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2. 을사의병
  • 2) 전국 의병의 활동
  • (4) 호남지방

(4) 호남지방

을사조약 늑결 이후 호남지역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의진 가운데 하나가 전북 태인에서 일어난 崔益鉉 의병이다. 최익현 의병은 을사의병 가운데서도 호남지역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의병의 전국적 파급에 상당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한 최익현은 일찍이 관계로 진출해 호조참판, 의정부찬정, 공조판서, 궁내부특진관 등의 중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원로였다. 개항 이후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제의 침략과 정부의 개화시책을 규탄하는 등 재야의 여론을 대변하는 척사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1200)尹炳奭,<勉菴 崔益鉉의 衛正斥邪論과 湖南義兵>(≪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朴永錫敎授華甲紀念論叢, 탐구당, 1992), 3∼5쪽 참조.

최익현이 의병에 투신하게 되는 것은 을사조약 늑결을 계기로 해서이다. 그는 조약 늑결을 곧 국망으로 인식하고,<請討五賊疏>와<倡義討賊疏>등의 상소에서 구국을 위한 민족의 진로를 밝히고 의병에 동참할 것을 천명하였다.

최익현은 거병의 준비단계로 지사들을 모으고 항일의지를 결집키 위해 1906년 초에 魯城 闕里祠에서 원근의 유림을 모아놓고 강회를 열었다. 이어 3월에는 전북 태인의 鍾石山 밑에서, 거병 과정에서 실무를 전담하게 되는 林炳瓚을 만나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그는 담양의 龍湫寺로 내려가 奇宇萬 등 호남의 명유지사들과 회동하고, 113명에 달하는 지사들의<同盟錄>까지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순천·樂安·흥양·여수·돌산·광양·장흥·보성·강진·해남·완도 등 호남 각지에 격문을 보내 거병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1201)윤병석, 앞의 책, 200쪽.
崔濟學,≪勉菴先生倡義顚末≫(≪獨立運動史資料集≫2, 1971), 65∼75쪽.

이와 같은 준비 끝에 최익현은 1906년 6월 4일 태인 武城書院에서 74세의 고령으로 구국의 기치를 들었다. 崔濟學 등의 문인지사들을 주축으로 편성된 80여 명의 최익현 의병은 즉시 태인 본읍을 향해 행군을 개시하였다. 태인군수 孫秉浩가 저항을 포기하고 달아나, 의병은 무난히 태인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鄕長과 首書記를 불러 관아의 무기를 접수하는 한편, 군사들을 모아 전력을 강화시켰다.

거병 후 최익현 의병은 전주를 치기 위해 북상하려던 원래의 계획을 수정, 정읍으로 내려갔다.1202)黃 玹,≪梅泉野錄≫(國史編纂委員會, 1955), 382쪽. 그곳에서는 군수 宋鍾冕이 저항을 포기한 채 의진에 항복해 왔다. 이에 총포 등의 무기류와 1백여 명의 병력을 확보한 뒤, 당일 행군을 계속한 끝에 內藏寺로 들어갔다. 이때 흥덕 선비 高石鎭이 金在龜·姜鍾會 등과 함께 포군 30여 명을 거느리고 합세해 와 의진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이 무렵 의병의 군세는 3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내장사 뜰에서 좌, 우익을 갈라 잠시 군사를 조련한 의진은 龜岩寺를 경유한 뒤 6월 7일 순창읍으로 들어갔다.1203)崔濟學,≪勉菴先生倡義顚末≫, 84쪽.

의병이 순창읍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군수 李建鎔도 최익현 앞에 나와 투항하였다. 결국 최익현 의병은 무성서원 거병 후 태인·정읍·순창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난관없이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또한 蔡永贊·黃均昌·金甲述·楊允淑 등이 인근 각지에서 수십 명의 포군을 거느리고 합류해 옴으로써 전력도 더욱 강화되었다. 이 무렵 최익현 의병의 군세는 5백여 명에 육박하게 된다.120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378쪽.
崔濟學,≪勉菴先生倡義顚末≫, 84쪽.
이날 의병을 추격해온 전주 경무고문지부 소속 일경 10여 명을 상대로 승전을 거두어 의진의 사기는 한층 고무되었다.1205)林炳瓚,≪遯軒遺稿≫(≪義兵抗爭日記≫, 韓國人文科學院, 영인본, 1986) 권 6,<倡義日記>, 206쪽.

