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2. 을사의병
  • 1) 을사의병의 재기

1) 을사의병의 재기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던 갑오·을미의병(전기의병)은 아관파천 직후인 1896년 봄 그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어 활동이 거의 종료되었다. 국왕이 의병해산을 명하게 되자, 여기에 항거할 명분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군이 각지로 파견되어 의진을 압박한 까닭에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을사의병(중기의병)은 1904년부터 1907년 전반기에 걸쳐 일어나 활동한 의병을 가리킨다. 곧 이 의병은 1904∼1905년의 일련의 일제 침략책동에 항거하여 일어난 이후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을 계기로 격화되는 정미의병 이전 단계의 의병을 말하는 것이다.

을미의병에 참가하였던 인물들은 1896년 의진 해산 이후 직함과 신분, 그리고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다양한 활동 노선을 걸었다. 의병장 혹은 중요 참모의 경우에는 元容八·鄭雲慶·李世永·金道鉉·盧應奎·李康秊 등의 경우와 같이 을사의병으로 재기하거나, 金道和·金福漢 등의 경우와 같이 은거하거나, 李相龍·具然英의 경우에서 보듯이 일부는 계몽운동자로 변신하거나, 또 許蔿·노응규·閔龍鎬 등의 예에서 보이듯이 관직으로 진출하는 등 그 동향이 비교적 다양하였다. 한편 을미의병에 일반 병사부로 참가하였던 농민층의 경우에는 해산 이후 1897∼1904년간에 펼쳐진 농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英學黨·南學當·草賊·火賊·活貧黨·東學黨 등의 이름을 걸고 항쟁한 경우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1149)趙東杰,≪韓國民族主義의 成立과 獨立運動史硏究≫(지식산업사, 1989), 37∼40쪽 참조.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함과 동시에 한국에 대한 군사적·정치적 압박을 더욱 강화시켜 갔다. 개전 직후 강요한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1904년 3월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4천여 명의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한 뒤 이듬해 말에는 2개 사단 규모의 일본군이 한국 전역에 배치됨으로써 한국민을 강압적으로 압박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는 한일협약이 늑결되어 재정·외교 등 일본인 고문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소위 고문정치를 실시하게 됨으로써 일제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대한침략 책동은 러일전쟁이 종료된 뒤 1905년 11월 19일 을사조약을 늑결함으로써 그 극에 달해, 대한제국은 실질적으로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러일전쟁 이후 을사조약이 늑결되는 시기에 한국민의 반일 적개심은 한층 팽배했고, 국권수호를 위한 반일투쟁도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을사의병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재기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을미의병 때의 항전 경험을 축적한 의병들이 상당수 재기 전선에 투신하였으며, 이들이 결국 전국적으로 의병항전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을미의병 이후 의병이 재기하게 되는 시기는 1904년 무렵부터이다. 곧 1904년부터≪皇城新聞≫이나≪大韓每日申報≫등에서는 의병 관련 기사가 산견되고 있다. 이들 자료에 의거할 때 1905년 가운데서도 화적·賊黨·民擾·匪徒 일진회·의병 등의 기사가 특히 많은 5월부터 11월까지 7개월 동안에 2백여 회의 사건 기사가 실려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의병으로 명시되어 있는 것이 다음과 같이 40여 회에 이른다.1150)趙東杰, 위의 책, 41∼43쪽의 표 전재.

장 소 내 용 보 도 일 자
죽산·충주 50명 가량의 의병이 各里에서 侵奪錢糧함 ≪皇城新聞≫
5. 10
괴산·진천·淸安 1천여 의병이 일어나 충주에 군대를 주둔시킴 5. 15
죽산·안성·음죽·양지 각처의 의병이 各村을 侵奪錢糧함 5. 16
진천 朴載萬 등 70여 명의 의병이 入邑하여 재물 탈취 5. 19
靑山 匪類 2백여 명이 의병이라 칭하며 부민의 재물 탈취 5. 22
청안·제천 의병 150명 기마 조총으로 위협 奪財 5. 24
경기·충북 각처에 비류 의병이 창궐하므로 청주와 수원진위대 파병 5. 27
충주·청주 義匪 3백여 명과 접전 5. 29
죽산 의병 20명과 일본 헌병대 소속 순검과 교전 5. 29
서울 일진회장 尹始炳이 군부에 보낸 의병 소탕 공한(의병이 마필·총·창을 收聚하고 응모자에게는 20元씩 하급하니 不忍坐視 卽行消除할 방법이라고) 5. 29
廣州 의병 2백 명이 부민의 재물과 총기를 奪去 6. 6
보은 의병 2백 명이 모병하고, 총기 40여 柄과 재물 기백 냥 取去 6. 8
楊根 의병 45명이 持銃入來하여 일진회를 공격, 재물 탈거, 방총 6. 14
砥平 의병이 단발자 1명과 일진회원 9명을 포살(군수 파면당함) 6. 15·19·20
홍천 의병 4명이 일진회원 拉去 구타 7. 12
원주 의병 원용팔 각국 공관에 성명서 발송 ≪大韓每日申報≫
8. 24
永春 포군 30, 종사 수십 명의 의병이 포군을 모병함 9. 8
단양 원용팔의 의병 격문이 단양 북면 향약소에 來致 9. 8
충북 의병이라 하며 錢穀討索, 총검수탈이 횡행 9. 10
영월 의병 작폐가 우심했는데 원주진위대가 진압 9. 13
정선 원용팔 의병 2백여 명 내도(원주진위대와 일진회가 체포) 9. 20
홍천 서석면과 동면에 의병 2백 명 주둔 9. 29
강릉 영월·정선·평창에 의병 누백 명(포군으로 방비함) 9. 29
영월 원용팔 피체 후 餘黨 40여 명이 掠奪財産 10. 2
영춘 의병 정운경 체포 10. 18
충청·경상 의병은 동학당처럼 주문을 외우다 10. 18
光熙門 의병 6명을 일헌병이 체포 10. 26
청산 義兵之類가 인근 지방에 在在團結이라 10. 27
풍기 의병 2백 명 읍내 점령, 원주진위대와 교전 10. 28
단양 의병 창궐로 진위대 파병 요구 10. 29
보은 의병 30∼40명이 화양동 주둔 10. 31
청풍 의병 50명 출현 10. 31
懷仁 의병 40여 명이 吏廳에 유숙 10. 31
보은 金東周 의병 50여 명과 교전(속리산 僧軍도 관군 합세) 11. 7
영천 3백 명의 의병이 梧麓洞 班家를 습격(9월 14일) 11. 11
영천 의병 150명 入邑, 夕飯과 군수전 2천 냥 탈거 11. 11
영천 의병 22명 내습(9월 18일) 11. 11
봉화 의병 4∼5백 명 내습 11. 11
廷豊 의병 2백여 명 원주진위대와 전투 11. 26

<표>1905년의 의병기사

결국 을사의병은 을미의병 해체 이후, 1904년 러일전쟁 이후 한일의정서 등 일련의 침략정책이 강제로 시행되는 과정에서 여기에 반발하는 운동이 의병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의병의 배경에는 위에서 언급한 여러 형태의 농민운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천과 단양 일대에서 일어난 원용팔과 정운경 의병을 제외하고는 을사조약 늑결 이전 단계에서 일어난 여러 의병에 대해서는 현재 명확하게 그 실체가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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