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 의병전쟁의 발전
  • 2) 의병전쟁의 새로운 앙양과 평민 의병장들
  • (3) 한국합방안의 결정과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

(3) 한국합방안의 결정과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

종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일본에 의한 ‘보호정치’의 목적이 ‘한국의 자치’를 증진시키는데 있다고 공언하여 왔다. 이렇게 공언해 온 이토 히로부미의 진의가 어디 있었던간에 일본 지배층 내부에서도 ‘합방’을 주저하는 듯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반발이 있었고, 또한 일진회도 이에 반발하여 일본정계에 대하여 통감의 교체를 요구한 바도 있었다.

그런데 1909년 4월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수상 가츠라 타로(桂太郞), 외무상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와의 3거두 회의에서<한국합방에 관한 건>을 비밀리에 결정하고, 7월 4일에는 각의 결정해서 천왕의 勅裁를 받았다. 바꾸어 말한다면 대한정책을 공식적으로 ‘보호’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합방에로 전환시킨 것을 의미한다.

<한국합방에 관한 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합방을 단행할 것.

② 합방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는 합방의 방침에 의거하여 충분히 보호의 실권을 거두어 실력의 부식을 도모할 것.

 (日本外務省,≪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상, 215∼216쪽).

동시에 합방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의 구체적인 방안으로<對韓施設大綱>을 결정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帝國 정부는 이미 정한 방침에 따라 한국의 방어 및 질서를 담당하고, 이를 위하여 필요한 군대를 한국에 주둔시키며, 또한 가능한 한 다수의 헌병 및 경찰관을 한국에 증파하여 충분히 질서유지의 목적을 달성할 것.

② 한국에 관한 외국교섭사무는 이미 정한 방침에 따라 우리 손에 장악할 것.

③ 한국철도를 帝國鐵道院의 관할로 이양시키고, 동 철도원의 감독하에 남만주철도와의 사이에 밀접한 연락을 취하여 우리의 대륙철도의 통일과 발전을 도모할 것.

④ 되도록 많은 본국인을 한국내에 이주시켜 우리 실력의 근저를 깊게 함과 동시에 일한간의 경제관계를 밀접히 할 것.

⑤ 한국 중앙정부 및 지방관청에 재직하는 본국인 관리의 권한을 확장하고 더욱 민활하게 하여 통일적인 시책의 시행을 기할 것.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4월에 3거두회의에서 ‘합방’의 방침이 결정된 이상 ‘한국의 자치’를 증진시키기 위한 ‘보호정치’를 공언해 온 자기가 통감의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909년 6월 14일에 그는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를 통감으로 승진시키고 자기는 樞密院 의장이 되었다.

일본 정부가 한국의 합방방침을 결정했다 하여 그 실현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 민중이 의병전쟁을 비롯한 여러 가지 형태로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열강과의 이해충돌도 예상되었다.

특히<대한시설대강>의 ③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제는 한국을 발판으로 해서 만주 침략을 노리고 있었다. 당연히 만주에 적지 않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와의 충돌이 예상되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비록 일본에 패전했지만 세계 육군대국으로서의 잠재력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러시아와의 타협이 없이 한국 합방을 강행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제가 한국을 합방하기 직전인 1910년 4월에 러시아 정부의 승인을 받고, 7월 4일에는 그를 성문화한 ‘제2차 러일협약’이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에 러시아 재정대신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을 방문한 목적은 한국과 만주에서의 러일 양국간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데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그를 저격한 것이 바로 이 때였다. 안중근은 의병장의 한 사람이다. 1907년에 연해주로 망명한 그는 金斗星을 총독, 李範允을 대장으로 하는 의병부대의 참모중장이 되었다. 1908년 6월에는 3백 명의 의병부대를 인솔해서 함경북도에 진출했으나 1개월 반에 걸친 전투에서 패배를 당하여, 또다시 연해주로 넘어갔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1대1로 대결한 것이다.

그가 旅順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15개 항목의 범죄사실을 고발하고 의병투쟁은 ‘한국의 독립전쟁’이기 때문에 자기를 암살범이 아니라 국제법상의 전쟁포로로서 취급하라고 요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1264)市川正明,≪安重根と日韓關係史≫(原書房, 1979)에 수록되어 있는 공판기록.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