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1. 갑오·을미의병
  • 3) 을미의병의 전개
  • (1) 을미사변과 을미의병의 개시

(1) 을미사변과 을미의병의 개시

1895년 8월 20일 민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 조선인의 분노는 드디어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李建昌·洪承憲·鄭元夏·李南珪 같은 관료들은 왕후의 폐위에 반대하며 국모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며, 서울을 비롯하여 지방 각지에서 의병의 조짐이 거세어져 갔다. 폐비조칙이 공포되던 1895년 8월 23일 서울에서는 창의소 고시문이 나붙었으며, 9월 초에는 “왕후의 폐서인에 신하된 자로서 復讐討賊의 의거가 없는가” 라는 내용의 고시문이 지방에도 나돌았다.1133)李晩燾,≪響山日記≫, 1895년 9월 10일. 그리고 서울의 종로에는 8월 20일의 왕비시해는 훈련대가 아닌 일본인의 소행임을 알리며 일본인에 대해 적개심을 품은 내용의 방이 붙었다.1134)≪東京朝日新聞≫, 1895년 11월 23일, 朝鮮時事(11월 12일 京城發),<不穩の揭榜>.

을미사변 직후 ‘國讐報復’을 기치로 한 항일의병이 봉기하였다. 이 을미의병은 1895년 9월 18일 무과 출신으로 진잠현감을 역임한 文錫鳳이 儒城에서 처음으로 봉기하였다.

문석봉은 1894년 11월 양호소모사에 임명되어 12월 초부터 공주감영에서 근무하면서 연산·은진·진산·여산은 물론 청산·보은 등지에까지 수차례 출정하여 동학군 진압에 출중한 공을 세웠다. 문석봉의 동학군 진압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연산을 비롯한 인근의 사민들이 진잠지역에 그의 선정비를 세우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유생들로부터의 신망은 그가 항일 의병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기반이 될 수 있었다.

문석봉은 충청도 유성의 場垈에서 창의하여 대장에 추대되어 先鋒에 金文柱, 中軍에 吳亨德, 軍餉에 宋道淳 등 지휘부를 조직하였다. 이들 외에 진사 金鍾律과 영장 崔殷東 등이 유성의병에 참여하였다. 의병의 병사층을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동학군을 진압할 때 휘하에 있던 인물들이 다수 참여하였으며 의병의 숫자는 600여 명에 달했다. 이와 같이 의진을 편성한 문석봉은 通文을 각지에 발송하여 을미사변을 천고에 없는 대변으로 규정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 사직을 건져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유성의병은 공격의 목표를 공주부 관아로 잡고 우선 회덕현을 급습,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어서 주민들의 의병 참여를 권유하고 10월 21일에는 진잠으로 들어가 군수 李世卿에게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세경은 오히려 의병의 동태를 관찰사에게 보고하는 등 협조를 거부하였다. 진잠에 입성한 지 일주일 후인 10월 28일 유성의병은 공암을 거쳐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공주부 관찰사 李鍾元은 전중군 白樂浣과 이인 찰방 具完喜에게 각각 100명씩 이끌고 대응케 하였다. 의병부대는 이들과 공주 와야동에서 일전을 겨루었다. 그러나 의병은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문석봉은 패산 후 중군 오형덕 등과 함께 경상도 고령·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결국 고령현감의 고변으로 12월 24일 체포되어 대구부에 구금되고 말았다. 문석봉은 1896년 봄 최은동·오형덕과 함께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 해 4월 원주로 내려가 ‘都指揮’가 되어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리면서 재봉기를 시도하였다. 그는 불행히 그 해 11월 병사하여 기병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나 유성의병은 을미사변의 비보에 즉각적으로 일제와 친일내각에 항거하였음을 실증한 점에서 그 의의는 크다.1135)金祥起,<朝鮮末 文錫鳳의 儒城義兵>(≪歷史學報≫134·135, 1993).

단발령 공포 직전의 의병활동으로는 유성의병 이외에도 강계의병이 있다. 1895년 11월 단발령 공포 직전 金利彦이 만주의 三道溝에 거점을 두고 초산군 아전출신 金奉鉉, 동학접주였던 金昌洙(金九)와 함께 압록강 양안의 포수 300여 명을 모병하여 의진을 결성한 것이다. 이들은 민비의 시해에 항거하는 격문을 발표하고 압록강을 건너 高山里를 점령하고 다시 강계읍으로 진격하였다. 관군의 반격으로 패전하고 말았지만, 김창수는 信川으로 남하하여 재기병을 시도하였다.1136)金 九,≪白凡逸志≫.
金亨振,≪路程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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