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3. 정미의병
  • 2) 중부지역의 의병전황
  • (3) 의병장들의 의병활동

가. 호남의병-전남

가) 기삼연

奇三衍(1851∼1908)은 전남 長城에서 진사 奇鳳鎭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통적인 儒家 가문으로서 奇正鎭·奇山度와 함께 한말 의병전쟁에 참전한 인사가 많이 배출된 집안 출신이다. 그는 일찍이 글을 시작하였다. 특히 兵書를 겸하여 공부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였고 필법이 독특하였다.

을미왜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2월 장성에서 기우만과 함께 거의하였다. 기삼연은 스스로 군무를 담당하여 백마를 타고 왕래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白馬將軍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나주와 장성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있을 때, 학부대신 申箕善과 李謙濟가 관병 500명을 거느리고 와서 선유함으로써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다시 거의할 것을 기약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일진회원의 밀고로 탄로되어 결국 전주진위대에 체포되어 전주감영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서울 平理院에 이감되었다. 여기서 그는 4개월만에 탈옥에 성공하여 은신생활을 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가족을 거느리고 산중으로 들어가 피신하였다.

1907년 한국군이 해산되자 9월에 영광 隨綠山 石水庵에서 다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킨 후, 의병진을 편성하여 ‘湖南倡義會盟所’라 이름하여 재기를 꾀하였다. 이 때 편성된 의진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大 將 奇參衍 統 領 金容球 參 謀 金燁中 金鳳樹 從 事 金翼中 徐錫球 全垂鏞 李錫庸 先 鋒 金 準 中 軍 李哲衡 後 軍 李南奎 運 糧 金泰洙 總 督 白孝仁 監 紀 李英華 左 翼 金昌鰒 右 翼 許景和 砲 隊 金基淳

이상의 의진 명단으로 보더라도 기삼연의 창의회맹소는 호남의병의 원류라 할 수 있다.

기삼연은 격문을 지어 사방에 돌려 민중의 협력을 촉구하고 적에게 부역하는 자는 처단하고 그 재산을 몰수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격문 끝에 평민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100냥을 주고, 순검이나 일진회원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면해주고 두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준다고 첨가하여 포고하였다.

이같이 봉기한 기삼연은 그 후 茂長·法聖浦·高敞·長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같은해 9월 23일 고창 文殊庵으로 진군 중 접근해 오는 적을 맞아 교전하여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때 牟陽의 吏民들이 의병에게 적극 협력하여 기밀을 알려 주었을 뿐 아니라 군기와 군량을 공급해 주기도 하였다. 이 전투에서 특히 金準의 공이 컸으며, 아군 3∼4명이 전사하였다. 다시 많은 적군이 내습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군사들이 흩어지고 무기를 버리고 탈출하였으나 고을 사람들이 무기를 수습해 두었다가 틈을 타서 보내주고 군사도 점차 모여들어 기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렇듯 주민들의 협력을 적지않게 받았지만 모여드는 군사들의 식량과 닥쳐오는 추위에 대비해야만 하였다. 마침 법성포에 근처 郡에서 거둔 많은 稅穀이 적재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12월 7일 백여 명이 먼저 법성포 순사 주재소를 기습 공격하여 소각시킨 후 倉穀을 탈취하고 남은 것은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장성 舞童村에 이르러 적을 만나 격전을 벌여서 적 5, 6명을 살상했으나, 아군도 흩어졌다. 이 때의 전투양상은 소단위의 유격전이었다. 특히 김준의 유격전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날씨가 점차 추워지자 도망병이 생겨났다.

다시 흩어진 군사들에게 연락하여 동짓날에 영광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기밀이 누설되었으며, 추위로 병든 군사들이 많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犀牛山 속에서 군사를 휴식시킨 후, 나주의 古幕院을 공략하려다가 중도에서 군대를 철수하였다.

기삼연은 의진을 이끌고 담양 金城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험준한 곳이었으므로 이 곳에서 설을 지낼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밤에 큰 비가 내려 노숙하는 사졸들의 옷이 젖어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있을 때, 수비의 허술함을 틈타 적이 불의에 내습 공격하였다.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결국 완전 포위당하여 피아간에 사상자가 40∼50명이나 발생한 격전을 치렀다. 기삼연이 최후를 각오하고 있을 때, 요행히 갑자기 안개가 깔려 의진을 이끌고 북문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곳을 탈출한 그는 순창 福興山으로 들어갔다. 부상으로 의병활동의 한계를 느낀 기삼연은 장졸들에게 각자 집으로 돌아가 설을 쇠고 정월 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하자며 해산명령을 내렸다.

