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3. 정미의병
  • 2) 중부지역의 의병전황
  • (1) 중부지역의 의병전환

(1) 중부지역의 의병전환

이상과 같이 한국군의 강제해산에 반대하여 일어난 서울시위대와 지방진위대의 항전은 전국 의병의 봉기를 유발하였다. 즉 1907년 8월의 한국군 해산은 의병항쟁을 일찍이 보지 못한 영역과 규모로 확대시켰으며 그 구성과 성격 또한 크게 전환시켰다. 1907년 말까지 전황은 거의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1908년에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남쪽으로는 제주도로부터 북쪽으로는 간도·노령·연해주에 이르기까지 의병전쟁의 파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전선없는 전쟁이 한반도를 휩쓸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목가적인 한국의 농촌마을들이 일본군의 방화로 초토화되었고 평화적인 양민이 학살당하였다. 그러나 의병들은 매국노 일진회원들을 처단하고 지주와 양반의 재물을 빼앗아 군량미로 충당하였다. 교통은 두절되고 상업은 마비되었다. 이 때문에 대일농산물 수출은 격감하고 일제상품의 농촌침투는 일시 중단되었다. 재한일인들은 농촌에서 도항으로 쫓겨가고 그들의 토지투기는 위축되었다. 모든 말단 행정기능은 마비되고 세금징수는 정지되었다. 소작료와 고리대 이자의 징수가 중단되고 군수, 면장의 사표가 사태를 이루었다.1242)朴成壽,≪獨立運動史硏究≫(創作과 批評社, 1980), 146쪽.

1907년 여름에 시작된 의병전쟁은 그 해 가을까지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3년 동안에 걸친 항쟁을 통해 의병들은 일본군과 일본인 그리고 부일 매국노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일제는 의병항쟁으로 막대한 전비와 인명을 소모하였으며 직접·간접으로 입은 손실 또한 컸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경제적 제수탈을 저지당하였으며 한국병합의 음모를 일시 중단해야만 했다.

상해에서 발간되는 한 영문일간지(1909년 8월 23일)가 전한 한국특별통신은 의병전쟁으로 말미암아 일제가 겪은 수난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한국은 실로 흥미있는 나라이다. 일본인은 한국에서 경제적 승리를 얻었다고 하지만 병력을 증가하거나 관리를 주입하지 않으면 실업계가 일종의 마비증에 걸린다. 적어도 통계상으로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여러 사업들이 정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실례를 들면 목포의 한 시가에는 일본상점이 즐비하게 있었으나 오늘날 이들 상점은 폐점상태에 있다. 또 인천에서는 일본상인의 5분의 일은 실패하여 이미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한국민의 불타는 애국심과 일본인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는 의병에 의한 교통두절은 앞에서 말한 상업거래의 한 장해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리하여 주둔병이 증가함에 따라 더욱더 한국인이 시장을 멀리하게 되었다(≪暴徒編冊≫, 復命書<全羅道義兵戰爭이 미친 影響>).

1907년 8월초 강원·충북·경북 등 각도의 의병이 먼저 봉기하였다. 격문이 나붙고 함성이 울리면 군중은 운집하여 경찰분파소와 군아, 우편취급소를 부수고 방화하였다. 8월 5일 원주진위대가 봉기하기 전에 이미 중남부 여러 곳에 의병들이 일어나 군읍을 습격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즉 8월 3일 밤 충북 청풍의병은 청풍읍을 습격하여 경무분파소에 밀려들어 파괴하고 양총 3정과 순검모, 군도, 제복 등을 노획하였으며 순검을 붙잡아 몰매를 가했다. 때마침 선유차 청풍읍에 유숙하고 있던 청풍 관찰사 李鎬成은 기겁을 하여 도주해 버렸다.

같은 날 문경에도 의병이 나타나 우편소청사가 파괴되고 ‘소내 금고 기타 물건 용지 등을 모조리 파괴’하고 우송인 島田一磨를 사살하였다. 또 친일파의 가옥 30동도 불태웠다. 8월 4일 아침에는 경기도 양근읍에 다수의 의병이 진입하자 우편취급소장(일인)은 놀라서 가족을 데리고 도망하였다. 양근읍을 습격한 의병은 조인환이었다. 8월 5일 저평읍에도 150명의 의병이 나타났다. 이들 역시 저평군내 농민들이었으므로 대부분이 무기를 갖지 못하였다.

이날 하오 원주진위대 병사들이 원주읍을 점령하였다고 해서 결코 이상하지 않았다. 강원도 원주 일대는≪大韓新聞≫이 보도한 바와 같이, 10여 년 이래의 의병 근거지였기 때문에 순식간에 불길이 퍼져갈 수밖에 없었다.