최익현 의병은 다음 날 남원 진출을 시도하기 위해 곡성으로 갔다. 그곳 군수 宋振玉 역시 수성을 포기한 채 의병을 영접하였다. 그러나 남원의 방어태세가 견고하다는 판단하에 稅錢·양곡 등만 접수하고 군사를 소모한 뒤 순창으로 돌아왔다.

최익현 의병은 거의 후 태인·정읍·순창·곡성 등 호남 각지를 행군하면서 민간에 의기를 불어넣고 군사를 모아, 순창에 재차 주둔할 무렵에는 8백여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성세에 비해 화력이 빈약했기 때문에 실제 전력은 열악한 실정이었다.1206)위와 같음.

순창을 근거지로 최익현 의병이 활동의 폭을 넓혀 가자, 일제는 정부로 하여금 의병 탄압을 종용하고 나왔다. 이에 광주관찰사 李道宰는 6월 11일 고종의 선유조칙과 관찰사 告示文을 의진에 보내 와 해산을 종용하였다. 최익현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일제의 압력을 받은 정부에서는 전주관찰사 韓鎭昌에게 진위대를 동원해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훈령을 내렸다. 한진창은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를 출동시켜 6월 11일 순창 외곽을 봉쇄하고 읍의 북쪽인 錦山에는 전주진위대가, 동쪽인 大同山에는 남원진위대가 각각 포진해 읍내 관아의 客館을 중심으로 포진하고 있던 의진을 압박해 왔던 것이다.1207)윤병석, 앞의 책, 204쪽.
林炳瓚,≪遯軒遺稿≫, 206쪽.
崔濟學,≪勉菴先生倡義顚末≫, 88쪽.

최익현은 처음에 이들이 일본군인 줄 알고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했었다. 그러나 얼마 뒤 척후병의 보고로 이들이 일본군이 아니라 진위대임을 알고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진위대측에 다음과 같은 간곡한 통첩을 보냈다.

우리 의병은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싸울 뿐 동족간의 살상은 원치 않는다. 진위대도 다같은 우리 동포일진대, 우리에게 겨눈 총구를 왜적에게 돌려 우리와 함께 왜적을 토멸하도록 하자. 그리함으로써 후세에 조국을 배반했다는 오명을 씻을 수 있으리라(崔益鉉,≪勉菴集≫3,<연보>, 184쪽).

그러나 진위대 군사들은 이러한 호소를 묵살한 채 일제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일시에 급습을 받은 의병 진영은 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하는 등 와해되고 말았다. 이때 최익현을 비롯해 탈출을 포기하고 순창 객관 椽廳에 모여 있던 임병찬·고석진·金箕述·文達煥·林顯周·柳鍾奎·趙愚植·趙泳善·崔濟學·羅基德·李容吉·柳海瑢 등 13인의 의사들은 그대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최익현 의병은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1208)崔益鉉,≪勉菴集≫3, (민족문화추진회, 1978),<연보>, 184∼185쪽.
林炳瓚,≪遯軒遺稿≫, 207쪽.
崔濟學,≪勉菴先生倡義顚末≫, 88쪽.

최익현 의병은 활동기간이 10여 일에 불과하고 격전 한 번 없이 해산하고 말았지만, 그 여파는 컸다. 이를 계기로 호남 각지에서 의병의 기세가 점차 고조되어 갔던 것이다.1209)李一龍 譯,≪韓末 全南義兵戰鬪史≫(全南日報印書館, 1977), 20∼23쪽 참조.

이에 앞서 전남에서도 을사조약 늑결 직후 명유 기우만 등이 조약 파기와 매국적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항일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이에 따라 시국을 토론하는 유생들의 궐기와 회합이 몇 차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행사가 擧義로까지 계기적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1906년 봄에도 기우만과 李恒善 등이 최익현·임병찬 등과 서로 연락을 취하며 거사 계획을 의논하였으나 역시 거병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1210)奇宇萬,≪松沙集≫附錄,<年譜>고종 42·43년.

최익현 거병 이후, 광양에 은거중이던 前主事 白樂九가 1906년 가을 의진을 편성하고 구국항전의 기치를 올렸다. 그는 원래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招討官으로 실전을 치른 경험이 있었으며, 이 무렵 전남 광양 산중에 은거하던 중 동지 10여 명과 함께 수백 명의 주민을 모아 의진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1211)黃 玹,≪梅泉野錄≫, 395쪽. 이에 우국지사들인 金相璣·李恒善·盧元執·蔡相淳·柳秉禹 등이 의진에 참여하고 도처에서 장정들이 모여들어 수백 명의 군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백낙구는 司令長에 추대되어 이 의진을 통솔하였다.121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397쪽.

