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4. 105인사건
  • 3) 재판 경위와 사건의 허구성

3) 재판 경위와 사건의 허구성

105인사건의 정식 재판은 1912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사건 피의자들을 구속한 지 9개월만에 비로소 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123명의 기소자를 한꺼번에 재판정에 세울 수 없어 기존 재판정 공간을 늘리는 재판정 확대공사가 이 사건 재판을 위해 신축되기도 하였다.1097)재판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 7,000元의 경비를 들여, 가로 9m, 세로 25m 규모로 재판소를 증축하였다(The Korean Conspiracy Tial, 1912, p. 1, Kobe, Japan.;鮮于燻,≪民族의 受難≫, 愛國서울同志會, 1949, 125쪽).

이날 첫 공판은 오전 내내 기소자 123명 전원의 신상확인과 검사의 기소장 낭독으로 시간을 보낸 후 오후 2시 30분부터 개인별 訊問이 시작되었다. 첫 신문자는 信聖中學校 체육교사로 재직중 피의자로 기소된 申孝範이었다. 재판장은 그에게 “총독 암살을 주도한 것이 신민회의 목적이며 이 단체의 회장이 윤치호인가”를 물었다. 이에 신효범은 “전혀 아는 바 없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그러면 왜 경찰신문과 검사정에서 이 모든 사실을 시인했는가”라고 재판장이 다구쳤다. 이에 신효범은 “그것은 경찰의 가혹한 拷問 때문이었다”고 하면서 당시 자행된 잔인한 고문 사례를 조목조목 폭로하기 시작하였다.

첫 피의자의 이같은 태도는 이후 모든 피의자들의 진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金一濬1098)공판 과정에서 총독암살 모의 사실을 시인한 사람은 단 한 사람, 김일준 뿐이었다. 그는 훗날 어차피 부인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 그럴바에는 총독을 암살하려고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더욱 당당할 것 같아 총독 암살에 필요한 권총을 長春에서 사왔다는 등 거짓을 시인했다고 토로하였다(윤경로, 앞의 책, 137쪽).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피의자들이 하나같이 경찰과 검사 신문에서 허위 사실을 시인한 것은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사건을 기소한 검사측은 당황했다.

이보다 앞서 있었던 安岳事件(安明根事件) 등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예기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검사측은 “피고들이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자백을 번복하기 위한 상투적 변명으로 귀담아 들을 것이 못된다”고 하며 일소에 붙일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후 재판과정에서 피의자들이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는 항변이 계속되었지만 그것만으로 재판이 유리하게 진행될 형편은 못되었다. 말하자면 사건의 허구성을 증명할 만한 결정적인 물증이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 재판은 절대 불리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사건의 허구성을 증명할 결정적인 사실 하나가 밝혀졌으니, 바로 安泰國의 진술에서였다. 즉 안태국은 자신의 기소장에 “안태국은 총독암살을 단행키로 한 바로 전날인 1910년 12월 26일 평양에서 하루밤을 자고 27일 정주에서 동지 60명을 인솔하여 새벽 6시에 선천역으로 갔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했던 것이다. 즉 안태국이 평양과 선천에 있었다는 12월 26일밤 자신은 서울 明月館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만기로 풀려난 柳東說·梁起鐸·李昇薰 등 7인의 위로회 모임을 주선하였다고 하면서 그날 명월관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받은 요리대금 27원 영수증과 그 이튿날(12월 27일) 광화문 우체국에서 평양의 尹聖運에게 타전한 ‘南崗下去出迎 泰國’이란 전보문 그리고 27일 새벽 6시 정주에 60명을 대동하였다는 주장에 대해 그날 정주역에 하차한 승객의 숫자를 확인해 줄 것을 증거물로 제출해 달라고 요구하며 “신이 아닌 내가 어떻게 같은 시간에 서울에도 있고 평양에도 있다는 말인가. 이 안태국은 서도 죄요, 앉아도 죄란 말이냐. 생각해 보아라. 백여 명이 권총을 소지하고 총독 하나를 죽이기 위해 여러 곳에서 모의했다는데 어떻게 딱총소리 한방 없었는가. 이 모든 것을 시인했던 것은 악형에 못견딘 고문에 의한 허위사실일 뿐이다”라며 재판부를 질타하였다. 이상의 안태국의 주장은 곧 사실로 밝혀졌다. 영수증과 전보문이 확인되었으며 그날 정주역에 하차한 승객은 9명에 불과했다.