기삼연이 九水洞 촌가에 잠복하여 설을 쇠면서 정월 초하룻날 아침 설상을 받았을 때, 갑자기 들이닥친 적 수십 명에 의해서 체포되어 담양으로 압송되고 말았다. 담양에서 다시 광주로 압송되어 수감된 기삼연은 자신의 참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있다.

출사하여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出師未捷身先死)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이던가(呑日曾年夢亦虛)

이 시로 미루어 보아 그는 자신의 의병활동이 끝내 성공하여 일인들을 한반도 밖으로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확신이 꺾였을 때, 그의 비통한 심회를 담담하게 노래하고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이 때 마침 선봉장 김준은 창평에서 일군 토벌대장 요시다(吉田)를 죽이고 그 잔졸들을 추격하다가 기삼연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병 30명을 이끌고 탈환전을 벌였으나 이미 기삼연은 경무서에 수감된 뒤였다. 요시다 이하 다수의 일병이 사상한 것에 대한 복수로 일인들은 기삼연을 무수히 난자하였으며, 기삼연은 결국 이튿날인 1908년 1월 2일 광주시 西川橋 밑 백사장에서 적의 흉탄에 쓰러져 순국하였다.

나) 김태원

전남 나주군 文平面 渴馬里에서 태어난 金泰元(1870∼1908)은 어려서부터 지략이 웅대하였으며 벼슬은 順陵參奉에 그쳤으나 국운이 기울자 국사에 부심하였다. 을미왜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金河洛·趙性學·具然英·申龍熙 등과 합세하여 누구보다도 먼저 의진을 조직하여 利川·楊根·砥平·廣州·安城·陰竹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1896년 2월 말경에는 일시 제천의진과 합세하여 적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국정이 일제에 의해 전횡되자 김태원은 아우 金律과 함께 1907년 7월 호남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 해 9월에는 기삼연이 장성에서 거의하였다는 말을 듣고 일가인 金燉과 의논하여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여 ‘湖南倡義會盟所’의 선봉장이 되었다. 9월 9일에는 고창의 일군을 무찔렀으며, 의진의 전세를 확장할 목적으로 김태원은 기삼연과 영역을 달리하여 활약할 것을 결의하였다. 1907년 10월 4일에는 申德淳과 정읍 내장사에서 만나서 창의하는 일을 의논하고 서로 합세하기로 하였다.

이 때 의병이 이미 수백 명이 되었으므로 광주의 일본군영을 무찌르고 목포를 깨뜨릴 계획을 세워 광주로 격문을 띄웠다. 그리고 군사를 거느리고 순창 回文山으로 들어가 무기를 감추어 두었던 곳을 찾아갔으나 이미 적에게 빼앗긴 뒤였다. 다시 회문산으로 회군하였을 때 적군의 내침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는 밤길 1백여 리나 걸어온 군사들이 모두 휴식하고 있을 때였다. 이 전투에서 都督의 임무를 맡고 있던 신덕순이 체포되어 정읍으로 압송되고 의진은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김태원은 다시 의진을 규합하여 12월 나주·함평·장성·무안 등지를 신출귀몰하듯 휩쓸어 함평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인 순사를 사살하고, 수차례 토벌대와 접전하고 이어서 그 지휘자 川端曺長과 부하를 사살하는 등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지만, 의진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 즈음 체포당한 부하들의 재판기록을 보면, 김태원의 활약상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나주에서 미곡상을 하던 당시 34세의 趙正仁은 수백 명과 함께 4백여 정의 총기를 휴대하고 나주·함평·장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한 혐의로 1908년 6월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또 한 사람의 부하인 18세의 沈守根은 조정인의 명을 받아 나주 佳山에서 탄환 제조하는 현장을 경비하다가 4월에 체포되어 조정인과 함께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무안군 金洞面 玉洞에서 살던 尹元擧는 12월 14∼15일경 김태원과 그의 부하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때 李應文으로부터 돈 23관을 기탁받았다고 하는데 물론 이 돈은 김태원의 거사 자금의 일부였다.

