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4. 105인사건
  • 2) 사건조작 경위와 사건 개요

2) 사건조작 경위와 사건 개요

이 사건을 ‘데라우치 총독 모살미수사건’이라 지칭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은 일제의 강압적인 ‘합방’에 반대하는 반일적인 한인들이 총독을 암살하려하다 미수에 그친 사건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 사건을 날조, 조작한 총독부측 주장에 따르면 사건 전말은 이러하다. 1910년 음력 8월 중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개통식 축하를 위해 서북지방 시찰에 나선다는 이른바 ‘總督 西巡’의 풍설이 나돌았다. 이같은 소문에 접한 서울 신민회 중앙 간부, 尹致昊·梁起鐸·安泰國·李昇薰·玉觀彬 등이 서울 서대문의 林蚩正 집에 모여 수차에 걸친 밀회를 갖고 총독 암살계획을 모의하였다는 것이다. 즉 “국가의 금일의 상태를 당해서 한 사람도 불평불만하는 자가 없다는 것은 조선 인민 전체가 병합에 悅服하는 것이 되어 외국의 동정도 받을 수 없으니, 이로써 인민을 선동하여 병합에 복종하지 않음을 표명할 필요가 있다. 근일 중 데라우치 총독이 평안남북도를 순시한다는 풍설이 있으니, 이 기회에 총독을 암살하여 병합 반대의 기염을 세계에 알리자”고 총독암살 모의를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그 실행 방법은 평소 서북지방민 중 배일의식이 강한 사람들을 모아 총독이 서순하는 京義線 연변의 8개 도시, 平壤·宣川·定州·納淸亭·郭山·鐵山·車輦館·新義州 등의 역전에 환영객으로 가장하여 총독을 암살키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거사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대거 관련되어 이 사건을 사주하고 지휘하였다는 것이다. 후술하거니와 외국인들이 이 사건에 연루됨으로써 105인사건이 미국을 비롯한 구미 언론의 주목을 받는 세계적 사건으로 확대되었고 결과적으로 일제의 반인륜적인 폭압적 무단통치의 실상만 만천하에 공개한 꼴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총독부측 주장에 따르면 서북지방의 반일인사 특히 개신교 기독인들이 외국인 선교사들의 사주를 받아 총독 암살을 몇 번에 걸쳐 시도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첫번째 시도는 1910년 음력 8월 중 총독 서순이 있다는 소문을 접하고 암살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총독 서순이 지연되어 결행이 미루어지다가 그 해 음력 10월 29일부터 11월 1일(양력 12월 26일∼28일) 사이 경의선 주요 도시를 거쳐 압록강 철도개통식에 참석한다는 정확한 정보에 접하자, 모의자들은 선천·신의주 등 여러 도시로 나누어 권총 등 무기를 소지하고 환영객으로 가장하여 역전 환영식에 나아가 총독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경의 삼엄한 경계로 결국 ‘암살미수’에 그쳤다는 것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총독모살미수사건’을 일제측이 알게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고 한다. 즉 이 사건의 조작 실무를 맡았던 경무총감부 警視 고고쿠(國友尙謙)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11년 음력 7월 26일, 평안도 일대의 반일 인사들이 총독의 서순 때 그를 암살하려 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진위를 가리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던 중 평양 등 서북지방의 주요 도시에서 기독교계 학교의 교사와 학생, 그리고 선교사 스왈른(W. L. Swallen, 蘇安論), 맥큔(McCune, 尹山溫), 베어드(W. M. Baird, 裵緯亮) 등이 배후에서 사주하였다는 정보를 접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일에 가담한 구체적인 한인을 찾을 수 없던 중 강도사건으로 붙잡힌 李載允이라는 자가 이 모의에 가담한 사실을 자백함으로써 우연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재윤과 평소 잘 아는 위장된 불평자를 접촉시킨 결과 그 사실이 재확인되어 그를 서울로 압송, 정식 취조함으로써 본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고 따라서 사건 모의자들이 줄줄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1096)國友尙謙,≪百五人事件資料集≫2-不逞事件ニ依ツテ觀タル朝鮮人-, (高麗書林, 影印本, 1986), 19∼23쪽.
尹慶老,≪105人事件과 新民會硏究≫, (一志社, 1990), 20∼21쪽.

이상과 같은 일제의 주장은 사건구성 자체가 매우 엉성한 허구적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제는 반인륜적인 가혹한 고문방법을 동원해 피의자들로부터 허위자백을 받아내고 이를 유일한 근거로 사건을 조작, 7백여 명의 피의자 가운데 주모자로 지목한 123명을 기소, 재판에 회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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