의병 편성 직후 백낙구는 인근 각지로 격문을 돌려 항일전의 명분을 천명하는 한편, 의병 소모에 적극 호응해 줄 것을 주민들에게 당부하였다. 그리고 장성의 기우만, 담양(昌平)의 高光洵·이항선 등과 연락하여 각지의 군사들을 모아 11월 6일 순천읍을 공략하기로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모인 군세가 미약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백낙구를 비롯하여 종사 7명이 체포되고 말았다. 그 가운데 종사 安致命과 金奉九는 탈옥하였으나, 백낙구 등은 광주경무서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 뒤 백낙구는 1907년 봄 석방되자마자 다시 의병에 투신, 태인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하고 말았다.1213)李一龍 譯, 앞의 책, 20∼23쪽.
黃 玹,≪梅泉野錄≫, 395·413쪽.

한편 남원지방에서는 草溪郡事를 지낸 梁漢奎가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영·호남지역으로부터 1천여 명의 병력을 모아 활동에 들어갔다. 양한규 휘하의 정예병 1백여 명은 1907년 2월 13일 밤 참봉 柳秉斗, 진사 朴在洪 등과 함께 진위대가 주둔한 남원성을 기습 공격하여 성공적으로 성을 점령하였다. 이 날이 설날이었으므로 경비가 허술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원성의 4대문은 의병의 파수하에 들어가고, 진위대의 무기 등 군수품 일체를 접수하였다.1214)宋相燾,≪騎驢隨筆≫(國史編纂委員會, 1955), 112∼113쪽.

하지만 주장 양한규가 진위대를 추격하던 중 전사함으로써 의진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다음날에는 관군이 반격해 들어오자 사기가 저하된 의병은 참패를 당해 성을 탈출한 뒤 지리산 일대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리산 아래 운봉을 근거지로 삼던 양한규의 처남 朴鳳陽을 비롯해 박재홍, 상인 梁文淳 등의 간부들은 체포되어 전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고 말았다.1215)≪全北義兵史≫下(全北鄕土文化硏究會, 1992), 66쪽.
黃 玹,≪梅泉野錄≫, 406쪽.

담양군 창평 출신의 고광순은 1907년 1월 봉기하였다. 그는 기우만·奇參衍 등과 함께 을미의병에도 참가하였던 인물로, 을사조약 체결 이후 더욱 분개한 나머지 지사들을 규합하면서 재기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최익현 의병이 순창을 점령할 무렵에는 여기에 합류하기 위해 왔으나 이미 의진이 해산된 뒤였다.1216)黃 玹,≪梅泉野錄≫, 383쪽. 그 뒤 고광순은 1월 24일 昌平에서 高濟亮을 副將, 尹永淇·朴基德 등을 참모로 창의의 깃발을 세웠다. 이때 남원의 양한규로부터 연합 제의를 받은 고광순 의병은 곧 남원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양한규 의진이 즉시 와해되고 말았기 때문에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광순 의병은 4월 25일 화순읍을 점령하여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튿날 다시 同福으로 진군한 의진은 광주에서 파견된 관군과 圖馬峙에서 교전 끝에 사방으로 패산하고 말았다.121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402쪽.
黃 玹,≪梅泉野錄≫, 413쪽.

고광순을 중심으로 한 광주 부근의 의병들은 그 뒤 산속으로 숨고 혹은 기회를 보아 진격하는 등 수시로 유격전을 벌여나갔다. 특히 1907년 8월 이후로는 몰려드는 해산병을 규합, 1천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부대가 되어 지리산 花開洞 일대를 근거지로 항전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광순과 고제량은 1907년 10월 연곡사 전투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하지만 그 휘하에 있던 의병은 운봉·함양·순창·정읍 일대에서 항전을 계속하게 된다.1218)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위와 같음.
李一龍 譯, 앞의 책, 12·26∼27쪽.

또한 梁會一의 주도하에 편성된 雙山義所는 양한규·고광순보다 다소 늦은 1906년 4월 하순 거병하였다. 綾州(화순과 보성의 군계)의 桂棠山에 자리잡고 있던 이 의진은 거병 직후 능주와 화순 郡衙를 습격하여 무장을 강화하였지만, 이튿날 福川 刀摩峙에서 패전 끝에 해산하고 말았다. 그 뒤 林昌模 등 이 의진의 성원들은 1908년까지 각지로 분산해 지속적인 활동을 계속해 갔다.1219)趙東杰,<雙山義所(和順)의 義兵城과 武器製造所 遺址>(≪한국독립운동사연구≫4, 1990), 6∼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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