1907년 12월 이후 기삼연과 합진하여 영광에 있는 적의 소굴을 소탕하고자 먼저 법성포에 불을 질러 공격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이것은 11월 25일 참모장 金翼中과 李南奎가 전사한 것에 대한 보복전이었다. 다시 그는 광주·나주로 옮기고 기삼연은 장성으로 돌아갔다. 이 때 동생 金律의 의진은 沙湖에 있었는데, 김율이 본래 기삼연의 문인으로서 博士라 칭해졌으므로 그의 진을 박사진이라 일컬었다. 때마침 김율의 진이 적의 공격을 받아 흩어졌으므로 선봉장 曺京煥, 도포장 崔東鶴과 상의하여 의진을 동복·창평 등지로 옮겼다.

창평의 芝谷에 도착하여 하루를 머물고 舞童村으로 진군한 것이 1908년 1월 1일이었다. 이 날은 순창 九水洞에 은신하고 있던 기삼연이 체포된 날이기도 하였다. 한편 김태원은 적장 요시다가 이끄는 기마병에 쫓기게 되었다. 요시다는 10척 장신으로 용력이 뛰어났으나 접전 끝에 사살되었다. 그러나 김태원도 부하 姜吉煥·趙德寬이 전사당하는 등 형세가 심히 위급하였는데 다행히 김율의 군사가 협공하여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 전투에 李雲善이 참여하였는데, 김태원이 전사할 때까지 함께 활약하게 된다. 그 뒤 그는 다시 조경환의 부하가 되어 활약하였으며 1909년에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李敏英 역시 그의 부하로서 5년형을 받았다. 그 후 김태원의 의진은 장평 月平에 머물렀다.

김태원은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기삼연의 사후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맹렬하게 적과 싸워 용명을 떨쳤다. 세력 확대를 위하여 李大克과 결탁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부터 김태원은 스스로 대장이라 칭하였고 군도를 차고 쌍안경을 가지고 다녔다. 동작이 기민하여 신출귀몰하였으므로 당시 일인들의 주목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동료 의병들간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1908년 3월 21일 장성군 廣谷에서 부하 약 80명을 이끌고 잠복 활동하다가 토벌대의 포위 공격을 받고 암굴에 은거하였다가 밤을 타서 탈출하였으며, 그 후 10여 차례 적의 공격을 받았다. 다시 나주 博山村에 은신하여 지병을 치료하다가 적에게 발각되었는데 김태원의 지병이 너무 악화되어 대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4월 25일 漁等山에서 2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적에게 사살당하여 순국하였다.

김태원은 일찍이 의병을 일으켜 적병 수백을 살상하였으나, “兵은 精銳가 중요한 것이지 숫자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역설하여 늘상 거느린 부하는 30∼4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의병활동에서 정예주의를 지켜 부하 훈련에 치밀하였기 때문에 김태원의 부하였던 사람들이 그의 사후, 각기 의병장이 되어 각지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한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김태원의 부하로 유명한 의병장은 曺京煥과 全海山 그리고 吳聖述 등이 있다.

다) 김영백

전남 장성군 北二面 達城里 출신인 金永伯(1880∼1910)은 정미조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한국군마저 해산당하여 일제침략이 노골화되어 가자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1907년 10월 장성군 북이면에서 곤봉을 들고 동지 약 1천 명을 규합하여 부하를 삼고 스스로 대장이 되었다. 선봉·중군·후군장·좌우익장·군량관 등의 부서를 두고 부대를 편성하였으며, 총 2백 정을 준비하였다. 한편으로 자금·탄약·식량·피복 등을 군민들로부터 징발하여 군비를 갖추었다.

그 후 장성을 중심으로 광주·고부·정읍·태인·부안·흥덕·고창·순창 등의 각 고을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1908년 3월 4일 정읍 丹谷里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수비대 보병과 격전을 벌였다. 9월 21일 方丈山 산록 白溪洞에서 일본수비대의 기병과 헌병 및 순사대와 교전하였다. 10월 상순에는 정읍군 鰲峴에서 헌병과 교전하였다.

