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2. 을사의병
  • 2) 전국 의병의 활동
  • (3) 호서지방

(3) 호서지방

호서지방에서는 의병항전 전 시기에 걸쳐 항일전이 시종일관 활발하게 펼쳐졌다. 그 가운데서도 충북의 제천·단양·충주 일대와 충남의 홍성 일대가 그 중심지였다. 전술하였듯이 단양·제천 일대에서는 1905년 하반기에 원용팔과 정운경 등이 활동을 재개하고, 또 1907년 전반기에는 이강년이 擧義함으로써 을미의병 시기 유인석을 정점으로 하였던 제천의병의 항전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한편, 홍주(현 홍성) 일대에서도 을미의병 시기 金福漢·安炳瓚 등이 주축이 되어 활발하게 벌어졌던 항일전의 맥락을 이어, 을사조약 이후 대규모 의병이 편성되어 활동에 들어갔다.

을사의병 시기의 홍주의병은 1906년 3월 15일경 대흥군 光水(현 光市)에서 1차 의병이 편성되면서 활동이 시작되었다.1179)을사의병 시기 홍주의병의 활동에 대해서는 柳漢喆의<洪州城義陣(1906)의 組織과 活動>(≪한국독립운동사연구≫4, 1990)에서 그 전모를 분석적으로 소상하게 밝혔다. 본문의 홍주의병 관련 서술은 그 주지를 따랐음을 미리 밝혀둔다. 이 시기 의병 편성의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李偰이다. 을미의병 해산 이후 은둔해 있던 이설과 김복한은 을사조약 늑결 직후 함께 상경하여 조약을 성토하고 그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경무국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6년 2월 석방된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곧바로 의병 재거를 계획하고 동지 안병찬, 을미사변 이후 定山에 낙향해 있던 전참판 閔宗植 등과 연락하며 의진 편성에 착수하였다. 이설의 권유를 받은 민종식이 의병에 참여하게 되자, 계획은 구체화되었다.1180)李 偰,≪復菴集≫권 5,<與閔允祖書>, 104쪽. 마침내 안병찬·朴昌魯·李世永 등이 1906년 2월 하순 정산 天庄里 민종식의 집에 모여 거병 절차를 논의한 뒤 3월 중순 광수에서 봉기하였다.1181)홍주의병의 起兵 날짜는 기록에 따라 1906년 정월부터 3월 중순에 걸쳐 상이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확단하기 어렵다. 그 가운데 안병찬과 임승주의 기록에서 3월 중순(15일, 17일)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에 따른 것이다.

이때 모인 의병의 규모는 3∼6백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의병의 편제는 창의대장 민종식 휘하에 종사관 洪淳大, 中軍司馬 朴潤植, 참모관 朴昌魯, 軍司馬 안병찬, 儒會長 柳濬根, 運糧官 成載翰 등으로 갖추어져 있었다.1182)宋容縡,≪洪州義兵實錄≫(洪州義兵遺族會, 1986), 307쪽. 이와 같은 거병 과정과 편제로 볼 때 1차 홍주의병은 을미 홍주의병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그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박창로·안병찬·蔡光黙·이세영 등의 핵심 인물들이 역시 을미 홍주의병을 주도하였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1183)柳漢喆, 앞의 글, 10쪽.

이 의병은 광수를 떠나 홍주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의병 진영에서는 이때 홍주성 관군도 의병에 참여토록 요청하였으나 홍주목사가 거절함으로써 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 이에 하는 수 없이 의병은 광수로 회진한 뒤 다시 공주 공략을 위하여 출발하였다. 그러나 공주·서울에서 파견된 2백여 명의 ‘토벌군’이 청양에 도착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기 때문에 의진은 다시 청양 合川(化城面)으로 이군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의병은 사방으로 패산하였으며, 안병찬·박창로·朴容根을 비롯하여 40여 명이 체포됨으로써 1차 홍주의병은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1차 홍주의병 해산 후 전주로 피신한 의병장 민종식은 진안·장수·무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한 뒤 전북 礪山을 거쳐 충남 서천으로 다시 이동, 재기항전에 착수하였다.1184)成德基,<義士 李容珪傳>(≪獨立運動史資料集≫2, 1971), 329쪽. 여산 주둔 당시에는 30여 명 정도의 소부대였으나 서천지역에서 약 3백 명을 소모함으로써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에 민종식은 藍浦를 경유하고 1906년 5월 11일 鴻山 芝峙에서 李容珪·金光祐·趙羲洙·이세영 등과 함께 창의를 선포하였다. 이로써 2차 홍주의병의 활동이 개시되었다. 이 무렵 의병의 규모는 4백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1185)≪皇城新聞≫, 광무 10년 5월 7일.

