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4. 105인사건
  • 1) 사건조작 배경

1) 사건조작 배경

105인사건1088)‘105人事件’에 관한 명칭은 여러 가지이다. 사건 당시 언론에서는 ‘朝鮮陰謀事件’·‘宣川陰謀事件’·‘新民會事件’ 그리고 영문으로는 ‘The Korean Conspiracy Case’라 불렀다. 그 후 정식 재판이 시작되자 공식적인 사건명은 ‘寺內總督謀殺未遂事件’이라고 하였다. 이상의 사건 명칭이 시사하듯 사건 당시에는 이 사건의 ‘陰謀性’과 ‘謀殺未遂’ 부분이 강조되었다.은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직후(1911∼1912년) 국내 반일 민족세력을 제거시킬 의도에서 날조한 한민족 대탄압사건이다. 사건 당시 사건 명칭은 ‘데라우치(寺內正毅) 總督謀殺未遂事件’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 사건을 ‘105인사건’이라 지칭함은 이 사건에 강제 연루되었던 700여 명의 피의자 가운데 제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기 때문이다.

105인사건에 관한 그 동안의 연구업적을 종합, 정리하여 사건의 전모를 개관하면 아래와 같다.1089)지금까지 105인사건에 관한 대표적 연구는 다음과 같다.
姜在彦,<新民會の活動と百五人事件>(≪朝鮮の開化思想≫, 岩波書店, 1980).
白樂濬,<한국교회의 핍박-특히 ‘寺內總督暗殺未遂陰謀’의 陰謀에 대하여>(≪神學論壇≫7, 1962).
鶴本幸子,<所謂 寺內總督謀殺未遂事件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10, 1973).
姜渭祚,≪日本統治下 韓國의 宗敎와 政治≫(대한기독교서회, 1977).
尹慶老,<百五人事件의 一硏究-起訴者 122人의 人物分析을 中心으로>(≪漢城史學≫, 創刊號, 1983).
―――,≪105人事件과 新民會硏究≫, (一志社, 1990).
먼저 사건의 발단 배경을 살펴보기로 한다. 105인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합방’ 직후 일제가 향후 조선을 자국의 ‘완전한 식민지’로 개편하기 위해 포악한 무단통치가 자행되던 때이자, 국권 강탈에 대한 한인들의 분노와 반일감정이 고양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일제는 향후 예상되는 한인들의 항일 민족운동을 사전에 방지, 제거하는 일을 당면한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었다. 일제가 병탄에 앞서 추진한 무자비한 무장의병 토벌작전1090)1909년 9월부터 2개월간 자행되었던 이른바 ‘南韓地域匪徒大討伐作戰’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1907년 8월 이래 ‘합방’되기까지 일군과 무장의병 사이의 ‘義兵戰爭’은 심할 때는 1년에 1,451회에 참가 의병수는 69,832명에 달하였다 한다(朝鮮總督府,≪朝鮮暴徒討伐誌≫, 1922, 부록 3).
崔永禧,<3·1運動에 이르는 民族運動의 源流>(≪3·1運動 50周年紀念論文集≫, 東亞日報社, 1969), 34∼35쪽.
이며, 각종 법규를 공포1091)統監府 설치 후 新聞紙法;1907年 7月·出版法;1909年 2月·保安法;1910年 9月·私立學校令;1908年 8月·學會令;1908年 9月 등을 제정 사회단체 활동을 통제했다(≪朝鮮法令輯覽≫上).하여 구국계몽운동을 탄압하였던 것은 모두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그러나 ‘합방’을 전후하여 張仁煥·田明雲의 스티븐슨사살사건(1908. 3), 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 포살사건(1909. 10), 李在明의 李完用피살미수사건(1909, 12) 등 국내외에서 일련의 암살, 테러사건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서북 출신자이자, 기독교인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일제측은 기독교 세력이 강고한 서북지역을 특별히 주목하였고 이들 배후의 비밀결사를 찾는 데 정보망을 총동원하였다. 그러나 그 실체 곧 신민회의 실체를 포착하지 못한 일제는 이른바 ‘총독모살미수사건’이라는 허구적인 날조 사건을 조작하여 서북지역의 반일민족세력과 그 조직체인 신민회의 실체를 파악, 이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1092)小森德治,≪明石元二郞≫(上)(臺北臺港日 日新報社, 1928), 452쪽.

일제가 105인사건을 조작한 이면에는 이밖에도 당시 반일의식이 강했던 서북지방의 기독교 교세의 확장과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지목한 미국 선교사들을 축출하려는 데 또한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향후 미·일간의 심각한 외교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실제 이 사건에 다수의 외국인 선교사들을 연루시킴으로써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는 세계적 사건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일제가 이렇듯 ‘합방’ 직후 미국을 상대로 모험을 자행했던 것은 1910년을 전후해 급속히 냉각되었던 미·일간의 관계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러일전쟁(1904∼1905) 이후 만주 시장권과 만주 철도 경영권 문제 등을 놓고 이 시기 미·일간의 갈등과 대립이 점차 깊어갔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이른바 ‘황색 인종에 대한 배척운동’이 일어나자, 이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게 된 일부 일본인 가운데는 미국을 적대시하는 반미운동의 조짐도 보였으며, 여기에 당시 양국 언론이 향후 미·일간에 전쟁의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논지의 사설과 기사 등을 게재함으로써 미·일 양국간의 긴장관계가 고조되었다.1093)姜東鎭,≪日本近代史≫(한길사, 1985), 224∼226쪽.

일제가 105인사건을 ‘총독모살미수’라는 ‘大逆事件’의 성격으로 사건을 날조한 배경에는 당시 일본 정부 내부의 권력구조 변화와도 관련성이 있다. 1908년 7월 비교적 자유주의를 표방하였던 사이온(西園寺) 내각이 일본내 사회주의 세력을 방임했다는 이유 등으로 물러난 후 가츠라(桂太郞) 내각이 들어섰다. 가츠라 내각은 1910년 5월 ‘대역사건’이라 하여 고오도쿠(幸德秋水) 등 수백 명의 사회주의자들을 검거하고, 그 가운데 24명을 ‘天皇暗殺謀議大逆罪’로 몰아 1911년 1월에 기소하고 고오도쿠 등 12명을 즉시 사형에 처한 사건이 있었다.1094)姜東鎭, 위의 책, 237∼238쪽. 이 사건은 105인사건을 일제가 조작하기 직전 본국에서 있었던 사건으로서 시기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건의 죄명, 그리고 사건의 성격이 ‘반국가적’ 인사에 대한 탄압사건이었다는 점 등에서 두 사건 사이에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 105인사건을 가리켜 ‘조선판 대역사건’이라 지칭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1095)鶴本幸子,<所謂 寺內總督謀殺未遂事件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10, 197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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