부의 책임추궁을 회피하기 위하여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였다.1003)위의 책, 636∼637쪽. 고종은 처음에는 양위를 완강히 거부했으나, 일제와 한국 내각대신들의 강요로 1907년 7월 18일에는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케 했다가, 7월 21일에는 황태자에게 帝位를 완전히 넘겨주게 되었다.1004)위의 책, 638∼643쪽.
鄭 喬, 앞의 책, 266∼171쪽.

헤이그 밀사사건에 대하여 통감 이토로부터 책임추궁을 받은 이완용 내각이 고종의 양위를 간청한 7월 16일 경부터 대한자강회·동우회·대한구락부·기독교청년회·국민교육회의 회원들은 서울 도처에서 연설로 민심을 고무하기 시작하였다.1005)釋尾東邦,≪朝鮮倂合史≫(朝鮮及滿洲社, 1926), 360쪽.
國史編纂委員會,≪高宗時代史≫6, 636∼637쪽.
7월 18일 헤이그 밀사사건의 처리를 위하여 일본 외무대신이 내한하자, 항간에 황제가 사죄차 渡日하리라는 설, 혹은 황제가 양위하리라는 설, 혹은 韓日新協約이 체결되리라는 설이 유포된 가운데, 대한자강회와 동우회 회원들을 비롯한 서울시민 수천 명이 궐기하여 종로에서 민중대회를 열고 대한문 앞에서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다.1006)國史編纂委員會, 위의 책, 639∼640쪽.

7월 19일 황태자 대리청정의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자강회와 동우회 회원들은 종로에서 대중시위를 조직하여 내각대신들을 성토하고 決死會를 구성하여 일진회의 기관지인 國民新報社를 습격 파괴하였다. 한편 시위대의 일부 군인들은 탈영하여 종로파출소를 습격, 일본 경찰에게 사격을 가하여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다.1007)위의 책, 640∼641쪽
釋尾東邦, 앞의 책, 361쪽.
황태자 대리식이 거행된 7월 20일에도 대한자강회·동우회 회원들을 비롯한 수만 명의 시민들은 慶運宮을 둘러싸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대한자강회·동우회의 젊은 결사대들 주도하에 성난 민중들은 총리대신 이완용의 집을 방화 파괴하고, 시내의 경찰서와 파출소를 습격 파괴하였다.1008)國史編纂委員會, 위의 책, 642∼643쪽.
釋尾東邦, 위의 책, 362∼363쪽.
그러나 7월 21일에 일본경찰과 헌병은 서울시내 요소에 기관총을 가설하고 삼엄한 경비를 펴 시민들의 시위를 봉쇄했고, 이런 가운데 고종은 황태자에게 완전히 양위하게 되었던 것이다.1009)國史編纂委員會, 위의 책, 643∼646쪽.

일제는 고종을 퇴위시킨 뒤, 곧바로 新聞紙法(7. 24)과 保安法(7. 27)을 반포하여 한국인의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활동을 질식케 하고, 丁未七條約(7. 24)과 軍隊解散(8. 1)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행정권·사법권·군사권을 탈취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통감부는 이완용 내각의 宋秉畯으로 하여금, 대한자강회가 민중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보안법 제2조 “내부대신은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結社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는 규정을 적용하여, 1907년 8월 21일에 대한자강회를 강제로 해산케 하였다.1010)李鉉淙,<大韓自强會에 대하여>(≪震檀學報≫29·30, 1966), 170쪽.
≪大韓每日申報≫, 1907년 8월 23일, 別報<吊大韓自强會文>.

요컨대 일제의 강요에 의한 대한제국 황제의 퇴위라는 충격적인 정치적 사건을 계기로 하여, 대한자강회 중심의 정치운동은 월보와 연설 등 언론과 출판을 통한 계몽운동 형태에서 국권수호를 위한 대중시위 형태로 전환되었고, 이로써 대표적 애국계몽단체였던 대한자강회는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일제의 보호국 체제하에서 애국계몽단체들의 정치운동이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에서 국권수호를 위한 대중시위로 전환되었을 때, 그 단체의 존립 자체마저 불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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