홍주의병은 이후 九兵洞·文章洞을 지나 서천읍으로 들어갔다. 이때 의진의 규모는 1천여 명에 육박하였다. 이와 같은 성세를 타고 庇仁·板橋를 거쳐 남포에 이르렀을 때는 군세 1만을 호칭하였을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행군 도중 서천과 남포 등지에서는 상당수의 총포와 탄환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또한 의병에 비협조적이던 서천군수 李鍾奭과 남포군수 徐相喜를 감금하고 그 관인을 취해 의병을 소모하였다. 한편 4일간 남포에 유진하는 동안에 보령의 우국유생 柳濬根 이하 33명의 ‘儒會軍’이 합세해 옴으로써, 의병이 이 일대 유생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186)≪皇城新聞≫, 광무 10년 5월 25일.
宋容縡, 앞의 책, 310쪽.

민종식이 이끄는 홍주의병은 이후 다시 보령을 경유한 뒤 結城에 도착, 하루를 지낸 뒤 5월 19일 홍주성 攻城에 들어갔다. 의병들은 三神堂里에서 대항하는 적을 일거에 격파하고 홍주성을 향하여 포화를 퍼부었다. 남문 성벽에 의지하여 저항을 시도하던 적군은 이내 성을 포기하고 거류 일인들과 함께 북문으로 탈출, 예산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이로써 홍주성은 당일 완전히 의병의 수중에 들어갔다.118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356쪽 참조. 홍주성 공략 무렵 의병의 군세는 자료에 따라 5천 명으로 기록한 경우도 있으나 이는 과장된 숫자로 보이며, 실제로는 5∼8백여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된다.1188)柳漢喆, 앞의 글, 17∼18쪽 참조.

홍주성 점령 소식이 사방으로 전해지자 李侙과 安恒植, 그리고 尹錫鳳·蔡光黙 등의 명망지사가 합류해 오고, 韓桂錫·郭韓一은 향리에서 각각 의병을 소모한 뒤 가세해 왔다. 그리하여 전성기인 홍주성 점령 직후의 의병 군세는 ‘총을 가진 군사가 6백 명, 창을 가진 군사 3백 명, 유회군이 3백 명’ 등 모두 1천 2백여 명에 달하였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1189)成德基,<義士 李容珪傳>, 335쪽. 이 무렵 홍주의병은 다음과 같이 대규모의 편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항일전을 준비하게 되었다.1190)柳漢喆, 앞의 글, 19쪽.
成德基,<義士 李容珪傳>, 317쪽.
그러나 본문 편제 가운데 마지막 참모사 명단 부분 대신에, 위와 같은 자료인<義士 李容珪傳>(331쪽)에는 “참모사 李侙, 돌격장 南啓元 安炳琳 郭漢一”로 기술되어 있다. 현재로서는 서로 다른 두 명단간의 차이나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1(357쪽)에서는 뒤의 자료를 따랐다.

대 장 閔宗植
참모장 金光佑 趙義洙 蔡光黙  중군장 鄭在鎬 李世永
유격장 蔡景燾  좌군장 尹弼求 尹炳日 洪淳大
우군장 李秉年 李範九 宋淳黙  소집장 池禹範
소모관 李晩植  수문장 崔璇在
수성장 趙炳舜  선봉장 李南珪 朴永斗
후군장 鄭海燾  서 기 文奭煥
운 량 朴濟賢  餉 官 朴潤植
좌우소모장 崔相集 嚴淳榮  좌익장 李相龜
우익장 申鉉斗  참 모 安炳瓚 朴昌魯 安恒植 申復均
儒兵將 柳濬根  儒兵所養官 閔廷植
유격장 金光鉉 尹相培
참모사 李東珪 李侙 南啓元 安炳琳 安敎憲 朴始林