이상과 같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제시되자 재판정은 술렁이었고 결국 재판장은 휴회를 선언해야만 했다. 그러나 곧 재판을 속개한 재판장은 “이상의 증거물은 모두 기각한다”고 억지 판결을 하였다. 그러자 오꾸보(大九保) 변호사가 나서 본 사건은 사건 구성상 의심이 짙으며 재판 역시 편파적임을 지적 ‘재판기피신청’을 제기하였다. 재판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재판 심리가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37일만에 속개된 15회 공판에서 재판부는 변호인단이 제출한 각종 증인신청과 증거물 요구를 “모두 불필요하다”고 기각하고 몇 번에 걸친 일방적 재판을 거쳐 1912년 8월 30일 21회 공판에서 123명의 기소자 중 李昌植 등 18인1099)기소자 123명중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李昌植 외에 金龍煥·李圭葉·李順九·金仁道·崔瑞璨·金成奉·金泰軒·白夢良·李在熙·金龍善·鮮于燻·金順道·卓昌浩·李俊英·金玉鉉·李在潤·金應錄 등 18人이다(≪朝鮮陰謀事件≫, 82쪽).을 제외한 105인에게 검사측이 구형한 형량 그대로 유죄판결을 선고하였다. 제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105인의 명단과 형량은 아래<표 1>과 같다.

형량 명 단
10년 尹致昊, 梁起鐸, 林蚩正, 李昇薰(寅煥), 安泰國, 柳東設 6명
8년 玉觀彬, 張應震, 車利錫, 羅一鳳, 邊麟瑞, 催叡恒, 梁濬明, 金一濬(俊),
鮮于爀, 鄭泰種, 催德潤, 李溶華, 林冏燁, 催聖柱, 洪成隣, 吳熙源,
李基唐, 宋子賢
18명
6년 李德煥, 李春燮, 金東元, 金斗和, 尹聖運, 鄭益魯, 安慶綠, 申尙昊,
申孝範, 張時郁, 洪成益, 車均卨, 李龍赫, 姜奎燦, 梁旬伯, 李鳳朝,
魯孝郁, 金昌煥, 魯晶瓘, 安 濬, 朱賢則, 金益謙, 李昌錫, 李泰建,
催周杙, 金燦五, 趙德燦, 李明龍, 任道明, 白夢奎, 李根宅, 吳學洙,
地尙周, 金時漸, 鄭元範, 劉學濂, 張寬善, 金昌鍵, 白用錫
39명
5년 吳大泳, 玉成彬, 金應祚, 尹愿三, 徐基豊, 安世桓, 鄭周鉉, 梁濬熙,
孫廷郁, 鄭德燕, 李東華, 李正燐, 金賢軾, 車熙善, 李廷渟, 羅奉奎,
白日鎭, 洪規旻, 車永俊, 吉鎭亭, 趙永濟, 姜鳳羽, 白南俊, 吳宅儀,
片康烈, 羅昇奎, 安聖濟, 金善行, 金溶燁, 崔濟奎, 崔聖民, 李載允,
李枝元, 朴尙薰, 朴贊亭, 林秉行, 李秉濟, 金鳳洙, 金龍五, 羅義涉,
金應鳳(雲泉), 安光浩
42명

<표 1>105인의 명단과 형량

그러나 이상의 1심 판결에 105인은 모두 불복, 상급법원(경성 복심법원)에 상고하였다. 이 사건 피의자들의 후견인 역할을 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주선하여 선임한 변호인단이 이 일에 나섰다. 외국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혐의자로 지목되었을 뿐만 아니라 피의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라는 점, 그래서 이 사건이 일제의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사건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며 사건에 임하고 있었던 터였다. 우선 선교사들은 이 사건의 전모를 본국 선교본부와 세계언론 및 미국 정부에 알리는 한편 1심 재판이 열리기에 앞서 대규모의 변호인단1100)105인사건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변호사들은 당시 일본 본국에서 大正 Democracy 분위기하에서 민권적 변호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鵜澤總明·大久保雅彦·花井卓藏·小川平吉·高僑章之助·三宅長策·梶虎之助·中村時章·中野俊明 9인의 변호사와 韓人 변호사로서는 張燾·權爀采·金正穆·李基煥 변호사였다.을 구성하여 재판에 대응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 결과 제1심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단은 이 사건의 허구성과 법률적 위법성 등을 문제삼았으니, 재판과정에 변호사들이 제기한 주요 변론과 이의 제기 내용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管割違’ 문제였다. 즉 1심에서 이 사건을 ‘謀殺未燧罪’에 해당한다고 판시하였는데, 그렇다면 이는<형법>제77조, 제79조에 해당하는 ‘內亂罪’로서 당연히<재판소구성법>제50조 제2항에 따라 최고법원인 高等法院의 관할하에서 재판이 진행되어야 했다는 점을 들어 재판 관할상의 違法임을 지적했던 것이다. 검사측의 공소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들어 재판부에 ‘公訴不受理申請’을 제기하였다. 즉 이 사건이 실로 ‘모살미수죄’에 해당하는 내란죄에 속한다면 이는 처음부터 최고법원인 고등법원에서 다루었어야 하므로, 따라서 관할위의 위법을 범한 재판상의 위법이라는 점을 들어 재판의 부당성을 문제삼았던 것이다.