원주폭동의 폭도가 1천여 명에 달하여 일경과 포화상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詳報는 아직 듣지 못하였으나 道廳塗說에는 전의병장 柳麟錫·金夢虎 등이 10여년 전부터 禍胎를 釀出하던 소굴이라 이를 盤據하여 작금에 해산병의 폭동이 일어났다. 원주를 중심으로 동으로 횡성·강릉·평창·정선을 연결하고 남으로 충주·단양·제천을 연락하여 서북으로 이천·여주·저평·양근 등 제군이 향응하여 6∼7백 리 지방에 창궐한 형세가 일익 증가한다고 한다.

두 부대가 이동한 각 지방에는 許俊·李康秊·金生山·邊鶴基·曺仁煥 등 여러 의병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미 8월 7일 중원분파소(충주)를 습격한 의병들 속에 다수의 한국군 병사가 섞여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봐도 의병세력이 얼마나 신속하게 퍼져 나갔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중원분파소를 습격한 의병들은 일인 경무보조원 2명을 포박하여 처단하고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였다.

8월 10일 여주의병은 한강을 항행하는 일인목선을 안창강변에서 기습하여 일인 20명을 총살하고 적재화물 일체를 노획하였다. 여주의병은 20일 여주읍을 포위하여 일경 9명과 3시간을 교전, 2명을 사살하고 읍을 점령하였다. 8월 11일 영천군내에 의병 300명이 일어나 분파소, 우편국을 습격하고 철도노선을 파괴하였다.

이같은 강원·충청·경기 등 중부지역의 의병에 대하여 일본군 사령관은 8월 6일 서울 주둔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장 下林소좌로 하여금 보병 2중대를 인솔케하여 현지에 급파하였다. 5일간의 행군 끝에 8월 10일 원주에 도착한 下林부대는 중도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원주에도 그냥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원주지역에서 단 한 사람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고 원주부근의 소탕에 힘썼으나 며칠 동안 조금도 얻는 바 없었다. 일본군의 예봉을 피한 의병들은 이미 각 지방으로 확산되어 현지에는 없었으며 인민들은 일본군의 야만적 수색을 피해 각처로 피난하고 말았다. 의병들은 8월 12일 여주읍을 점령하여 서울 원주간의 도로를 차단하였고 계속하여 음죽·장호원을 장악하였다. 이리하여 원주의 일본군은 고립상태에 빠졌고 여주의병의 병력은 수천 명에 달하였다.

춘천방면으로 진출한 민긍호의 한 부대(50∼80명)는 8월 14일 홍주읍을 점령하였다. 그들도 우편취급소와 ‘일본전당국’을 파괴하고 일본가옥을 소각하였다. 8월 15일에도 의병들은 경기도 죽산읍(의병 100명)을 각각 점령하여 일인과 친일배를 처단하였다.

같은 날 충북 체천에서도 한국군 장교가 지휘하는 의병이 일본군 1소대를 포위 습격하였다. 일본군은 청풍군으로 탈출하려 하였으나 그 곳에도 다수의 의병이 있다는 정보가 있고 후방에도 의병의 추격이 있어 우왕좌왕하며 밤새 도망하였다. 이처럼 우세한 공격을 시도한 의병의 지휘관이 누군지는 명확치 않으나 제천 방면에는 朴汝成(대장, 평강인, 35세), 趙東敎(소모장, 청풍인, 30세)의 의병과 신성대의 의병이 할거하여 제천 일대는 완전히 의병 천하였다. 이 지방은 후일 일본군의 잔악한 토초작전으로 거의 잿더미가 되었다.

8월 15일 새벽 자정, 경기도 수원역에 돌연 흑복의 의병 수십 명이 나타나 사격을 가하였다. 이들 의병은 수원군내 의병 400명의 일부로 추측된다. 또 경기도 남양군민 수백 명은 동읍 우편취급소에 몰려들어 투석전을 벌였다. 20일에도 그들은 3백여 개의 돌을 우편취급소에 던져 사무실을 전파하였다.

강원도 인제읍에도 8월 17일 330명의 의병이 진입하여 군아와 서기청 그리고 분파소를 파괴하였고 서기와 순검을 사살하였다. 그들의 일부는 동읍 일진회 사무소를 산산히 파괴하였다. 이로 인해 일인 遞送夫와 보좌원은 재빨리 도망가고 말았다. 인제읍을 습격한 의병들은 양구지방의 의병이었다. 양구·화천·인제 일대는 강원도 의병의 본거지로 많은 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의병장 池龍基(약 500명)를 비롯하여 신창현·권득수·박장호·황양수·김봉기·최도환·김가·조가 등 군소 의병장이 농민들을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원주진위대의 일부 병사를 이끌고 강원도 동해안 쪽으로 진출한 김덕제 부대는 그곳 의병과 합세하여 3천 명의 대부대를 이루었다. 8월 14일 평창·진부를 점령한 부대원 수백 명은 우편국원 2명을 사살하였다. 이미 8월 3일 대화에서 체송인 1명을, 5일 평창에서 우편취급인 2명이 살해된 바 있으니, 김덕제 부대의 도래는 이 곳 민중항쟁에 큰 힘을 주었다. 강원지방에도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 어부를 추방하였다. 강릉 부근에는 특히 일본 어부가 많이 상주하여 때때로 사건이 일어나도 그 때마다 통신의 편리가 결핍되어 있어 집무상 불편이 많다고 불평한 현지 일본관리는 “금번 폭도가 봉기하여 일개 중대와 경찰관 11명이 토벌에 나섰으나 지금처럼 우편에만 의존하여 통신함은 매우 불편하기 때문에 차제에 지급 개통하여 주기를 무망”하였다.

