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6) 독립군기지 건설운동
  • (2) 독립군기지 건설준비

(2) 독립군기지 건설준비

국외로 망명한 신민회 간부들은 1910년 4월의 靑島會議와 9월의 海蔘威會議에서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논의를 전개하였다.1071)安昌浩,<豫審訊問記補遺>(≪安島山全書≫, 三中堂, 1963), 859∼899쪽. 그러나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기 위한 한인들의 만주에서의 활동이 시작된 것은 이미 을사조약 체결 이후부터였다. 이때 북간도의 龍井村과 明東村, 蘇滿國境에 위치한 密山府의 韓興洞에서는 애국계몽인사들이 학교를 설립하고 근대적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1072)尹炳奭, 앞의 글, 36쪽.

1910년 4월 안창호·李甲·柳東說·신채호·金羲善·李鍾浩·金志侃·李剛 등은 중국 청도로 출국하여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책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 청도회의에서는 우선 신문·잡지의 발간으로 독립정신을 계몽하자는 유동열·김희선 등의 입장과, 농지개간 사업으로 당장 이주민의 생활안정을 도모하자는 안창호·이갑 등의 입장으로 나뉘어 독립군기지 건설준비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1073)尹慶老,≪105人事件과 新民會 硏究≫(一志社, 1990), 261∼263쪽. 윤경로는 靑島會議에서는 구체적인 독립전쟁론이 제기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는데 반해, 신용하는 안창호·이갑 등이 신한민촌과 무관학교의 건설을 주장했다고 보고 있다(신용하,<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하), 161쪽)).

합병 직후 1910년 9월에 열린 해삼위회의에서 신민회 간부들은 독립전쟁론에 뜻을 같이 했으나, 그 추진 방법에 있어서는 급진적 전쟁론과 점진적 전쟁론으로 나뉘었다. 곧 유동열·김희선 등은 국권이 상실된 상황에서 장기적인 독립군의 양성보다, 당장 국외 교포들을 모아 독립군을 결성하여 즉각적으로 국내에 진공할 것을 주장한 반면에, 안창호·이갑 등은 장기적인 전략으로 신한민촌과 무관학교를 건설하여 독립전쟁의 토대 구축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독립운동 노선상의 갈등으로 힘이 분열되어 안창호·이갑 등의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은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1074)島山紀念事業會,≪續編 島山安昌浩≫,<李剛回顧談>, 147∼148쪽. 유동열·김희선 등이 독립군의 모집을 위하여 煙臺로 갔다가 체포됨으로써1075)주요한,≪安島山全書≫부록,<安昌浩豫審訊問記補遺>, 897쪽. 즉각적인 독립전쟁론도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국권피탈’ 이후 국내에 잔류한 신민회 간부들은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韓人의 집단적인 서간도 이주를 결정했으며, 1910년 가을 양기탁·이동녕·朱鎭洙 등은 만주일대를 비밀리에 답사하여 독립군기지 후보지를 선정하고 한인집단이주 준비를 진행하였다. 1910년 12월에 양기탁·안태국·주진수·이승훈·김구·이동녕 등은 신민회 전국간부회의를 열고, ①국내에서는 서울에 都督府를 두고 각도에는 統監을 두어 비밀리에 국민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것, ②국외에서는 서간도 通化縣 부근의 토지를 매입하여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벌일 것, ③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하여 국내로부터 계획적인 집단이주를 시행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1076)愼鏞廈,<新民會의 創建과 그 國權恢復運動>(≪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 乙酉文化社, 1985), 109∼111쪽.

이와 같은 신민회의 독립전쟁전략이 결정된 직후부터 韓人의 서간도 이주사업이 급속히 진전되어, 국내에서 이주민 모집과 자금 확보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한인의 국외 집단이주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였다. 그러면 신민회의 재정 확보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앞에서 보았듯이 신민회는 그 조직을 통하여 자체적으로 자금확보에 주력했고, 국외 이주민에게 자금 휴대를 권장하고 있었다. 1910년 4월에 열린 청도회의에서는 독립군기지 건설에 소용되는 자금을 李鍾浩가 우선 조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토지를 매입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필요한 자금은 일 개인에 의해서 충당될 수 없는 막대한 규모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1910년 가을 양기탁의 집에서 열린 신민회의 ‘西間島 移住會議’에서는 단체이주를 시행하되, 될 수 있는 대로 1인당 金 100원 이상을 휴대할 수 있는 이주민을 우선적으로 모집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각도 대표로 양기탁(경기도·三南)·김구(황해도)·안태국(평안남도)·이승훈(평안북도)·주진수(강원도)를 선정하여, 이주민 모집과 함께 군자금 확보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 외에 신민회 회원들이 솔선수범하여 군자금을 마련했으며, 주진수 등은 가산을 전매하여 이주 준비를 하기도 했다.1077)愼鏞廈, 위의 글, 111∼112쪽.

그리하여 신민회 간부 및 회원들은 1910년 12월부터 이동녕과 이회영 5형제, 주진수의 가족들 및 애국청년들의 단체이주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신민회는 1911년 봄에 서간도로 대규모의 한인 집단이주를 실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11년 1월 ‘安岳事件’에 의하여 신민회 중앙간부와 황해도 지회 회원들이 대거 검거되었고, 9월에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미수로 날조된 ‘105人事件’에 의하여 신민회 회원 600여 명이 다시 체포되는 등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독립군기지 건설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1078)愼鏞廈, 위의 글, 112∼113쪽. 그러나 ‘국권피탈’을 전후하여 애국계몽인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북간도와 서간도, 그리고 연해주에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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