둘째, 법률 적용상의 위법성과 부당성을 제기하였다. 일제측이 이 사건에 적용한 법조문은 대한제국 때 제정된≪刑法大全≫가운데 제473조의 ‘謀殺犯’ 조항과 동법 제86조의 ‘未收罪’ 조항이었다. 즉 “人을 謀殺 者 造意 者와 下手나 助力 者 幷히 絞에 處 已行만고 下手나 助力이 無者 一等을 減이라”(≪刑法大全≫제473조(謀殺犯))와 “죄를 범랴고 準備지 하거나 其事 已行얏으 其意外의 障碍나 舛錯됨을 因야 범죄에 未及 자 未遂犯이라 이라”(≪刑法大全≫제86조(未遂犯))1101)<官報>(14) 광무 9년 4월 29일, ‘부록’.
張憲編,≪新舊刑事法規大全≫하권 참조.
이었다. 이 사건은 ‘병합’된 이후의 사건이므로 마땅히 일본 형법이 적용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형량이 무거운 舊法인≪형법대전≫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이지만1102)日帝는 1912년 3월 制令 第1號로써<朝鮮刑事令>을 제정, “ … 朝鮮에서는 특수한 殺人强盜 등의 범죄가 많고 특히 그 犯罪狀이 극히 잔인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조선인에 대한 범죄에 대해서 內地法을 적용함은 치안의 保持上 적합치 않다고 인정되어 조선인의 살인강도 등의 범죄에 한해서는 당분간≪刑法大全≫의 효력을 有하도록 한다”고 하여 구법인≪刑法大全≫법조항을 105인사건에 적용하였다. 이보다 검찰측의 주장대로 과연 이 사건이 ‘모살 미수범’에 해당하는가 하는 점에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말하자면 검찰측 주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사건은 ‘謀殺未遂犯’이 아닌 ‘謀殺中止犯’에 해당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를 한인 변호사 李基燦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피고들이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을 모의하고 결정했으나 결사의 동지를 얻지 못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던 점을 인정했으므로 법률상 하등의 죄가 될 수 없다. 따라서≪형법대전≫제473조 등의 법률조항을 적용, 유죄판결을 내린 것은 위법으로 단순한 ‘모살중지범’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103)≪百五人事件資料集≫1-寺內朝鮮總督暗殺未燧被告事件-,<李基燦上告追加趣意書>(高麗書林, 영인본, 1986), 259∼260쪽.

셋째, 이 사건에≪형법대전≫의 ‘모살죄’를 적용하고 있음도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말하자면 설사 “이 사건이 朝憲紊亂의 목적에서 비롯되었으며, 또 많은 사람의 합동력에 의하여 기도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피고들은 폭동을 일으킬 의사가 없었고, 단지 寺內總督 1인에게 폭행을 가하려는 데 지나지 않았다고 할진대 … 나타나지도 않은 폭동에 대하여 (모살죄 법률조항)을 적용, 처단하였음은 凝律의 錯誤”라고 하여, ‘모살죄’ 적용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등 적극적인 변론과 이의를 제게하였다.1104)위의 책,<高橋章之助上告趣意書>, 171쪽. 그러나 위의 내용에서 보듯이 변호사들의 변론은 근본적으로 105인사건의 허구성을 파헤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한계점이 있다. 즉 ‘총독모살미수사건’ 자체가 가공적인 허구의 사건이었음을 밝히기 보다는 재판상의 문제점과 법률상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데 머물고 있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변호인단 변론을 통해 이 사건에 적용된 법률의 위법성이 충분히 드러났으며, 그 결과 제2심 공판(1912. 11. 26∼1913. 3. 20, 52회 공판)에서 제1심 때 유죄판결을 받은 105인 중 6인을 제외한 99인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또한 1913년 10월 9일 최종심인 고등법원에서 “피고 등이 다른 결사의 동지를 구하여 범죄를 실행코자 하였지만 실행하지 못하고 (따라서) 피고 등이 범죄행위를 수행코자 하였지만 실행하지 못하였다”1105)위의 책,<高等法院最終判決文>, 399∼400쪽.고 판결함으로써 사실상 ‘모살죄’를 제외한 ‘미수죄’ 부분만을 적용함으로써 사실상 재판상의 승리를 거두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윤치호·양기탁·안태국·임치정 5인에게 징역 6년과 옥관빈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1106)그러나 실제 이들 6인에 대해서도 ‘특별사면’ 형식으로 1915년 2월 12일 사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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