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1. 갑오·을미의병
  • 1) 갑오·을미의병의 배경

1) 갑오·을미의병의 배경

조선에서의 우월권을 청에 빼앗겼던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발발을 조선침략을 위한 기회로 삼아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하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일본군은 출병시부터 청세력을 조선에서 물리치고 조선을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차지하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에 위협적인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1894년 5월 중순 이후 조선 정부에 내정개혁안을 강요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를 내정간섭이라 하여 거절함은 물론 불법 진주한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또 한편 조선 정부에서는 6월 11일 교정청을 신설하여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의 일부를 받아들인 정치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의 태도에 일제는 조선에 대한 개전의 결의를 분명히 하고 6월 21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甲午變亂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일제가 조선침략의 야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첫 단계의 침략사건으로 큰 변란임이 틀림없다.

일본군은 치밀한 계획하에 갑오변란을 계획, 감행하였다. 일본군 혼성여단 주력부대는 5월 19일 조선 정부의 제1차 절교서 접수와 동시에 인천으로부터 서울에 침입하여 남산의 倭城臺에 6문의 포대를 설치하였다. 5월 23일에는 용산의 1개 대대와 山砲중대가 남대문으로 들어가 시위하였으며, 6월 20일 밤부터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20일 밤 일본공사관에서 오도리 가이스케(大鳥圭介)공사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서기관 그리고 오오시마(大島)소장을 비롯하여 후쿠시마(福島)중좌와 다가오카(長岡)·우에하라(上原)·니이로(新納)·와타나베(渡邊)소좌 등은 작전을 숙의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혼성군 제11연대 제1대대 이치노헤(一戶)대대장은 20일 오후 각 중대장들을 집합시켜 21일 새벽에 작전을 개시토록 명령하였다. 그 명령의 취지는 우선 동대문과 光熙門 그리고 동북문을 점령하고 일본거류지를 척후하는 한편, 새벽 4시에 왜성대에 집결하여 공사를 호위하고 경복궁으로 진입하라는 것이었다.1110)朴宗根,≪日淸戰爭と朝鮮≫(靑木書店, 1982), 50∼51쪽.

한편 오도리공사의 지시에 따라 현지 지휘관인 보병 제21연대장 타게다 히데야마(武田秀山)중좌는 21일 새벽 이마이(今井)중위를 남대문에, 그리고 乃萬소위를 서대문에 파견하여 일본군대가 성문을 통과하는 데 장애가 없도록 조처하였다.1111)日本大本營 편,≪戰史編纂準備書類≫제60,<日韓兵の衝突>, 1894년 7월 20일 (日本 早稻田大學 圖書館 소장본).

경복궁 시위대는 강병으로 알려졌던 箕兵 중에서 선발된 500여 명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시위대는 최초의 피격지점인 彰化門에서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그러자 일본군 제21연대 제5중대는 경비가 소홀한 迎秋門을 공격하였으며, 21일 새벽 5시경 경복궁은 결국 점령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궁궐을 수비중이던 병사 17명이 전사하였다.1112)≪동경조일신문≫, 1894년 7월 28일자의 특파원보고에 의하면, 일병 사망 1명 부상 2명임에 비해, 한병은 사망이 17명 부상은 60여 명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때 희생된 군인들을 위해 1900년에 獎忠壇을 세워 그들의 충혼을 기렸다. 지금까지 장충단은 1895년 8월의 을미사변 때 전사한 李耕稙과 洪啓薰 등의 충혼을 위무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장충단비 설명문 참조). 그러나 閔泳煥이 1900년 11월 撰한 비문을 검토한 결과 “甲午乙未之事變 때 전사한 무신들의 절의를 기려 고종이 壇을 세우고 春秋로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甲午乙未之事變’이란 ‘甲午變亂’과 ‘乙未事變’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甲午變亂’이란 역사적 용어에 대하여 정리해 둘 필요가 있겠다. 일반적으로 1894년 6월 21일의 사건을 ‘일본군에 의한 경복궁침범사건’이라고 범칭되어 왔었다. 필자는 이 사건의 중요도를 고려하여 ‘甲午變亂’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 후 이 용어는 그대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甲午倭亂’이라고 바뀌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1900년에 쓰여진 금석문인 獎忠壇碑文에서 민영환은 이를 ‘甲午事變’ 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이로써 한 사건에 대한 역사적 용어가 ‘甲午事變’·‘甲午變亂’ 그리고 ‘甲午倭亂’ 등 세 종류로 사용되게 되었다. 단, 필자는 갑오의병의 중요 사례인 ‘安東義兵’의 檄文을 비롯하여 여러 의병의 격문에서 이 사건을 ‘變亂’(또는 ‘大變’)이라고 지칭하고 있음을 보아 ‘甲午變亂’이라고 사용하였음을 밝힌다.
일본군은 乾淸宮에 있는 고종을 협박하여 전투중지 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그 때 전투중이던 조선시위대는 이 명령을 받고 ‘모두 통곡하며 銃筒을 부수고 군복을 찢어버리고’ 경복궁으로부터 탈출하였다.1113)黃 玹,≪梅泉野錄≫(國史編纂委員會, 1955), 고종 31년 6월 20일, 146쪽.