1909년 1월 말경 동군 북이면 上谷里에서 수비대 기병과 교전을 벌였고, 2월 중순에는 동군 북일면 東山里, 2월 말에는 흥덕군 細谷里에서 교전하였으며, 4월 11일에는 동군 一東面 九水橋, 4월 중순에는 고부군 江古里, 4월 말에는 흥덕군 一南面 鍮店里에서 각각 일헌병과 교전하고 상호간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마침내 그는 12월 적에게 노출되어 하는 수 없이 일헌병대 고부 분견소에 자수하고 말았지만 12월 20일 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몇 차례의 항소 끝에 마침내 교수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이같이 그의 활약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 하였지만, 진중 일기류를 남기지 않아 일본측 자료 밖에 남아 있지 않는 것이 유감이다. 또한 신분상의 차이 때문인지 양반 출신인 전해산과는 가까운 지역에서 활약하였으면서도 연합전선을 전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해산은≪全海山陣中日記≫에서 그를 다소 무시하는 듯한 의중을 내비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라) 심남일

전남 咸平郡 月也面 새터에서 출생한 沈南一(1871∼1910)은 일찍이 학문을 닦아 四書三經에 능통하였으며 향리에서 鄕校掌議와 道議事 등을 역임하고 서당의 훈장도 지낸 바 있는 향반이었다.

러일전쟁 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통분을 금할 길이 없어 거의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의병장 김태원의 아우 金律의 부장이 되어 장성·영광·함평·남원·보성·영암·장흥 등지에서 투쟁을 벌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김율이 전사하자 스스로 대장이 되어 군율을 엄히 하고 진용을 재정비하였다. 이 때 그의 예하 장병들과 그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先鋒將 姜武景 林萬善 張仁甫 中軍將 安贊在 朴士化 後軍將 盧炳友 羅聖化 崔友平 金聖載 都統將 金道淑 統 將 柳致先 孔盡淑 軍糧將 李世昌 護軍將 姜達周 鄭官午 旗軍將 張文然 李德三 都 砲 張京先 金判玉 宣道明 募 事 權澤 鄭榮兌 書記 겸 募事 廉元淑

그리고 향리에서 도학으로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규율을 엄히 하고 민폐를 적게 하기 위하여 민가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부녀자를 겁간하거나, 가축을 희생시키는 일 등에 대하여 엄히 처단할 것을 공포하였다.

1907년 11월 1일 함평군 新光面에서 기치를 올려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 13일 南平으로 행군하면서 적과의 접전을 감행하였다. 그의 첫 접전은 3월 7일 강진면 吾治洞에서 있었다. 적병 수백 명을 맞아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의 장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수십 명을 살상하고 무기를 다수 노획하여 의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이어서 4월 15일 장흥 藿岩에서 적 3명을 사살하고, 6월 19일 남평 長淡院 전투에서 적 5명을 베고, 6월 25일 능주 老狗頭에서 적 5명을 사살하고 말 2필과 무기를 노획하였다. 7월 30일에는 영암 沙村 전투에서 적 10여 명을 죽이고, 8월 1일 나주 盤峙에서, 9월 20일 장흥 新豊에서, 10월 9일 해남 城內에서, 10월 27일 능주 石亭 등지에서 모두 백여 명을 살상하였다.

이와 같이 전투에서 큰 성과를 올렸으나 불행하게도 심남일과 선봉장 강무경이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봄까지 접전일기에 기록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기간 동안 추위와 병고로 인하여 은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909년 3월 다시 격렬한 교전을 재개하였다. 3월 8일 대장서리 姜鉉秀·朴奉柱가 나주 月橋里에 유진하였다가 밤에 남평 雲三洞에 집합하여 船洞으로 옮기는데, 探馬隊로부터 적이 내습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는 미리 의병을 요소요소에 매복시켰다가 적 5명을 사살하자 적은 榮山浦로 달아났다. 이에 보다 적극적인 전투를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한편으로 영산포의 적을 격동시키면서 인근의 의병부대에 통기하여 연합작전을 꾀하였다.

이 때 전북의 全垂鏞·李大局·吳仁洙, 전남의 安圭洪·金如會·柳春信 등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중에 특히 안규홍과는 끝까지 유기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전군을 5부대로 나누어서 동쪽 大峙·大巷峯·月任峙·德龍山 꼭대기·屛岩峙에 각기 매복시켜서 적의 내습에 대비하였다. 다음날 새벽부터 능주·광주·나주·남평·영암으로부터 내습해 온 적병과 접전하여 적 70여 명을 사로잡고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아군의 희생도 적지 않았으며 본진의 총독 朴基春·좌익장 朴汝洪·우익장 朴泰煥이 전사하였다.

