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 의병전쟁의 발전
  • 2) 의병전쟁의 새로운 앙양과 평민 의병장들
  • (1) 스티븐스의 저격과 의병전쟁

(1) 스티븐스의 저격과 의병전쟁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후 의병전쟁의 추세는 일시 수세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 중에 1908년 3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가까운 오클랜드역에서 張仁煥·田明雲 의사가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스티븐스는 1904년 8월의 제1차 한일조약에 의하여 일본 정부가 추천한 한국 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친일반한적인 미국인이다. 그 배후에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지원하고 전쟁의 결과 일본에 의한 한국의 보호국화에 찬동한 미국 정부의 극동정책이 있다.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이 의병전쟁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일제 문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3월 하순에 전 한국 정부 고문 겸 통감부 촉탁이었던 스티븐스가 미국에서 排日主義者인 한인에게 살해되었다. 그 소식이 한국내에 전해지자 이것이 동기가 되어서 형세가 일변하고 賑勢가 또다시 격증되어 폭도봉기 이후 미증유의 熾盛을 이루어 그 소요 구역이 확대되었다(朝鮮駐箚軍司令部編,≪朝鮮暴徒討伐誌≫, 97∼98쪽).

그 결과 1908년 6월에는 전국의 의병장수가 241명, 의병수가 32,415명에 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241명의 의병장은 종래와 다른 성격의 의병장이라 하겠다. 즉 종래와 같이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유학자와 白面書生인 문인들이 의병부대의 지도부를 구성한 것과는 달리, 그 지명도가 좁은 지역에서 알려질 정도의 무명인사가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의병부대의 규모는 의병장의 지명도에 따라 규정된다. 많은 무명의병장이 등장하게 된 결과 의병부대의 규모가 적어진 대신, 의병활동의 기동성이 민활하게 되고 게릴라전에 의하여 적들에 대한 교란작전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다음 통계는 1908년을 전후한 시기의 의병전쟁의 추세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연 도 전 투 횟 수 참 가 의 병 수
1907
1908
1909
1910
1911
323회
1,452 
898 
147 
33 
44,116명
69,832 
25,763 
1,891 
216 

<표 1>반일의병투쟁의 상황

1907년은 8∼12월간의 집계.
 1911년은 1∼6월간의 집계.
 전거는≪朝鮮暴徒討伐誌≫附集 제3표에서 작성.

도 별 전 쟁 횟 수 참 가 의 병 수
1908(후반기) 1909(전반기) 1908(후반기) 1909(전반기)
경 기
강 원
황 해
충 북
충 남
전 북
전 남
경 북
경 남
평 남
평 북
함 남
함 북
합 계
78회
273 
232 
113 
217 
219 
274 
153 
158 
108 
41 
99 
11 
1,976 
(4.0%)
(1.38)
(11.7)
(5.7)
(11.0)
(11.1)
(13.9)
(7.7)
(7.9)
(5.5)
(2.1)
(5.0)
(0.6)
(100)
165회
124 
111 
66 
138 
273 
547 
61 
161 
61 
17 
14 

1,738 
(9.5%)
(7.2)
(6.4)
(3.8)
(7.9)
(15.8)
(31.5)
(3.6)
(9.3)
(3.6)
(0.5)
(0.9)

(100)
1,453명
18,599 
7,998 
6,815 
7,666 
9,960 
10,544 
3,328 
5,702 
1,391 
2,590 
6,438 
283 
82,767 
(1.8%)
(22.5)
(9.7)
(8.0)
(9.0)
(12.0)
(12.7)
(4.0)
(6.9)
(1.7)
(3.1)
(7.8)
(0.3)
(100)
3,453명
2,468 
2,148 
832 
1,003 
5,576 
17,579 
934 
3,667 
540 
123 
270 

38,593 
(9.0%)
(6.4)
(5.5)
(2.2)
(2.5)
(14.5)
(45.6)
(2.4)
(9.5)
(1.4)
(0.3)
(0.7)

(100)

<표 2>1908∼1909년의 각 지방별 의병투쟁상황

전거는≪韓國獨立運動史≫1, 295∼296쪽의 표에 의함. 이 표는 韓國政府內部警務局의 조사통계로 경찰대가 관여한 전투횟수 및 의병수를 나타낸 것.
 姜在彦,≪韓國近代史硏究≫(한울, 1982), 324쪽.

<표 1>에서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은 1908년이 의병전쟁의 최고조기라는 점이다.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1909년부터 의병전쟁이 점차 곤란하게 되어 하향선을 걷게 되는데<표 2>가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1909년 전반기로부터 전투횟수나 참가 의병수에 있어서 전라남도 및 전라북도가 타 지방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는 관련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그러면 장인환·전명운의사는 왜 스티븐스를 저격했는가. 스티븐스는 1908년 3월에 임시휴가를 얻어 미국에 귀국하게 되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이 자는 기자회견석상에서 일제의 침략정책을 극구 찬양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를 말하고 있다.

① 일본은 한국을 보호한 이후 유익한 일을 많이 했다. 그리하여 양국 국민의 교제는 점점 친밀해지고 있다.

②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는 방법은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는 것과 같다.