이와 같이 경복궁을 무력 점거한 일제는 자신들의 무력행사를 은폐하기 위하여 大院君을 유인, 입궐시켰다.1114)≪東京朝日新聞≫, 1894년 7월 29일,<京城23日の實況>에 의하면, 대원군은 7월 23일 오전 11시경 입궐하였다. 대원군의 등장은 곧 민씨정권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민비를 비롯하여 閔泳駿·閔泳韶 등 민씨일가는 궁을 빠져나가거나 貞洞의 외국인 집으로 대피하였다.1115)≪東京朝日新聞≫, 1894년 8월 9일,<王城事變後聞>과 9월 2일,<王妃其他の還宮>에 의하면 閔妃는 安洞에 있다가 9월 1일 환궁하였다 한다. 다음 날인 6월 22일, 일제는 고종으로 하여금 정무와 군무를 임시로 대원군에게 위임토록 조치하였다.1116)≪日省錄≫, 1894년 6월 22일. 이는 고종의 대권을 박탈하고 민씨정권을 타도하여 친일적인 조선 정부를 수립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어서 일제는 조선군의 무장마저 강제로 해제시키고 무기와 탄약을 몰수하여 용산의 일본병영으로 수송케 하였다.1117)≪東京朝日新聞≫, 1894년 7월 31일,<韓國軍器の精銳>. 이와 같이 일본군이 경복궁을 강점한 상태에서 附日開化派에 의하여 이른바 김홍집 1차내각이 수립되었으며, 이 정권에 의해 甲午更張이 추진되었다.

척사유생들은 이러한 일련의 위기사태를 침략행위로 간주하고 반침략투쟁을 개시한 것이다. 그 징후는 갑오변란이 일어난 지 1개월여 후인 7월 말에 나타났다. 청풍의 유생 徐相轍 등이 안동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서상철은 격문에서 甲午變亂이 직접적 요인이 되어 기병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1118)朴周大,≪羅菴隨錄≫제3책,<湖西忠義徐相轍布告文>. 砥平의 유생 安承禹 역시 이때 고향에서 의병봉기를 시도하였다.1119)朴貞洙,<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獨立運動史資料集≫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350∼351쪽. 柳麟錫 역시 의병을 봉기하면서 발표한 격문인<檄告八道列邑>에서 “마침내 갑오년 6월 20일 밤에 이르러 우리 조선 삼천리 강토가 없어진 셈이다”1120)柳麟錫,≪毅菴集≫권 1, 疏<檄告八道列邑>. 라고 통분하고 있다. 洪州 을미의병의 총수였던 金福漢과 李偰은 갑오변란을 전후하여 승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의병봉기를 준비하였다.

