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자주자강과 민족의식의 고양을 위한 학문으로 국어 분야보다 더욱 집중적인 연구가 진행된 분야는 국사였다.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위한 국사연구와 국사교육은 이미 독립협회 때부터 강조되어 왔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대한사람은 大韓史記를 이해해야만 하며, 대한사기 속에서 유명한 충신들을 공부하여 애국심을 배양하면 세계의 대접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여,1035)≪독립신문≫, 1898년 3월 8일, 논설. 自國史 교육을 애국심의 연원으로 인식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의 자국사에 대한 관심은 애국계몽사가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애국계몽사가 玄檃은, 우리 국민들이 우리 역사를 알지 못하고 중국의 역사만을 숭상하여 애국심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하고, 국사교육을 통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자국의 연원을 알게 하여, 애국심을 배양함으로써 국가를 스스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36)玄 檃,<國朝故事>(≪大韓自强會月報≫제8호), 34∼35쪽.
또한 애국계몽사가였던 장지연은<新訂東國歷史序>에서 국사에 대한 교육이 애국심과 민족정신의 고취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역사를 연구한 신채호도 논설<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에서 역사의식의 유무에 의하여 국가의 흥망이 좌우된다고 하여 역사와 국가와의 관계를 불가분의 동일체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국민의 애국심은 웅변이나 연설 또는 세익스피어 같은 외국 대문호의 영향으로 길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남녀노소와 사회 신분을 가리지 않고 국민 모두가 자국의 역사를 아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그는 세계 열강의 정치적·경제적 선진화는 역사에서 나온다고 하고,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는 독립의 기초이며, 당시의 시대상황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역설하였다.1037)申采浩,<歷史와 愛國心과의 關係>(≪大韓協會會報≫제2호), 75쪽·제3호, 152∼154쪽.
이와 같이 애국계몽사가들은 자국사에 대한 이해를 통한 민족적 자아의 발견과 애국심의 배양을 국권회복의 중요한 방법으로 인식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國脈’을 보유한 새로운 민족의 역사를 서술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38)丹齋申采浩先生紀念事業會,≪(改訂版) 丹齋申采浩全集(上)≫(1977), 471쪽. 민족의 역사는 당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정신적·문화적 배경이며 민족운동의 지표이기도 했다. 따라서 애국계몽사가들은 자주독립국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국사연구에 몰두하였다. 애국계몽사학자인 張道斌은 당시 그의 학문 연구의 주요 관심사는 국사였으며, 그 목적은 일제로부터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후일에 술회하였다.1039)張道斌,<暗雲짙은 舊韓國末>(≪思想界≫, 1962년 4월호).
汕耘紀念事業會,≪汕耘張道斌全集≫권 1, 通史 Ⅰ(1981), 11∼13쪽. 이처럼 애국계몽기의 국사연구는 순수한 역사학의 탐구라기 보다는 애국·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계몽적인 역사 지식의 보급에 그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역사서술은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강렬한 민족의식을 표출하는 연구가 대부분이었다.≪三國遺事≫·≪三國史記≫·≪高麗史≫·≪東國通鑑≫등의 고전적인 역사서가 復刊되었고, 通史로서 黃玹의≪梅泉野錄≫과 鄭喬의≪大韓季年史≫그리고 金澤榮의≪歷史輯略≫등이 저술되었다.1040)金容燮,<우리나라 近代歷史學의 成立>(≪韓國의 歷史認識≫下, 창작과 비평사, 1976), 425쪽. 그리고 근대 역사학적인 방법에 비교적 접근한 특수 연구로는 장지연의≪我韓衣冠制度考≫와≪朝鮮儒敎觀≫그리고≪朝鮮佛敎觀≫등이 있었다.1041)金容燮, 위의 글, 426쪽.
사회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자국사가 편찬되고, 애국심과 민족의식의 고양을 위한 국사교과서가 간행되어 각종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1905년 이후 일본의 교육통제정책이 강화되면서 민족교육의 실시가 어렵게 되자, 초기 학부의 주도로 편찬되던 국사교과서는 점차 애국계몽사가들에 의해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국사교과서는 대부분 일제의 통제가 비교적 적은 사립학교용 교과서로 쓰였는데, 애국사상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민족주의적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1042)白淳在,<敎科書編纂>(≪한국사≫20, 국사편찬위원회, 1983), 225∼228쪽. 국사교과서를 저술한 대표적 계몽사학자로는 元泳義·朴晶東·柳瑾·장지연·현채·김택영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국사교육을 통하여 민족정신을 강조한 애국계몽운동의 지도자들이었다.1043)金成俊, 앞의 글, 178쪽. 그러므로 일제는 1908년 교과용도서 검인정규정을 발표하여 민족정신이 깃든 민간 교과서의 저술을 탄압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 주도의 국사교과서 편찬에도 제약을 가할 정도로 민족적 국사교육에 탄압을 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9년 3월 출판법 제정 이후, 현채의≪中等敎科東國史略≫과≪幼年必讀≫등 민족교육의 지침서가 되었던 국사관련 서적은 발매가 금지되고 압수당했다.1044)金成俊, 위의 글, 183∼189쪽.
한편 한말의 애국계몽사가들은 본국사 이외에도 외국의 역사, 곧 세계 각국의 근대 정치흥망사·독립운동사·영웅전기물을 번역 발행하여, 일제 식민지화의 위협을 경계하고 자주독립정신과 서구적인 개혁사상을 전파하고자 하였다. 당시의 대표적인 번역 사서로는≪埃及近世史≫(장지연 역, 1905),≪波蘭國末年戰史≫(魯瑢善 역),≪越南亡國史≫(현채 역, 1906),≪伊太利建國三傑傳≫(신채호 역, 1907),≪乙支文德傳≫(신채호 역, 1908),≪聖雄李舜臣傳≫(신채호 역),≪金庾信傳≫(박은식 역),≪美國獨立史≫(현은 역),≪法國革命史≫(현채 역),≪瑞士建國志≫(박은식 역, 1907) 등이 있다.
요컨대 한말의 애국계몽사가들은 민족주체성의 확립과 애국심의 고취를 위한 民族史學의 수립에 노력하였다. 그것은 곧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위기에 처한 민족을 구하고자 하는 민족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계몽사가들은 전근대적 의식의 잔재 위에서 영웅의 행적을 역사 발전의 주요 동기로 인식하는 관념적인 영웅사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1045)金泰永,<開化思想家 및 愛國啓蒙思想家들의 史觀>(≪韓國의 歷史認識≫下, 創作과 批評社, 1976), 418∼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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