③ 조선에 신정부(일제의 괴뢰정부)가 조직된 이후 여기에 끼지 못한 정치인들은 일본에 반대하고 있지만 농민이나 일반 민중은 전과 같이 정부의 학대를 받지 않으므로 모두 일본인을 환영하고 있다(鄭喬,≪大韓季年史≫권 9, 융희 2년).

이 담화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자 현지 한국거류민의 자치단체인 公立協會(1905년 4월에 결성)는 회의를 소집하여 그의 진짜 의도를 알기 위하여 담판하기로 결정하고, 공립협회 總代인 崔有涉을 비롯하여 鄭在寬·文讓穆·李學鉉 등 4명을 대표단으로 선출했다.

스티븐스는 공립협회 대표단의 항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버티고 있다.

한국에 이완용과 같은 충신이 있고 伊藤博文이 있는 것은 한국과 동양의 행복이다. 내가 한국 정황을 보니 太皇帝(왕위를 박탈당한 고종)의 실덕이 심하고, 완고한 수구당은 백성의 재산을 수탈하고, 민중은 우매하여 독립의 자격이 없다. 말하자면 일본이 탈취하지 않았다면 이미 러시아에게 병합되었을 것이다. 내가 일본의 정책을 찬양한다고 신문에 게재한 내용은 사실이다(鄭喬,≪大韓季年史≫ 권 9, 융희 2년).

이에 분개한 두 의사가 워싱턴으로 가는 그를 오클랜드역에서 대기하다가 저격한 것이다. 그에게 명중한 권총탄은 장인환의 것이었다. 장인환은 25년, 전명운은 95개월의 형을 언도받았다.

당시 공립협회의 기관지≪공립신보≫는<奸賊 須知分 砲擊顚末>이란 표제로 두 의사의 의거를 자세히 보도했으며 한국내서는≪大韓每日新報≫가≪공립신보≫의 기사를 그대로 전재하여 국내에서 알게 하였다. 동시에 두 의사에 대한 재판을 독립재판이라 하고 그 승리를 위하여 투쟁할 것을 호소했다.

당시 스티븐스 저격사건의 영향이 한국내에서 파급되는 것을 일본 정부가 얼마나 두려워했는가에 대해서는≪대한매일신보≫사장 베델(E. T. Bethell)을 한국에서 추방하기 위하여 영국 정부에 외교교섭을 벌이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1262)필자는 영국 정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외교교섭과 한국에서의 베델재판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였다(姜在彦,<국권회복을 위한 언론과 그 수난>, 앞의 책).

스티븐스 저격 후의 의병전쟁의 확대에 대처하기 위하여 일본 정부는 같은 해 5월에 종래의 일본군 1개 사단, 1개 여단, 기마병 파견대(4개 중대), 2,000여 명의 헌병대에 추가하여, 2개 연대의 군대를 증파함과 동시에 일진회원을 중심으로 헌병대 보조원 4천 명을 모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의병전쟁에 대한 탄압 무력인 일본군, 헌병, 경찰에 대한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韓國駐箚軍司令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중심으로 헌병대 사령관 아카시 겐지로(明石元二郞), 이완용 정부 內部 경찰국장 마츠이 시게루(松井茂)로 수뇌부를 구성하였다.

또한 각 지방에 대한 헌병과 경찰의 포치망을 더욱 조밀히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1908년 현재로 헌병의 경우에는 51管區, 452分遣所, 13파출소에 2,374명의 헌병과 4,234명의 헌병보조원을 배치하고 있다. 경찰의 경우에는 70경찰서, 3分署, 339주재소에 4,960명을 배치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의 대부대에 의한 기동작전권과 배합하여 각 지방의 헌병·경찰에 의한 주류거점을 조밀히 포치함과 동시에 지휘부와 주류거점 및 주류거점 상호간을 연결하는 도로망과 통신망을 건설하기 위하여 포로가 된 의병들과 지역주민들을 강제동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완용 괴뢰정권은 1908년 9월에 內部訓令으로<자위단규칙>을 발표하여 의병부대의 탄압에 한국인을 동원하여 자위단을 조직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헌병과 경찰이 통제하는 자위단은 호구조사에 관한 일, 개인이 소유하는 무기의 수거에 관한 일, 경제에 관한 일, 적정을 탐지하여 관헌에 보고하는 일 등을 담당케 하였다. 물론 헌병보조원이나 자위단원은 한국말을 잘하고 지형과 민정에 익숙하였다. 즉 종래의 의병 대 일본군경간의 대립관계를 ‘以韓制韓’ 정책에 의하여 한국인간의 적대관계로 전환시키자는 조치이다.

일제는 이와 같은 ‘이한제한’ 정책에 의한 한국인 내부의 분열을 이용하여 의병과 군중과의 연계를 단절시키고, 군중 속에 숨어 있는 의병과 그 중심 인물을 내탐하여 체포하는 데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따라서 의병전쟁의 전기간을 통하여 1908년은 의병부대들이 가장 위세를 떨친 반면에 1909년부터 하향선을 걷게 되는 고비가 되었다. 의병전쟁은 더욱 간고하게 되었고, 의병활동지역의 주변 마을에 대한 초토화작전에 의하여 일반 군중의 피해도 가속도로 증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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