3월 11일 계속하여 적의 내침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여 능주 風峙의 좌우에 잠복하고 대기하고 있는데, 이웃 12고을의 적병 4백여 명의 포위 공격을 받아 백여 명을 죽였는데도 적병이 물러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징을 쳐서 전병을 불러들여 杜門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4월 2일에는 장흥 牛山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 곳은 능주 헌병이 매달 5차례씩 20여 명이 장흥을 통과하는 곳이었다. 이 날 강현수가 의병 20명을 거느리고 매복하고 있다가 포를 터뜨려 적 8명을 사살하자 나머지는 모두 달아났다. 그리하여 대포 2문과 다수의 무기를 포획할 수 있었다.

5월 12일 보성 泉洞에 주둔하고 보성의 창의장 안규홍과 石虎山에서 만나 연합작전을 계획하였다. 작전 수행을 위해 중군장 安贊在와 통장 김도숙에게 군량을 백리 밖에서 운반해 오도록 하고, 후군장 김성재와 호군장 강달주에게 군사들을 잘 먹이게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보성의 왜장이 산상에 올린 의병의 깃발을 보고 50명 군사를 거느리고 내침해 오자 이들과 격전하여 적 5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안규홍과 장래의 전략을 기획할 때, 이세찬이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정한 이치이니 남북도의 의병이 합세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모두 그 말을 옳게 여겨 각지의 의병부대와 연락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가던 중 의병을 해산하라는 황제의 조칙이 내려지게 되었다. 협박에 못이겨 내려진 조칙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1909년 7월 21일 영암군 金磨面 古引洞에서 자진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병을 해산한 후, 그는 강무경과 함께 능주로 잠행하여 前의 전투지였던 풍치의 바위굴 안에서 신병을 치료하던 중 8월 9일 이를 탐지한 일군에게 체포되었다. 9월 2일 광주로 이송되었다가 12월 15일에 대구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두 곳의 감옥에서 ‘10월 20일 광주 담판’과 ‘12월 15일 담판’, 그리고 ‘대구 담판’ 등의 글을 남겨 놓고 있다. 그는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불의를 질책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고국산천에 그의 丹心을 터뜨리는 시를 읊으면서 1910년 7월 23일 대구감옥에서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마) 안규홍

전남 보성군 鳥城面 德山里에서 태어난 安圭洪(1879∼1911)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으며 가세가 빈한하여 남의 담살이(머슴)로 모친을 극진히 봉양한 효자였다.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구국의 함성이 높아가자 거의할 목적으로 一心契를 조직하였다. 한편 주인에게 某日에 논일(벼농사일)을 할터이니 일꾼들을 대접할 준비를 해달라고 알린 후에 은밀히 담살이 동지 수십 명을 규합하였다. 거사일이 되어 동지를 모으고 주인에게 몰려가 국사를 도모하려고 하나 우리에게 재물이 없으니 군사 물자를 조달해 줄 것을 강청하여 군량과 자금을 받아냈다. 그리고 일찍이 은밀하게 밀약받았던 동리의 참봉 安極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같이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 1908년 2월 관북 출신 姜性仁이 무장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와 합세하여 병력이 7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을 보성 桐巢山에서 훈련을 시켰는데, 강성인은 본래 성격이 난폭하고 잔악하여 민폐가 컸다. 그가 다스리고자 하나 고쳐지지 않자 하는 수 없이 강성인을 포박하여 죄상을 밝힌 후 참형에 처하였다. 이로써 군기는 바로 잡히게 되었다. 그 후 농군을 소모하여 대오를 정비한 후, 안규홍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는데 그 편제는 다음과 같다.

大 將 安圭洪 副 將 廉在輔 參謀將 宋基休 先鋒將 李貫會 左右翼將 鄭寄贊 張載模 宋敬會 孫德浩 遊擊將 安宅換 蘇輝千 參 謀 吳周一 羅昌運 書 記 任淨鉉 軍需將 朴濟鉉

그는 비록 배우지 못하여 문자를 몰랐으나 천성이 뛰어나고 결백하며 과감하였기 때문에 많은 농민군이 그를 따랐다.