일제는 갑오변란을 일으켜 조선을 무력으로 장악하고 개화를 구실로 한 침략정책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실권자인 閔妃의 반대에 직면하였으며 급기야 러시아 세력과 제휴하려는 민비의 시도에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비를 시해하였다. 이는 국제적 범죄행위로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침략행위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 분명하다. 너무나 비참한 민비의 시해소식에 접한 한국인들은 일제와 친일정권에 대하여 적개심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일제는 자신들의 책임을 일체 부인했으며 친일내각도 오히려 폐비조치를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유성에서의 文錫鳳 거의를 시작으로 유생을 중심으로 항일 의병이 봉기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의복제도는 수차의 개정을 거쳐 점차 서양식 복제로 바뀌어 갔다. 이 의복제도개정은 유생들의 주체적인 문화인식에 충격을 가져와 반일의병의 봉기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894년 9월의 갑오경장 때 의복제도의 개정문제가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군국기무처에서 의제개정 의안을 상정하였던 것이다. 같은 해 12월에는 칙령 제17호를 반포하여 관복을 더욱 간소화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관민 다같이 흑색의 周衣를 입도록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乙未變服令의 요체이다. 이러한 을미변복령이 반포되자 재야 유생들은 반대의 뜻을 표명하였다. 이는 유인석이 을미변복령이 반포된 뒤<乙未毁服時立言>을 발표하여 “天地 聖賢 先王 父祖에 죄를 지은 것이니 살아서 장차 어찌하리요”1121)柳麟錫,≪毅菴集≫권 4, 疏<乙未毁服時立言>.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으로 입증이 되고 있다. 崔益鉉도 을미변복령이 내리자<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의제를 바꾸는 것이 불가함을 역설하였다.1122)崔益鉉,≪勉菴集≫권 4, 疏<請討逆復衣制疏>.

요컨대 전통적인 의복제도, 곧 선왕의 법복을 조선의 문화적 긍지의 한 척도로 인식하고 있던 유생들은 變服令의 반포로 인해 심각한 문화적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복제의 개정은 그 자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지선극미한 전통문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陰邪’로 상징되는 흑색의 복제를 채택한 데 대해서는 더욱 그러한 성향이 강하게 드러났다.

김홍집 내각은 을미사변이 있은 지 불과 3개월이 지난 1895년 11월 15일 斷髮令을 선포하였다. 이때 내세운 단발의 명분은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교 윤리가 일반인들의 생활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던 조선사회에서 상투는 곧 인륜의 기본인 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단발령이 내리자 유생들은 이것을 신체적 박해로, 더 나아가 인륜의 파멸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반감은 절정에 달하였다. 단발령 공포는 백성들의 뜻과는 배치되는 일부 매판관리 집단에 의한 자의적 조치였다. 학부대신 李道宰마저도 단발령이 공포된 직후 사직상소를 올리고 단발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단발령이 사회적·문화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처사임을 비난하였다.1123)黃 玹,≪梅泉野錄≫, 192쪽. 단발령에 대한 재야 유생들의 반향은 더욱 커 극단적인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단호한 행동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유인석은 이러한 단발령에 대하여 변복령과 동일한 인식의 차원에서 華夷論적 가치관에 입각해 통박하였다. 그는 상투와 圓袂의 수호 여부에 따라 華夷와 人獸의 구별이 난다고 보았다. 이에 의하면 상투와 원몌가 華와 人을 상징하고 수구와 자주를 의미하는데 비해 삭발과 변복은 夷와 獸를 상징하고 개화와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다.1124)柳麟錫,≪毅菴集≫권 4, 疏<乙未毁服時立言>.

요컨대 유교통념의 사회에서 단발령은 한민족의 문화적 자존의 표상이던 상투를 제거함으로써 전국민의 울분을 자아냈다. 강요된 단발령은 결과적으로 정치·사회·문화의 제영역에 걸쳐 큰 혼란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단발 강요에 대한 반감은 개화 그 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으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또 일본화로 받아들여져 반일의식으로 연결되었다. 즉 유생들은 개화를 상징하는 단발령을 인륜을 파괴하여 문명인을 야만인으로 전락케 하는 처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결과 전통질서를 수호하려는 유생들은 반침략·반개화의 의병을 봉기하여 이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의병봉기를 가능토록 한 사상적 요인으로는 유생들의 중심 이념체계라 할 수 있는 衛正斥邪論과 일반 농민층까지 널리 퍼져 있던 ‘斥倭洋倡義論’이 있다.