강릉의병의 봉기에 놀란 일본군은 원산 주둔 보병 50연대 제2중대를 군함에 실어 급파하였다. 일본군 사령관은 고립상태에 빠진 충주와 원주의 일본군을 구출하기 위해 또 다른 1개 소대를 증파하였다. 이 증원소대는 장호원에서 150명에 달하는 의병부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보다 앞서 16일에도 충주수비대 6명이 장호원에서 피습되어 그 중 2명이 사살되었고 19일에도 이천 부근에 나타난 공병 1분대가 의병의 공격을 받아 도주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는 중대병력이나 소대병력의 동원으로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원주와 충주 부근의 폭도세력은 갈수록 광폭하여 각지로 전파되었으나 이에 대한 下林 支隊의 행동은 여의치 않아 맹렬한 응징적 토벌을 개시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야만적인 일본군의 방화 살육 작전을 의미하였다.

하세가와는 우선 충주에 대대병력을 급파하였다. 즉 서울 주둔기병(제17연대)과 보병(제51연대·52연대)으로 구성된 대대병력을 차출하여 8월 18일 철도편으로 조치원까지 수송, 다시 도보로 충주에 행군시켰다. 하세가와는 또 1개 소대(서울 제51연대)를 보내 춘천수비대를 보강하고 그 주력을 홍천 방면으로 진출케 하였고 동해안의 삼척에도 1개 중대(원산 보병 50연대)를 파견하여 정선 방면으로 진출시켰다. 그는 다시 1중대(대전 보병 제14연대)를 안동·영천 방면으로 파견하여 동남부를 담당케 하였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8월 20일까지 춘천·원주·충주·영천·삼척·강릉을 잇는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포위작전은 조금도 의병의 활동을 꺽지 못하였다. 8월 21일 이천의병은 수십 주의 전신주를 도괴시켰고 파주에서도 329칸의 전선을 절단하여 일본군의 통신망을 착란시켰다. 23일 충주수비대로 군량을 호송하던 일본군(서울 보병 51연대 1개 중대)은 도중 이포에서 1,000여 명에 달하는 의병에 포위되어 전사자 1명을 내고 여주로 퇴각하였다. 이튿날 일본군은 여주수비대의 후원하에 이포를 역습하였으나 의병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일본군은 이포와 부근 촌락을 모조리 소각하였다. 광주에는 남대희의 의병대가 일본군을 노렸고 전 시위 1연대의 중대장 허준이 지휘하는 이천의병(400명)은 30일 일본군 1개 소대를 포위하여 그 중 1명을 사살하여 이를 쫓아버렸다.

한편 대대병력으로 증강된 충주수비대의 일부는 8월 23일 청풍·제천으로 진입해 전읍에 방화하여 초토화시켰다. 그러나 제천의병(약 360명, 산포 1문)은 이날 적의 본거지 충주를 포위공격하고 있었다.

의병들의 행동은 8월 20일 이후 더욱 민활해졌고 그 전투구역도 더욱 확대되었다. 순흥(27일 의병 400명, 순사 1명 사망), 영춘(15일 순사 1명 사망), 청산(의병 300명), 옥천(28일 민중 60명, 군아 파괴, 일인 5명 사망, 괴산(30일 의병 300명), 간성·고성(28일) 등 제읍이 잇달아 의병의 세력하에 들었다.

이리하여 8월 30일 長谷川은 伊藤博文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발송하였다.

각 지방폭도가 쉽사리 진정되지 않음은 그들의 출몰이 不絶하고 폭도와 보통인과의 구별이 불명하기 때문이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7년, 電受).

이는 초기 의병이 민중폭동으로 비롯되었음을 암시하였고 이제 수습될 수 없는 국면에 도달하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9월 이후 이듬해 봄까지 항쟁은 더욱 치열히 전개되고 더욱 광범하게 퍼져 갔다. 1907년 가을과 겨울 그리고 1908년 봄은 의병항전 최고의 시기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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