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2. 을사의병
  • 2) 전국 의병의 활동
  • (2) 영남지방

(2) 영남지방

영남지방에서도 1905년 말 특히 지형적으로 활동이 유리한 충청·경상도 접경의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수십, 수백 명으로 편제한 의병들이 우체소를 습격하고 전선을 절단하는 등 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1905년 10월 중순 2백여 명의 의병이 순흥우체소를 습격한 일과, 같은 달 17일 3백 명의 의병이 영천우체소를 습격한 거사 등이 이 시기 의병항전의 두드러진 예이다. 따라서 일제는 한국 진위대의 출동에만 의병 탄압을 기대하던 방침을 바꾸어 10월 하순경부터는 헌병대를 직접 투입하는 조처를 취하였다.1157)위의 책, 339∼340쪽. 이와 같이 항일의병의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던 상황에서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의병의 기세는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어 갔다.

경북 영양에서는 을미의병 때 활동한 김도현이 재기항전의 기치를 들었다. 을사조약 폐기 상소를 올린 김도현은 1906년 1월 하순 통문을 돌려 거의를 촉구한 뒤 50∼60명의 포군을 주축으로 1백여 명을 모아 항일의 기치를 들었다. 그러나 미처 활동에 들어가기도 전에 안동진위대의 탄압으로 의진은 해체되고, 주장 김도현도 체포되고 말았다.1158)金康壽,<韓末 義兵將 碧山 金道鉉의 義兵活動>(≪北岳史論≫2, 國民大, 1990), 233쪽 참조.

1906년 봄 삼척에서는 前都事 金夏奎가 의병을 일으켰다. 이 의진에는 강릉 출신의 전 군수 黃淸一이 가담하여 크게 성세를 떨쳤고, 한때 영해의 申乭石 의병과도 서로 호응하며 항일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의진도 김하규·황청일 등의 핵심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해산하게 되었고, 그뒤 이들은 정운경과 함께 황주 철도로 유배되었다.1159)鄭雲慶,<同遊錄>, 559쪽. 한편, 울진에서도 1906년 초에 金顯奎가 의병을 조직하여 그 일대에서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1906년 전반기에 들어 영남지역에서 특히 활동이 두드러졌던 의진이 신돌석 의병이다. 을미의병 때에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는 신돌석(본명 申泰鎬 혹은 申泰浩)은 1906년 4월 향리인 영해 福坪(현 영덕군 축산면 부곡동)에서 1∼2백 명의 장정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1160)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申將軍實記>(≪獨立運動史資料集≫3, 1971), 411쪽.

‘寧陵義兵將’ 신돌석을 주장으로 한 이 의진은 4월 하순경 영양읍을 공략, 총포·화약 등 다수의 군비를 노획한 것을 비롯해1161)≪皇城新聞≫, 광무 10년 5월 14일,<英郡義擾>. 영양·청송 등지에서 토호들로부터 군수품을 수집하는 한편, 출동한 안동수비대를 상대로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후 일월산 일대를 근거지로 한 신돌석 의병은 5월 하순경 3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6월 들어 일시 울진 읍내를 장악할 만큼 군세를 떨치고 있었다.1162)김정미,<한말 경상도 영해지방의 의병전쟁>(≪大丘史學≫42, 1991), 27∼30쪽.

이에 일제는 정부로 하여금 1906년 6월 대구·원주·경주 등지에 주둔중이던 진위대 병력을 이곳으로 출동시키도록 조치하였다. 이때 대구진위대 2백 명은 正尉 朴斗榮의 지휘하에 영덕 방면으로 출동하였고, 원주진위대 1백 명도 참령 李承七의 지휘하에 평해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이들 양 진위대는 합동작전을 펴 평해 부근에서 협공을 가하였다.1163)≪皇城新聞≫, 광무 10년 5월 30일·6월 15일·6월 30일. 그러나 신돌석 의병은 이와 같은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공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돌격전으로, 혹은 유인전으로 적군의 공세를 훌륭히 차단해 냈다.

