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 의병전쟁의 발전
  • 1) 서울진공작전의 실패와 근거지문제
  • (1) 13도 의병부대의 서울진공작전

(1) 13도 의병부대의 서울진공작전

1907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해산군인을 흡수한 의병전쟁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단계를 맞이하게 된다. 그 활동지역은 일제침략의 거점으로 되어 있는 도시들과 그 도시를 연결하는 철도 및 간선도로를 제외한 광범한 지역을 포괄하게 되었다.

여기서 제기된 새로운 과제는 종래 분산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의병부대간의 연계를 강화하여 일제의 군사 및 경찰력에 대항하는 문제였다. 그 중심부대가 李麟榮이 인솔하는 關東 의병부대였다.

당시 강원도 원주에서 기병한 李求載와 李殷瓚은 경북 문경에 거주하는 이인영을 찾아가 총대장이 되어 주기를 권유했다. 이인영은 부친이 병중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드디어 관동의병대장으로 추대를 받고 원주에서 출진했다.

관동 의병부대는 원주로부터 춘천·양주로 진출하면서 각도 의병장에게 다음과 같은 격문을 띄웠다.

용병의 요체는 고립을 피하고 일치단결하는 데 있다. 각도의 군사를 통일하여 뚝이 무너지는 형세를 타서 近畿지방으로 밀려들면 온 천하를 우리 보물로 하기는 불가능하더라도 한국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리하게 될 것이다(崔海淸,≪大韓每日申報拔萃錄≫, 靑丘大學 出版部, 50쪽).

격문에서 이인영은 각도 의병장에게 서울을 둘러싼 경기지방으로 진출하기를 호소하였다. 동시에 그는 金世榮을 서울에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에 의병부대는 애국단체이니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는 여러 나라들이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하고 성원해주기를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다음과 같은 대한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의 이름으로 해외동포에게 보내는 격문(Manifest to all Coreans in all parts of the world)을 발표했다.1256)≪日本外交文書≫제41권 제1책에 수록되어 있는 샌프란시스코 주재 小池 총영사가 본국 정부 林외무대신에 보낸 전보 속에 1907년(광무 11) 9월 25일자의 大韓關東倡義大將 李麟榮의 명의로 된 격문(영문)이 들어 있다.

동포들이여. 우리들은 단결하여 우리 조국을 위해 몸 바쳐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전세계를 향하여 야만적인 일본인의 혹심한 부정과 난폭함을 호소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교활하고 또 잔인하며 진보와 인도의 적이다. 우리들은 모든 일본인과 그 스파이 앞잡이 및 야만의 군대를 쳐부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하여야 한다.

보는 바와 같이 대한관동의병장의 이름으로 발표한 각국 영사관 및 해외 동포에 대한 호소문은 당당한 항일전쟁선언이라 하겠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에 의하여 한국의 외교권은 박탈당했다. 따라서 13도 의병부대의 서울 진공작전은 국제적인 고립 속에서 진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경기도 양주의 大陣所에는 각지에서 분산적인 활동을 지속해 온 약 1만 명의 의병부대가 집결했으며 그 중에는 양총을 소지한 약 3천 명의 해산 군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이인영을 중심으로 각 지방 의병장들이 협의하여 13도 창의대진소가 다음과 같이 편성되었다.

十三道義兵總大將 李麟榮 軍師長      許 蔿 關東倡義大將   閔肯鎬 湖西倡義大將   李康秊 嶠南倡義大將   朴正斌 鎭東倡義大將   權重熙 關西倡義大將   方仁寬 關北倡義大將   鄭鳳俊 湖南倡義大將   文泰洙(본명 泰鉉)

양주에 집결한 의병수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약 1만 명이나, 그 주력부대는 강원도 원주지방으로부터 민긍호·이구재·이은찬이 인솔한 6,000명이다. 먼 거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부대들은 극히 그 일부분이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각 지역을 대표하는 창의대장이 반드시 그 지역을 대표하는 의병장은 아니다. 따라서 13도 창의대진소라 되어 있지만 그 실질적 내용은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관동 의병부대에 각도 대표가 참가한 정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여간 13도 창의부대는 서울을 향하여 진격을 시작했다. 1908년 정월에 군사장 허위는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의 지점까지 접근했으며 후속 부대들이 그 뒤를 따랐다.1257)宋相燾,≪騎驢隨筆≫(국사편찬위원회, 1955)의<李麟榮>에는 선발대를 지휘한 것이 이인영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大韓每日申報≫, 1909년 9월 21일,<義兵總大將 李麟榮의 略史>에는 3백 명의 선발대를 軍師長이 지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총대장이 선발대를 지휘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후자의 기사를 취하기로 한다.

물론 이와 같은 대대적인 작전이 비밀리에 진행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일본군에서는 이미 그 동향을 탐지하고 선발대에 대한 선제공격에 나섰다. 선발대는 후속부대와의 연락이 단절되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발대가 후퇴한 후에 진공과 후퇴를 배합한 제2차, 제3차의 작전계획은 없었다. 서울 진공을 계획한 유학자들의 정신은 고귀하나 대부대를 일사불란하게 통솔해서 그 작전을 승리로 이끌만한 병법가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총대장 이인영이 전열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즉 고향에서 병중에 있던 부친의 부고가 전달된 것이다. 그가 전열에서 떠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라에 불충함이 부모에게 불효함이 되며, 부모에게 불효함이 나라에 불충함이 된다. 그 道는 하나이며 둘이 아니다. 고로 나는 차라리 나라 풍속에 따라 3년상을 입어 효도를 다한 후에 재기하겠노라.

유교사상으로 본다면 부자관계에서의 효는 ‘天合’이고, 군신관계에서의 충은 ‘義合’이다. 효는 ‘천합’이기 때문에 끊을 수 없지만 충은 ‘의합’이기 때문에 ‘의’에 맞지 않으면 군신관계에서 물러설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효를 우선시킨 이인영은 훌륭한 유학자라 하겠다.

그런데 13도 의병총대장이란 그의 공적인 입장은 어떻게 되겠는가. 유교사상은 사와 공, 효와 충, 왕조와 국가가 연결되어 있어서 분리할 수 없는 사상체계이다.

여기에 항일의병전쟁의 지도사상으로서의 유교사상의 한계가 보인다. 의병장이 지역적 혹은 전국적인 명성만을 가지고 의병장이 되는 한, 또는 의병장 자신이 그러한 유교사상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항일의병전쟁을 국민적인 저항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따라서 1907년 12월의 서울진공작전은 종래의 의병전쟁의 최고 정점을 보여주는 반면에 그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극복해야 하겠는가라는 무겁고도 큰 사상적 과제를 노출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부친의 3년상을 위하여 고향에 돌아간 이인영은 노모와 두 아들을 거느리고 충청도 黃澗에 이주하여 은신 중 1909년 6월에 대전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당당히 자기 소신을 토로하고 일제의 침략을 규탄함에 있어서 하나도 굴하는 빛이 없었다. 일제의 관헌도 그를 ‘義士’로서 대우하지 않을 수 없었다.1258)宋相燾,≪騎驢隨筆≫, 李麟榮. 그 해 9월 20일에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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