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2. 을사의병
  • 2) 전국 의병의 활동
  • (5) 양서지방

(5) 양서지방

한말 의병은 지역적으로 중·남부지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북부지방에서는 정미의병 때에 가서야 의병의 기세가 점차 활발해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의병이 시종일관 북부지방에 비해 중·남부지방에 집중되던 양상은 당시 사회적 여건에 비추어 자연스런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곧 19세기 후반의 시대상황에서 정치·사회·경제 등 제반 영역에 걸친 활동의 중심이 중·남부지방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구 역시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220)朴敏泳,≪大韓帝國期 義兵硏究≫(한울, 1998), 9∼10쪽. 이 점을 감안하고 을사의병 시기에 북부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의 개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관서지방에서는 을사조약이 늑결된 직후인 1905년 12월 평북 龍川 일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 의병은 유생 全德元이 金斗燮 등의 지사들과 함께 주도하였다. 전덕원은 1905년 초 서울에 올라와 十三道儒約所에 가담하여 일제의 침략을 성토하고, 을사조약 때는 조약 파기와 매국적 처단을 촉구하는 상소를 하는 등 구국운동을 벌이던 우국지사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桂行蹇·김두섭 등 여러 지사들의 호응을 얻고, 가산을 처분한 군자금으로 무기를 준비한 뒤 거병하였다. 그러나 이 의병은 실제 활동에 들어가기도 전에 일제 군경의 급습을 받아 전덕원 등의 주모자들이 체포됨으로써 해산하고 말았다. 그뒤 전덕원은 1906년 봄에 석방되어 재기항전을 도모하였으나 朴樑來 등의 동지들과 함께 다시 체포되고 말았다.1221)≪韓國獨立運動史≫(愛國同志援護會, 1956), 58쪽.

한편, 해서지역은 을미의병 때 제천의병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으며, 그후 1900년대에도 유인석이 평산(山斗齋)을 근거지로 부단히 왕래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며 문인들을 양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일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을사조약 이후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재기하는 등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해서지역에서도 우국지사들간에 모임과 왕래가 빈번해지고 구체적인 거의 움직임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 가운데 신천·장연·송화·재령 등지에서는 ‘正東義旅大將’ 禹東鮮 주도하에 金斗行·趙允奉·康萬石·張東燦·高益均·李振台 등이 모여 을사조약을 규탄하면서 의병을 일으켰다. 우동선 의병은 구월산 月精寺에 근거지를 두고 일제 군경을 격파하고 일제 침략시설을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특히 산간 지세를 이용하는 유격전으로 적군을 궁지로 몰아넣으면서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고, 1907년 정미의병 때에는 해산군인까지 가세하여 한층 강화된 전력으로 그 기세를 더욱 떨쳐갔다.1222)鄭濟愚,<韓末 黃海道地域 義兵의 抗戰>(≪한국독립운동사연구≫7, 1993), 11∼12쪽 참조.

한편 평산을 중심으로 한 兪致慶·邊錫玄 등 화서학파 계열 인물들의 거병 분위기는 1907년 9월에 朴正彬을 主將으로 하는 평산의진의 편성으로 결실을 맺고 해서지방의 의병전쟁을 주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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