이 무렵 신돌석은 휘하 의병을 이끌고 산악지대와 해안선을 따라 다시 영해지방으로 회군, 영해읍을 성공적으로 공략하였다. 영해 공략을 앞둔 이 의진은 격문을 발하여 “막중한 의병진을 효유한다고 하면서 감히 대의에 항거하니 그 죄가 하나요, 병정을 청하여 빌어다가 의병진을 치려 하니 그 죄가 둘이요, 倭學을 설치하여 사람을 무도한 지경에 빠지게 하려 하니 그 죄가 셋이다”라고 하여 당지 군수의 죄상을 성토하고 의병항전의 정당성을 천명하였다.116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392쪽.
김정미, 앞의 글, 31쪽.
≪皇城新聞≫, 광무 10년 7월 3일,<義兵揭榜>.
영해군에 머물면서 사기를 고양시킨 신돌석 의병은 다시 인접한 영덕으로 진출, 7월 초에 영덕읍을 공략하기에 이르렀다.1165)≪皇城新聞≫, 광무 10년 7월 9일,<盈德義兵>.

그 뒤 신돌석 의병은 1906년 11월경 일월산과 백암산·대둔산·동대산 일대로 근거지를 옮기고 요해지를 의지하여 활발한 유격전을 벌였다. 이어 1907년 봄에는 다시 중군장 白南壽와 金致憲 등 휘하 의병들과 함께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 원조하에 친일파 처단에 주력하였다.116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392∼393쪽.
≪皇城新聞≫, 광무 11년 1월 5일·2월 7일.

신돌석 의병은 이후 1907년 7월까지 관아 습격 등 대규모 공격활동을 멈추고 의병 소모와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벌이면서 영해·영덕·평해 등지를 주로 전전하고 있었다. 이어 8월 20일에는 3백여 명의 의병이 다시 영양읍을 공격하여 분파소와 관아를 공략하는 등 활동을 재개하였다.1167)김정미, 앞의 글, 34쪽.

정미의병 시기인 1907년 하반기 이후에도 신돌석 의병은 활동을 지속해 갔다. 그리하여 이강년·柳時淵 등의 의병과 긴밀한 협조하에 연합작전 등을 구사하면서 내륙 깊숙히 진출, 1907년 11월 한때는 순흥까지 점령하는 등 경북 북동부지방을 전전하면서 신속한 기동력과 위력적인 유격전술을 바탕으로 활발한 항일전을 펼쳐갔다. 그러나 신돌석은 1908년 11월 변절한 부하 金相烈 형제에게 타살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한편, 경북 남동부지방에서는 정환직·정용기 부자를 중심으로 한 山南義陣이 그 위세를 크게 떨쳤다. 산남의진은 중추원의관 鄭煥直이 고종으로부터 의병봉기를 독려하는 밀지를 받은 것을 계기로 편성되었다.1168)李純久 編,≪山南義陣史(山南倡義誌 上)≫(≪獨立運動史資料集≫1), 381쪽.
―――,≪山南倡義誌 下≫(≪한국독립운동사연구≫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影印所收), 633쪽.
정환직은 長子 鄭鏞基와 함께 거병 문제를 의논한 끝에 자신은 그대로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의병을 후원키로 하고, 정용기가 향리인 영천으로 내려가 거병토록 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이들은 궁극적으로 지방에서 군세를 크게 진작한 뒤 서울 진공을 최종 목표로 설정해 놓았다.1169)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242쪽.

영천으로 내려온 정용기는 평소의 지기인 李韓久 및 재종제 鄭純基 등과 더불어 거병 계획을 확정하고, 1906년 3월 정용기를 대장으로 하고 다음과 같이 대규모의 편제를 갖춘 산남의진을 편성하였다.117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351∼353쪽.
裵勇一,<山南義陣考>(≪한국민족운동사연구≫5, 1991), 146쪽.
權寧培,<山南義陣의 組織과 活動>(≪歷史敎育論集≫16, 1991), 137쪽.
또한 通諭文·격려문 등을 돌려 의병을 소모하고 의병항전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창의대장 鄭鏞基

중군장 李韓久 참모장 孫永珏

소모장 鄭純基 도총장 李鍾崑

선봉장 洪龜燮 후봉장 徐鍾洛

좌영장 李景久 우영장 金泰彦

연습장 李圭弼 도포장 白南信

좌익장 鄭致宇 우익장 鄭來儀

좌포장 李世紀(일명 李錫) 우포장 鄭完成

將營執事(將營守衛) 崔基輔(崔錄) 軍門執事 李斗圭

산남의진은 편성 초기에 벌써 1천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를 이루었다. 거의가 유생들인 의진의 핵심 참모들은 이미 영남 각지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었거나, 의진 결성에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이었다.1171)權寧培, 위의 글, 137쪽 참조. 편성 직후에 산남의진은 관군의 압박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신돌석 의병을 돕기 위해 영해를 향해 행군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의진이 4월 28일 경주 관내의 牛角(현 영일군 신광면 우각동)에 당도하였을 때 경주진위대장 참령 申錫鎬의 간계에 걸려 대장 정용기가 체포되어 대구 경무청으로 압송되고 말았다.1172)李純久 編,≪山南義陣史≫(≪獨立運動史資料集≫3), 384∼385쪽.

