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3. 정미의병
  • 1) 군대해산
  • (4) 지방진위대의 항전

(4) 지방진위대의 항전

1907년 8월 1일 일제는 서울 시위대를 해산한 데 이어 지방진위대를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지방진위대에 대한 해산 일정은 8월 3일의 개성과 청주진위대를 필두로 4일에 대구, 5일에 안성, 6일에 공주·해주·평양, 7일에 안주, 8일에 수원, 9일에 광주·의주, 10일에 홍주·원주, 11일에 강화·문경, 13일에 강릉·남포, 14일에 전주, 16일에 안동, 17일에 울산·진주, 19일에 경주, 23일에 강계, 24일에 함흥, 9월 3일에 북청 등의 차례로 약 1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한편 일제는 장교만은 그대로 두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9월 3일, 1,225명을 대량 해고하였다. 나머지 장교들도 1909년 9월 30일<군부폐지령>에 따라 모두 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서울 시위대의 항전 소식은 즉각 지방 진위대로 알려졌다. 먼저 궐기한 부대는 8월 10일 해산 예정으로 있던 강원도 원주진위대였다. 원주진위대의 대대장은 洪裕馨이었는데 8월 2일 소집령을 받아 상경하였다. 그 사이 대대장 대리 金德濟와 특무장교 閔肯鎬가 극비리에 봉기계획을 세워 8월 5일 하오 일제히 무기고를 부수고 1,200정의 소총과 4만 발의 탄환을 확보하였다.1237)≪大韓每日申報≫, 1907년 8월 20일.

무기를 든 병사들은 원주시내로 일제히 진출하였다. 그리고 우편취급소와 군청 그리고 경찰서를 습격하여 원주시를 점령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원주진위대의 여주 분견대도 이튿날 죽음을 같이 하겠다고 하면서 원주본대에 합류하였다.1238)≪官報≫3877호, 융희 원년 9월 21일.

원주에서도 일부 장교들이 사병들을 배신하였다. 대대장 홍유형은 서울에서 돌아오는 길에 砥平義兵들에게 붙들렸는데 야음을 타서 도주하였다. 그 밖의 장교 10명도 모두 도주하였다.1239)위와 같음. 이리하여 김덕제와 민긍호 두 장교가 지휘하는 가운데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다. 8월 6일 충주수비대 소속의 일본군 20명의 공격을 받았으나 2시간의 접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급보에 접한 서울의 일본군은 기관총 4문, 공병 1개 소대를 포함한 2개 중대를 원주에 급파하였다. 이 부대가 원주에 도착한 것이 8월 10일이었는데 원주시내에는 한 사람의 한국군 병사도 없었다.1240)≪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7년, 甲種文書<原州鎭衛隊의 蜂起>. 모두 철수한 것이다. 원주진위대 병사들은 민긍호가 이끄는 부대와 김덕제가 이끄는 두 부대로 나누어 각각 충주·제천 방면, 강릉·양양 방면으로 이동하였는데 이 두 부대가 강원도 의병의 핵심이 되었으며 13도 창의군의 중심 부대가 되기도 하였다.

원주진위대에 이어 강화진위대가 궐기하였다. 강화진위대는 수원진위대의 강화분견대였는데, 8월 9일 池弘允·劉明奎·李東輝 등을 선두로 무기고를 장악하고 읍내로 진출하여 일본 순사와 일인을 사살하고 군수 鄭景洙를 동문 밖에서 처형하였다. 이튿날인 8월 10일 일본군이 강화 갑곶에 상륙하자 매복하고 있던 한국군이 기습하여 1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다. 그러나 다음날 기관총을 앞세운 일본군 2개 중대가 증파되어 강화성은 함락되었고 한국군 병사 600여 명은 바다를 건너 황해도 해주와 통진방면으로 탈출하여 그 지역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1241)≪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7년,<江華分遣隊의 蜂起>.

이 밖에도 홍주분견대는 해산에 반대하여 집단탈영을 감행하였으며 진주진위대도 봉기계획을 세워 추진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러나 봉기에는 실패하였으나 거의 모든 한국군 병사들이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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