일제는 홍주성 함락 다음 날부터 공주·수원·서울 등지로부터 경찰·헌병대를 출동시켜 성 안의 동정을 정탐하는 한편, 의병에 대한 공격을 가해 왔다. 하지만, 의병측에서는 입성과 동시에 일제 군경의 공격을 예상하고 군사를 6대로 나누어 4대문과 요해지를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20일부터 수차에 걸친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제는 통감 伊藤博文이 직접 진두지휘하여 홍주의병 ‘토벌’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소위 한국주차군사령관 長谷川好道는 재경성 남부수비대 사령관 本條에게 필요한 병력을 홍주 방면으로 파견하여 헌병 및 경찰관과 협력하도록 지시하였다. 동시에 주차군사령관은 헌병대장에게 홍주 주재 헌병을 위의 파견부대와 연합, 그 수비대장의 지휘를 받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남부수비대 사령관은 보병 제60연대장에게 대대장을 지휘관으로 하는 보병 2개 중대, 기병 소대로 편성된 부대를 현지로 급파하는 동시에 전주수비대 보병 1개 소대도 ‘작전’에 참여토록 조치하였다.1191)柳漢喆, 위의 글, 24쪽.

일제의 홍주의병 탄압 전략의 핵심은 대량학살에 있었다. 홍주의병에 대해 피의 보복을 감행함으로써 이 무렵 전국적으로 점차 확대되어가던 의병의 기세를 消盡시키려던 심산이었다.

일제의 대규모 군경 연합부대는 5월 31일 새벽 야음을 틈타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1192)朝鮮駐箚軍司令部編,≪朝鮮暴徒討伐誌≫(≪獨立運動史資料集≫3, 1971), 677쪽. 새벽녘에 기습공격을 받게 된 성 안의 의병들은 크게 놀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가전을 벌이면서 대항하였지만 한번 흐트러진 전열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이때의 전황을 일제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31일 오전 2시 30분 藤소위가 인솔하는 제2중대 1소대는 서문 밖의 독립가옥에 방화하고 맹렬한 사격으로 적을 견제하고, 星기병소위는 오전 2시 50분에 폭파병을 이끌고 동문으로 진격, 총과 투석을 무릅쓰고 오전 3시 10분 큰 폭음과 함께 문짝을 飛散시켜 돌입구를 터놓자 돌격대는 곧 성내로 돌입하였다. 북문은 오전 3시 30분 폭파하였다. 폭도는 우리의 신속 과감한 돌입으로 인해 크게 혼란을 일으켜 그 대부분은 가옥 내에서 우리를 사격하고 다른 일부는 큰 길에서 縱射를 해 와 마침내 시가전을 야기하였다. 이때 날은 아직 새지 않아 수색이 곤란하였으므로 우선 적의 퇴로를 막기 위해 제4중대는 주로 동문에서 남문을 거쳐 서문에 이르는 성벽을, 제2중대는 주로 서문에서 북문을 거쳐 동문에 이르는 성벽을 점령하고, 헌병 및 경찰 일부는 동문과 북문을 감시하였다. 동이 틀 무렵부터 옥내 수색을 개시하여 사력을 다해서 저항하는 자는 사살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포획하여 오전 7시 30분 성 내외의 수색을 완료하였다(≪獨立運動史資料集≫3, 1971, 676∼677쪽).

이와 같이 일제 군경은 31일 새벽 성을 점령한 뒤 아침 7시 30분까지 ‘가택수색’까지 완료함으로써 소위 작전을 종료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홍주성 안에 있던 의병과 민간인은 거의 1천여 명 가까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1193)≪大韓每日申報≫, 1906년 6월 6일,<洪州慘景>. 한편 일제의 공식 보고서에서는 사실을 축소 왜곡시켜 의병측 사망자를 82명으로 기록하고 있다(朝鮮駐箚軍司令部編,≪朝鮮暴徒討伐誌≫, 677쪽).

