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3. 정미의병
  • 2) 중부지역의 의병전황
  • (2) 남부·북부지역으로의 확전

(2) 남부·북부지역으로의 확전

이상에서 보았듯이 정미의병은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먼저 일어났고 이어 남부와 북부지방으로 확대하여 갔다. 즉 1907년 8월 중부 일대를 휩쓴 의병항쟁은 강력한 지방진위대 병사를 주축으로 전개되었다. 화승총과 창검으로 무장한 농민들도 전열을 가다듬었다. 일제는 가혹한 무력탄압으로 이에 응수하기 시작했다. 폭도진압을 빙자하여 일본군은 유례없는 초토화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의병들은 월등히 우수한 일본군을 맞이하여 과감한 기습 포위작전으로 일본군의 진출을 저지하였다. 9월에 들어서자 항쟁은 남한 일대를 휩쓸기 시작하였다. 마을마다 격문이 나붙고 왕년의 용장들이 다투어 일어났다. 마침내 항쟁의 불씨는 북부지방으로도 번져갔다.

일제는 항쟁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의병을 폭도시하였다. 그들의 소위≪暴徒編冊≫제30호<暴徒의 梗槪>를 그대로 옮겨 초기 의병항쟁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7년 8월 1일 서울 종로에 시위대 병사들의 망동이 일어나자 강원도 원주진위대가 해산 명령에 불복하여 폭발하였다. 그들은 양민을 해치고 관헌을 습격하였다. (일본군) 토벌대에 潰亂당하자 그들은 四散하여 각지에 잠복하고 불량배와 결탁하여 각지를 횡행하고 민심을 선동함으로써 강원도 지방폭도의 선구가 되었다. 그들의 일부는 다시 충청북도로 들어가 그곳 흉포의 徒를 모아 500명으로 충주성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원래 그들은 오합지중이므로 한번 토벌대와 충돌하면 곧 분쇄 사산하여 감히 완고한 저항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一類는 각도에 침입하였고 동서가 이에 호응 창궐을 極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강화도 한국군 병사의 일부는 황해도에 들어가 북방의병의 선구가 되었다. 7월 중순의 경성 탈영병 폭행 이래 수개월 동안에 그들 一類는 이미 경성·강원도·충청남북도·경상남북도·황해도 각지에 瀰蔓하게 되었다.

1907년 12월에 이르러 경북의 폭도는 점차 남하하여 전라남북도에 미치고 또 그 일부는 경상남도에 출몰하였다. 황해·강원도의 폭도는 점차 북상하여 평안남도 동부와 함경남도 남부에 이르렀다. 더욱이 11월 하순 함경남도 북부 북청지방의 포수와 지방무뢰의 도당이 일진회원의 전횡에 분개하고 총기 압수에 불복하여-일본 병사, 순사를 습격살해-작년(1907년) 3, 4월에는 그 여파가 마침내 평안북도 일부 순창·희천군 지방에까지 미쳤다. 또 최근에는 함경북도의 종성·무산군 지방에도 봉기하기 시작하였다(≪暴徒編冊≫30, 暴徒의 便槪).

이처럼 1907년 8월부터 확대 발전한 항쟁은 놀라운 속도로 전국을 휩쓸었다. 이것은 이미 이전의 의병항쟁의 단순한 연속 또는 재발로만 볼 수 없었다. 당시의 농민들은 이 항쟁을 한일간의 ‘戰役’ 즉 전쟁으로 보았지 단순한 난리로 보지 않았다. 농민들만이 아니라 의병들 자신이 당당한 독립군으로 자처하고 이를 국제적으로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이인영·허위·이강년·민긍호 등 여러 의병장의 부대 1만 명이 양주에 당도 서울 탈환을 꾀할 때 13도창의대장 이인영은 명백히 그들이 국제법상의 교전단체임을 천명하였다. 의병의 서울탈환 계획은 그 후에도 수없이 되풀이되었다. 국권회복은 의병들의 궁극적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의병전쟁은 1908년 이후 1910년까지 3년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1908년과 1909년의 의병전투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의<표 1>·<표 2>와 같다.1243)필자가 이용한 일본측 통계는 첫째<폭도에 관한 제통계표>(1909년 경무국조사)이다.<표 1>에 보는 바와 같이 이 통계는 1908년 전후반기를 통틀어서 집계한 (엄격히 말하면 1907년 12월부터 1908년 12월 말까지의 13개월간) 도별 통계이다. 둘째는<표 2>에 보듯이 1909년 전반기(2월부터 6월까지의 5개월간)에 관한 도별 통계<暴徒事件彼我損害調査>로서 역시 경무국 고등계 조사이다. 그러므로 전자는 13개월간의 交戰數와 交戰義兵數이지만 후자는 단 5개월간의 숫자이다. 이 두 통계에 나온 숫자를 합하면 1907년 12월부터 1909년 6월까지의 약 1년 반 동안(1909년 1월 제외)에 의병이 일본경찰과 교전한 횟수는 무려 3,714회에 이르고 있으며 연인원 121,360명의 의병이 이에 참전하고 있다. 일본경찰의 통계가 일반적으로 사실을 과장하기보다 줄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숫자가 보여준 전쟁의 양상은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도 별 전 투 횟 수 (%) 전 투 의 병 수 (%)
전 남
강 원
황 해
전 북
충 남
경 북
경 남
충 북
평 남
함 남
경 기
평 북
함 북
274
273
232
219
217
158
153
113
108
99
78
41
11
(13.9)
(13.8)
(11.7)
(11.1)
(11.0)
(7.9)
(7.7)
(5.7)
(5.5)
(5.0)
(4.0)
(2.1)
(0.6)
10,544
18,599
7,998
9,960
7,666
5,702
3,328
6,815
1,391
6,438
1,453
2,590
283
(12.7)
(22.5)
(9.7)
(12.0)
(9.2)
(6.9)
(4.0)
(8.0)
(1.7)
(7.8)
(1.8)
(3.1)
(0.3)
합 계 1,976 (100) 82,767 (100)