정용기 피체 이후 후군장 李韓久가 의진을 이끌었다. 이한구가 이끄는 산남의진은 영천·江口·淸河 등지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수차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지만, 7월 하순 전력 소모로 일단 해산하기에 이르렀다.1173)權寧培, 앞의 글(1991), 138∼139쪽.

그 후 산남의진은 1906년 9월 정용기의 석방을 계기로 재편되었다. 이때 정환직은 정용기에게 이듬해 5월까지 병력을 모아 태백산 줄기를 타고 강릉으로 북상, 전열을 정비한 다음 서울로 입성토록 지시해 놓았다. 의병을 서울에 입성시켜 일제 통감부를 타도하고 매국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1174)權寧培, 위의 글, 142쪽. 의진을 재편한 정용기는 의병 모집을 위해 격문을 발표하는 한편, 창의의 배경과 그 정당성을 밝히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각지로부터 의병이 합류해 와 전력이 한층 강화될 수 있었다. 즉 부산·대구 방면에서는 金賢極·柳花實이 화약을 운반해 오고, 안동에서 金石井, 동해 방면에서 林中虎, 의성지방에서 朴泰宗, 경주지방에서 權奎燮 등이 각기 일단의 의병을 거느리고 합류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산남의진은 대장 정용기 이하 전 부서를 새롭게 재편하였다.117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389∼390쪽.

재편된 산남의진은 영천·경주·청하·청송 등지에 분대를 두고 이를 근간으로 활동하였다. 그 결과 뛰어난 기동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나아가 인근 의진과의 연합작전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산남의진의 일차적 활동목표는 정환직과 일찍이 밀약한 강릉으로의 북상이었다. 산남의진이 실제로 활동을 재개하는 시기는 1906년 7월에 이르러서이다. 그 동안 5월까지 강릉에 의병을 집결시키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북상하던 중 청송지역에서 일군과 조우하는 가운데 시일은 점차 천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산남의진은 관동으로의 북상이 여의치 않게 되자 청하·청송에서부터 죽장·포항·영천에 이르기까지 각지를 전전하면서 신돌석 등 인근 의병과 연합으로, 혹은 독자적으로 관군 및 일본군과 수차에 걸쳐 교전을 치렀다. 그러던 중 8월이 되어 禹在龍을 비롯한 일부 해산군인들이 의진에 가세해 와 전력이 크게 향상될 수 있었다. 이에 정용기는 각지의 분대에 북상 명령을 내려 부대별로 관동 방면으로 이동하도록 조처하였다. 그리하여 將營都所(지휘본부)를 영일군 죽장면 梅峴里로 정하고 정예병 1백여 명을 이곳에 주둔시켰다.1176)윤병석, 앞의 책, 254쪽.

그러나 이 무렵 의진의 주둔지를 탐지한 일본군이 立巖里(죽장면) 後原의 험준한 지대를 거점으로 야음을 틈타 맹공을 가해 왔다. 마침 임무를 수행하고 귀환하던 이세기·우재룡·김일언 등이 거느리던 일단의 의병은 장영도소의 군사들과 함께 용감히 항전하였다. 하지만 의진은 끝내 괴멸되고 대장 정용기 이하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의 핵심 인물들이 전사하고 말았다.117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580쪽.
윤병석, 위의 책, 254쪽.
산남의진의 2차 재기항전은 이로써 종료되었다. 그 후 정환직과 崔世允에 의해 인솔되는 산남의진은 1908년까지 경북 일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

한편 신돌석 의병과 산남의진이 활동에 들어간 시기에 인접한 진보·영덕 등지에서는 유시연 의병이 일어나 활동하고 있었다. 유시연은 을미의병 때 안동의병의 선봉장을 지냈던 인물로 그동안 李鉉圭·신돌석 등의 우국지사들과 교유하며 시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1906년 봄부터 활동에 들어간 유시연 의병은 특히 진보·영덕·평해 등지가 주요한 활동무대였으며, 신돌석 의병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공동작전을 수행하기도 하고, 1907년 8월의 군대해산 후에는 관동 방면으로 진출하여 이강년 의진과도 공동보조를 맞추면서 항일전을 효과적으로 전개해 나갔다.1178)柳奎元 編,≪柳義士傳≫(≪獨立運動史資料集≫3), 213∼21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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