한편 안규홍 의진이 보성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병들이 보성군 鳥城, 筏橋, 順天을 연결하는 토벌진을 구성하여 포위 섬멸전을 전개하려 하였다. 그는 평소 樵路地理(나무꾼이 다니는 길)에 밝은지라 일군에 대한 기습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1908년 2월 적이 定時에 출동하여 수색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미리 보성 동쪽 8㎞ 떨어진 巴靑의 험한 지점에 복병을 마련해 두었다. 마침 일대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미도(永戶)·히라이(平井)의 두 부대가 골짜기로 들어왔을 때, 복병들이 총탄을 퍼부었다. 적병 부대장들이 쓰러지고 전군이 궤멸하여 의병 부대는 많은 전리품을 노획한 후, 다시 大院山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巴靑大捷이다.

이후 일군은 그의 부대를 의병 부대 중 최강의 부대로 지목하게 되었다. 파청대첩 후, 적의 신예부대는 보복전을 펼쳐 대원산 사찰을 포위하고 필사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의병은 사찰 문루와 장벽에 의지하여 분전한 끝에 여유있게 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同福을 탈환하기 위해 雲月峙로 진군하다가 棲鳳山에서 적과 부딪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특히 참모 나창운이 전사하는 등의 손실을 보았다. 이에 장경선을 참모로 임명하고 병력을 증강한 후 1908년 8월 24일 眞山에서 일군 수비대 및 기병과 격전을 벌여 일군 5명을 중상시키는 등 대첩을 거두었다. 이 전투가 眞山大捷이다.

그 후 그의 의병진은 화약과 군량을 준비하여 공격태세를 갖추어 1909년 3월 25일 圓鳳의 적병을 기습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 때 그는 소병력을 한산한 곳으로 보내어 약탈을 가장하는 등 적의 눈을 속이고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원봉 기병 주둔소를 야습하는 작전을 썼다. 일군 와타나베(渡邊)少將은 의병 토벌부대를 격려하러 왔다가 말을 타고 도주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다량의 무기와 화약·군량을 획득하였으므로 의병진을 재편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가 이끄는 의진은 다시 순천으로 이동하여 일군 대부대를 습격하였다. 처음에는 큰 전과를 거두었으나, 안택환·임정현 등이 전사하였다. 이어 송기휴를 유격장으로 임명하고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일병 증원부대가 도착하여 포위당하게 되었다. 그는 의병을 상인과 농민 등으로 가장시켜서 포위망을 탈출하여 바닷가에 결집시켰다. 다시 밤에 배를 타고 고흥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의병의 수는 줄고 무기도 빈약하여져서 정면 공격을 감행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이에 작전을 바꿔 유격·기습작전으로 성과를 거두며 전전하다가 송기휴가 전사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거점을 장흥 白沙로 옮겨 전세가 불리하게 된 원인을 규명하였다. 모든 것이 일진회의 밀고 때문인 것이 밝혀지자 그들을 색출하여 시장에서 공개로 총살시켰다. 그리고 일인 첩보대장을 사살하고 8월에는 270명의 의병을 총동원시켜 순천군 洛西面 上右里 소재 일진회를 습격하여 친일 주구들을 처단하고 9월 25일 3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광양의 白雲山으로 들어가 근거지로 삼았다. 1909년 5월 이후, 함평의 심남일과 연합전선을 꾀하고자 수 차례의 회합을 갖기도 하였다.

그리고 보성·순천·흥양·여수·돌산·광양·곡성·남원·구례·장흥·순창 등지에서 게릴라 활동을 재개하였다. 적은 토미이시(富石)대위를 중심으로 토벌대를 구성하는 한편 의병의 가족들을 동원시켜 각종의 귀순공작을 전개하였다. 토벌대의 대병력이 전라도를 북쪽에서부터 포위방을 압축하면서 남쪽으로 몰아 내려왔다. 소위 ‘남한대토벌’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의병을 해산시키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9월 25일 보성군 鳳德面 法化村에서 부하 염재보·정기찬과 함께 토미이시의 부대와 광주경찰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곧 광주에서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1911년 5월 5일 교수형에 처해져 망국의 한을 안고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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