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3. 정미의병
  • 1) 군대해산
  • (2) 서울 시위대의 해산

(2) 서울 시위대의 해산

정미7조약을 체결한 일제가 무엇보다도 서둘러야 했던 우선적 사항이 한국군의 해산이었다. 이미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한국군이었으나 그래도 군대인 만큼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무장해제를 해야만 저항을 막을 수 있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제는 해산에 앞서 한국군에 지급된 소총과 탄환을 철저히 관리·통제하는 조처를 내렸으며 봉급지급의 중단, 한국군 병사들의 영외출입 금지, 화약·탄환·창고의 접수 등을 차례로 명령하였다.1228)≪明治編年史≫, 1907년 7월 26일,<福岡日日>. 그러나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통감 이토는 본국에 일본군의 증파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목하 경성에는 약 6천 명의 한국군이 있어 언제 봉기할지 모를 상황에 있으니 그 무기를 빼앗을 필요가 있다. 아울러 다수 우세한 병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조속히 출병시킴이 긴요하다(≪日本公使館記錄≫, 1907년, 海牙密使事件及日韓協約條約).

이리하여 일본 정부는 본국의 제12사단에서 1개 혼성여단을 편성하여 한국에 급파하였다. 이로써 1개 사단밖에 없던 주한 일본군이 1개 사단과 1개 여단으로 증강되었고 이와는 별도로 총기 6만 정이 서울에 급송되었다.1229)≪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7년, 甲種文書.

증원된 1개 여단과 총기 6만 정은 7월 31일 경부선을 거쳐 부산에서 용산역에 도착하였고, 그와 때를 맞춰 그날 밤 10시 40분 해산조칙을 발표하였다.

짐이 생각건대 冗費를 절약하여 利用厚生之業에 응용함이 급무라. 현재 군대는 용병으로서 상하일치, 國家安全之防衛에 부족한지라. 他日 징병법을 발표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할 때까지 황실시위에 필요한 자를 빼고 모두 일시 解隊하노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병무

(≪官報≫號外, 광무 11년 8월 6일)

이완용은 또 “군대 해산시 인심동요치 아니하도록 예방하고 위법폭동자를 진압하기 위해 이를 통감에게 의뢰한다”는 조칙을 발표함으로써 일본군이 한국군의 저항을 진압하도록 위임케하였다.1230)≪官報≫號外, 광무 11년 8월 6일.

이리하여 1907년 8월 1일 아침 서울의 시위대를 먼저 해산하게 되는데, 그들이 꾸민<군대해산 방법>은 다음과 같다.1231)≪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7년, 日韓協約履行關係.

1. 군부대신은 군지휘관을 소집하여 조칙을 전하며 또 이를 공시한다. 2. 군지휘관은 군부대신의 조칙을 부하에 전하며 이 때 일본병 약 2개 중대를 동행한다. 필요할 때는 무력을 사용한다.

또<군대해산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시위보병 1대대를 남겨둔다. 2. 해산 병사에게 장교는 1년 반 상당의 금액, 하사 이하는 1년 상당의 금액을 은급금으로 지급한다. 3. 군사학에 소양이 있는 장교는 일본군에 부속시킨다.

이와 같이 회유조항이 붙어 있었으나 모든 회유책이 해산 당일 수포로 돌아간 것이 명백해졌다.

8월 1일 새벽 7시, 서울의 한국군 지휘관들은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에게 불려가 치욕의 해산조칙을 듣고 부대에 돌아와 사병들 몰래 모든 총기와 탄약을 무기고로 반납케하여 무장해제한 뒤, 오전 10시까지 훈련원으로 집합시켰다. 훈련원은 동대문 운동장 앞 을지로 6가의 현재 국립의료원 자리에 있었다.

부대에서 훈련원까지 가는데 무장한 일본군이 앞뒤에서 경계하였으니 그 모습은 마치 전쟁포로와도 같았다. 훈련원에 제일 먼저 도착한 부대는 기병대(대장 김기선)였고 이어 제1연대 제3대대와 시위연대 제3대대 병사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오전 10시 현재 겨우 600명 밖에 훈련원에 도착하지 않았으니 대부분의 병사들이 탈영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정시간보다 4시간이나 늦은 오후 2시에 해산식이 거행되어 1시간만인 오후 3시에 식이 끝났다.

때마침 소나기가 퍼붓는 가운데 병사들은 굴욕의 조칙을 들어야 했고 은급이라 하여 비에 젖은 종이돈을 받아 쥐어야 했다. 어떤 이는 받자마자 지폐를 찢어 버렸다.

최종경례

어제 상오 10시부터 각 부대 병정들을 훈련원에 소집하고 해산식을 거행할 새 일본군이 사면에서 둘러싸고 철통같이 경계하였고 한국 위관들은 의기소침하여 대대장이 효유한 후 장졸이 서로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장교는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하사는 80원, 1년 이하자는 25원씩을 받았다(≪大韓每日申報≫, 1907년 8월 2일).

그러나 은급을 받아 훈련원을 나선 병사들은 울분을 참지 못해 받은 돈을 찢는가 하면 민간복을 사 입으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1232)≪大韓每日申報≫, 1907년 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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