위정척사론은 조선조 지배이념인 주자학 사상과 그 질서를 지키고 반주자학적 체계를 이단시하여 부정하는 사상적 체계를 말한다. 선초 이래 위정척사론에 의하여 배척된 이단의 대상은 불교·도교 등이었으나 근대에 들어서 특히 西學, 洋物, 倭가 주요 배척대상이 되었다. 위정척사론은 1860년대 대두하였다. 병인양요를 전후하여 서양세력의 침략에 李恒老·奇正鎭 등 유생들이 상소를 통하여 서양의 침투를 반대한 것이다. 이 시기 유학자들은 ‘衛正’이면 ‘斥邪’는 뒤따르는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 외양책보다는 내수책을 강조하였다. 李恒老의 ①尊體統 ②開言路 ③繕武備 ④用德人과 奇正鎭의 ①練兵 ②求言 ③結人心은 대표적 내수책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들이 외양책으로 주장하는 척사론은 洋學과 洋物 배척론이니 양학의 전파는 주자학 질서를 흩뜨려 풍속을 금수화하며 양물의 보급은 서양의 경제적 예속을 가져옴을 지적하여 이를 배척한 것이다.

위정척사론은 지역에 따라 學派가 형성된 특성이 있다. 대표적인 학파로는 華西學派·蘆沙學派·南塘學派·定齋學派를 들 수 있다.1125)金祥起,<南塘學派의 형성과 衛正斥邪運動>(≪한국근현대사연구≫10, 1999).
朴敏泳,<華西學派의 형성과 衛正斥邪運動>(위의 책).
洪英基,<蘆沙學派의 형성과 衛正斥邪運動>(위의 책).
權五榮,<定齋學派의 형성과 衛正斥邪運動>(위의 책).
이 학파를 중심으로 조선말 민족운동의 전형적 형태인 의병투쟁을 일으킨 의병지도자가 출현하였다. 이항로의 제자 金平黙·柳重敎·崔益鉉의 위정척사운동 및 의병투쟁 그리고 유인석과 그의 문인 安承禹·徐相烈 등의 제천의병진 결성 후의 의병투쟁, 노사학파로는 奇宇萬과 奇參衍의 장성·광주일대에서의 의병투쟁이 그 대표적 예이다.

위정척사론은 1894년의 갑오변란과 1895년의 을미사변 및 변복령과 단발령 공포가 동인이 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 국내외적인 정세변화는 유생들로 하여금 위정보다는 척사를 우선하도록 강요하였다. 척사의 대상도 왜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유생들은 기존의 행동양태인 상소운동보다는 의병투쟁이라는 직접적인 무력투쟁의 방법으로 발전적 변화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추상적이고 원거리에 있는 서학이나 서양이 아닌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한 것이며, 유생들은 개화를 곧 왜화로 인식하는 태도를 확고히 하게 된 것을 말해 준다. 이에 따라 유생들은 농민과 용병적 성격을 띠기도 하였던 포수들을 동원하여, 민족과 국가 그리고 주자학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斥倭洋倡義論이란 동학농민군들이 주창했던 ‘斥倭洋倡義’의 이념을 말한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세력들은 ‘척왜양창의’의 구호 아래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정부의 일련의 정책을 반대하는 반제국·반봉건의 동학농민전쟁을 전개한 바 있다. 일제의 무력 진압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패산하여 은거 상태에 있던 이 민중세력은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비록 유생들과의 계급모순을 극복하지는 못하였으나 일본군과 개화파 정권의 구축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의병부대에 들어가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민중들은 자신들의 척왜양창의론이 유생들의 항일이념인 위정척사론에 입각한 ‘對日決戰論’과의 이념적인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민중세력은 이념적 기반과 사회경제적 이해를 달리했던 유생 주도의 갑오·을미의병에 일부나마 합류할 수 있었다. 또한 농민전쟁을 경험한 이들의 군사력과 투쟁력은 의병의 투쟁을 발전시키는 구실을 할 수 있었다. 1895년 9월 祥原의병의 경우, 이미 해산된 동학농민군에게 의병참여를 권유하여 이들이 의병대열에 동참한 것은 이를 입증하는 사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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