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6) 독립군기지 건설운동
  • (1) 독립전쟁론의 대두

(1) 독립전쟁론의 대두

1907년의 군대해산과 정미7조약 이후 대한제국의 행정권·사법권·경찰권을 장악한 일제는 한민족의 국권회복운동에 대하여 강도 높은 탄압을 가해 왔다. 이에 당시 국권회복운동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던 항일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일각에서는 항일투쟁의 방법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항일의병장 가운데서는 국내에서의 즉각 결전보다 국외에서의 장기적인 무장투쟁이 모색되었고, 애국계몽가들 가운데서는 국내에서의 실력양성에 더하여 국외에서의 무장투쟁이 모색되었다. 항일의병운동의 전통적인 ‘즉각결전에 의한 즉시독립론’은 실력양성에 의한 점진적 독립론으로의 전환이 모색되었고, 애국계몽운동의 知的·경제적 ‘실력양성에 의한 자강독립론’은 군사력의 양성에 의한 근대적 독립전쟁론으로의 전환이 모색되었던 것이다.

독립전쟁론은 대한자강회·대한협회·서북학회 등 합법단체의 운동을 주도하던 인물들이 다수 포진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주도하였다. 신민회의 국권회복론은 기본적으로 먼저 실력을 양성한 다음 독립의 기회에 대비해야 한다는 ‘선실력 후기회론’이었다. 이러한 신민회의 선실력 후기회론은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의 ‘선자강 후독립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국외에 군사기지를 건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군사적 실력양성론이었으며, 군사적 실력양성에 의한 독립전쟁론인 점에서 합법단체의 국권회복론과 차별성를 가진다.1064)柳永烈,<愛國啓蒙派의 民族運動論>(앞의 책, 1997), 300∼301쪽. 곧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건설의 구상은 일제로부터 한국민족이 독립을 회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적절한 기회에 일본과 근대전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라는 독립전쟁론에 의거한 것이었다.

신민회를 중심으로 하는 애국계몽가들의 독립전쟁론은 1907년 7월과 8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고종의 퇴위와 정미7조약의 체결, 그리고 군대해산 등의 망국적 사태가 벌어지고, 신문지법과 보안법의 제정으로 합법적인 민족운동이 극한점에 달한 상황에서 구상되었으며, 신민회의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계획은 의병운동의 퇴조기에 구체화되었다.1065)元義常,<新興武官學校>(≪新東亞≫, 1969년 6월호), 23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군전투사>(상), (≪독립운동사≫5권, 1973), 162∼163쪽.
신민회는 1909년 봄에 梁起鐸의 집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사안을 의결하고 이의 실행을 계획하였다.1066)元義常, 위의 글, 236쪽. 그리고 독립군 양성의 거점으로는 1860년대 이래 많은 한인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는 西北間島와 露領 연해주 지역이 상정되었다.

신민회가 구체적으로 독립전쟁론을 채택하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때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포살사건으로 인하여 구속된 신민회 간부들이 석방된 직후였다. 1910년 3월 신민회는 석방된 간부들을 중심으로 긴급 간부회의를 열고 독립전쟁론을 국권회복의 최고 전략으로 채택하여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신민회 긴급 간부회의는 일제에 의해 구속당했던 간부들이 우선적으로 국외로 나아가 독립군기지 건설사업을 담당하고, 국내 잔류 간부와 회원은 이 사업을 지원함과 동시에 종래의 실력양성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1067)島山紀念事業會,≪續篇 島山安昌浩≫(1954),<李剛回顧談>, 134∼145쪽.
주요한,≪安島山全書≫(三中堂, 1971), 896∼897쪽 附錄<安昌浩豫審訊問記補遺>.
이때 결정된 독립군기지 건설사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첫째로 국내에서 재력있는 다수의 인민을 서간도에 집단 이주시켜 토지를 매입하여 부락을 만든다는 것, 둘째로 서간도에 ‘民團’을 조직하고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며, 나아가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文武雙全敎育을 실시하고 士官을 양성한다는 것, 셋째로 이들을 중심으로 독립군을 창설하여 기회를 틈타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었다.1068)尹炳奭,<1910年代의 韓國獨立運動>(≪韓國近代史論≫Ⅱ, 지식산업사, 1977), 30쪽.

이것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적절한 시기에 일본과 독립전쟁을 전개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하려는 독립전쟁 전략이며, 당시 합법단체들이 지닌 국권회복론의 한계성을 한 단계 극복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민족의 실력’이란 근대적 지식과 경제적 자립능력, 그리고 확고한 민족정신과 근대전을 수행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란 장차 일제가 더욱 팽창하여 러시아나 청국 또는 미국과 전쟁을 벌이게 될 때와 같은 독립전쟁의 기회를 의미한다.1069)尹炳奭, 위의 글, 27쪽. 신민회의 독립전쟁전략은 일본 제국주의가 팽창정책을 써서 열강과 전쟁을 일으키면, 국외의 독립군으로 하여금 국내진공작전을 벌이게 하고, 국내에서는 신민회를 비롯한 애국계몽세력들이 민중을 결집하여 이에 호응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건설론은 일제가 장차 침략전쟁을 벌이는 기회에 대비하여,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서북간도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1070)尹炳奭, 위의 글, 26∼28쪽.
國史編纂委員會,≪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105人事件公判始末書Ⅰ-≫(1986), 290·295·305·312·315쪽.
國史編纂委員會,≪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105人事件公判始末書Ⅱ-≫(1986), 79∼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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