<표 1>1908년 각도 의병의 전투상황

도 별 전 투 횟 수 (%) 전 투 의 병 수 (%)
전 남
전 북
경 기
경 북
충 남
강 원
황 해
충 북
경 남
평 남
평 북
함 남
함 북
547
273
165
161
138
124
111
66
61
61
17
14
(31.5)
(15.8)
(9.5)
(9.3)
(7.9)
(7.2)
(6.4)
(3.8)
(3.6)
(3.6)
(0.5)
(0.9)
17,579
5,576
3,453
3,667
1,003
2,468
2,148
832
934
540
123
270
(45.6)
(14.5)
(9.0)
(9.5)
(2.5)
(6.4)
(5.5)
(2.2)
(2.4)
(1.4)
(0.3)
(0.7)
합 계 1,738 (100) 38,593 (100)

<표 2>1909년 각도 의병의 전투상황

위의 통계는 일본 경찰이 낸 무성의한 숫자이지만, 이를 통해 대체의 추세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의 통계로 미루어 제2차 의병전쟁은 주로 강원·경기 이남(전투횟수가 전체의 75.5%(1908) 내지 88.6%(1909)를 차지하고 있다)에서 전개되었고, 북한에서는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다. 황해·평남북, 그리고 함남북의 의병은 1908년에 총전투횟수의 24.3%, 1909년에는 11.4%를 차지한 데 불과한 것이다.

1907년 8월 의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전국의 민간이 소유한 총포 화기를 압수했다. 함흥관내에서는 압수된 신식 소총이 3,144정, 화승총이 1,939정으로 집계되어 있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총기를 압수당했다. 이 지방에는 호랑이를 잡는 포수가 가장 많았고 신식 소총 역시 가장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북한 포수들은 의병봉기에 시기를 놓친 것으로 추측된다.

위의 통계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제2차 의병전쟁의 중심지가 전남·강원·전북·황해·충남·경북·경남 등지였다는 것이다. 특히 강원도 의병은 1908년에 가장 강력했고, 1909년에는 전남 의병이 가장 강성하였다. 이 통계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징은 1908년의 전투의병수가 1909년의 그것보다 2배 이상이나 많았는데, 전투횟수는 거의 비슷하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1년 사이에 1회의 전투당 평균 의병수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즉 초기에 의병은 대부대가 행동을 같이 했는데, 뒤에는 소부대로 분산되어 활동한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의병이 이처럼 적은 병력으로 분산 활동한 이유는 일본군의 소위 攪拌작전 때문이었다고 추측된다. 교반작전이란 토벌군을 세분하여 한정된 국지에 포위하여 수색을 실행하고, 전후좌우로 몇 번이나 되풀이 왕래되거나 기병적 수단을 써서 의병을 현혹시키는 교란작전을 말한다. 이같은 일본군의 작전에 대응하여 의병들은 부대를 소조로 나누어 유격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초기에 의병의 대부대가 지방의 중요 시읍을 공격, 점령하는 데 성공한 데 반하여, 후기에는 차차 산간벽지로 물러서서 일본군을 기습하는 작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의병전쟁이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1909년 7월 극비리에 한국을 병합하기로 결정한 일제는 전쟁을 하루속히 종식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그 해 9월 남한 대토벌작전을 개시한 것을 비롯하여, 이듬해 봄 황해도와 강원도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실시하였다. 특히 남한 대토벌작전은 전남 의병에 대한 대규모의 지리산 포위 수색작전으로 잔인무도한 살육작전으로도 유명하였다. 1909년 5월 목포 일본인 상업회의소가 통감부에 호소한 바에 다르면, 전남 각지의 의병으로 말미암아 “일본인은 10리 길도 안전하게 걸어갈 수 없으며, 험악의 도가 오히려 이전보다 배가되어 생명과 재산의 피해가 수백 건에 이르고, 교통은 두절되고, 농사와 상업이 위축되어 직간접의 피해가 막대하다”고 할 정도였다.

남한 대토벌은 전남 전체를 육로와 행상으로 완전포위하여 동남으로 ‘그물질하듯 빗질하듯’ 좁혀 들어가는 작전으로 일찍이 일본군이 대만 독립군을 진압하는데 사용했던 수법이었다. 일본군은 모두 한복으로 변장하였고, 모든 도민은 출입을 금지하여 위반자는 가차없이 살상하였다. 약 2개월간에 걸쳐 감행된 이 도살작전에서 沈南一 등 의병장이 사살당하고, 朴道京 등 의병장이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이어 전개된 강원도와 황해도 대토벌로 전국의 의병부대가 섬멸당하였다. 그리고나서 일제는 1910년 8월 한일합방을 선언하였으니, 무력정복에 의한 병합이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