이때 민종식을 비롯한 일부 참모들은 성을 탈출하였으며, 참모장 김상덕과 채광묵·성재평 등을 위시한 80명은 순국하고 말았다. 그리고 윤석봉·이상두·신현두·유준근 등 80여 명은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 결과 윤석봉 이하 70여 명은 석방되고, 나머지 남규진·유준근·이식·신현두·이상구·문석환·신보균·최상집·안항식 등 9명은 일본 對馬島로 압송 억류당하였다. 또한 중군장 이세영도 그해 6월에 체포된 뒤 서울 경무청으로 압송되어 심문받은 후 그해 겨울 종신 유배형을 받고 황해도 황주의 鐵島(三田面 소재)로 유배되었다.119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360쪽 참조.

홍주성 함락 후 의병들은 해미·청양 등지로 분산 탈출하였다. 이들은 그후에도 도처에서 소규모의 의진을 다시 편성하고 항일전에 들어갔다. 먼저 이용규는 그해 7월에 청양 杻峙에서 군사 4백 명을 모은 뒤 부여·노성을 지나 연산 富興里에서 일본군을 만나 교전을 벌였다.1195)成德基,<義士 李容珪傳>, 332쪽. 그러나 훈련 부족과 화력 열세로 패전하고 말아, 조병두·채경도·오상준 등의 참모들은 체포되고 군사들은 흩어졌다. 이용규는 그 뒤 같은 해 8월경에는 온양 石岩寺에서, 그리고 9월에는 공주 蘆洞에서 다시 거병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1196)成德基,<義士 李容珪傳>, 333쪽.

그 뒤 1906년 10월 중에는 예산지방의 지사들을 중심으로 재거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 거사 계획을 구체화시켜 11월 20일을 기하여 예산읍을 공략한 뒤 이곳을 활동 근거지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여기에 동참한 중심 인물들은 이용규와 그의 족형인 전참판 李南珪를 필두로 곽한일·박창로·이만식 등이었다. 그리고 의병장에는 다시 민종식을 추대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휘하 중군장에 황영수·정재호, 운량관에 박윤식, 참모에 곽한일·이용규·김덕진 등을 선임하고 항일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재거 계획은 미처 실행되기도 전에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일제 군경의 습격을 받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이남규·이충구 부자를 비롯해 곽한일·박윤식·이석락·이용규 등 핵심 인물들은 일경에 체포되어 갖은 악형을 당하였다. 그 밖에도 각지로 흩어진 朴禹日·孟順良·홍순대·안병찬·이근주·한계석 등 다수의 홍주의병은 충청도·전라도 일대에서 1907∼1909년까지 간헐적으로 항일전을 수행하면서 의병항전의 전국적인 파급 확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1197)柳漢喆, 앞의 글, 30∼31쪽 참조.

한편 을미의병 때 진주의병을 인솔하였던 盧應奎는 1906년 가을 충북 황간에서 전참봉 徐殷九·嚴海潤 등과 함께 재기항전의 기치를 들었다. 노응규의 황간의병은 일제 시설물 및 경부선 철도·열차를 그 주요 파괴대상으로 삼고 활약하는 한편, 일본군과도 교전을 벌여 척후병을 패퇴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노응규 이하 서은구·엄해윤 등 핵심 인물들이 1907년 1월 황간분파소 순검들에게 일시에 체포됨으로써 그 활동이 종료되고 말았다.1198)≪皇城新聞≫, 광무 11년 2월 4일.
≪官報≫號外, 광무 11년 7월 11일,<彙報>, 637∼638쪽.

1907년 5월에 들어서는 제천에서 이강년이 安成海·白南奎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을미의병 때 제천의병에 遊擊將으로 참전한 전력을 가진 이강년은 무관(宣傳官) 출신인 까닭에 군사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용병술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듬해 7월 청풍 까치성[鵲城]전투에서 체포될 때까지 1년 3개월 동안 경상도와 강원도, 그리고 충청도 일대를 돌며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민긍호·신돌석 의병 등 인접 부대와 긴밀한 연계하에 일제 군경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어 그 명성을 드날리게 되었다.1199)정제우,≪운강 이강년 의병장≫(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66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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