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 의병전쟁의 발전
  • 3) 호남지방의 의병전쟁과 남한대토벌작전
  • (1) 호남지방의 의병전쟁

(1) 호남지방의 의병전쟁

일본군의 새로운 공세,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은 1909년 9월 1일부터 시작된다. 그에 앞서 호남지방의 의병전쟁에 대하여 개관하기로 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말의 의병전쟁을 선도한 지도사상은 衛正斥邪思想이다. 그 사상의 2대 연원이 경기도의 華西 李恒老(1792∼1868)와 전라남도의 蘆沙 奇正鎭(1798∼1876)이다.

1907년 8월에 한국군이 해산되자, 호남지방에서 의병전쟁의 봉화를 올린 것이 1907년 9월에 전라남도 장성에서 奇三衍이 결성한 ‘湖南倡義會盟所’라 하겠다. 그는 기정진의 從侄이 된다. 따라서 회맹소의 수뇌부 구성은 주로 유생으로 되어 있었다. 수뇌부의 구성원들은 다음과 같다.1265)金義煥,<奇三衍>(≪抗日義兵將列傳≫, 正音社).

大將 奇三衍 統領 金容球 參謀 金燁中·金樹鳳 從事 金翼中·徐錫球·全垂鏞(全海山)·李錫庸·金致坤·朴永健·鄭元淑·成喆修·朴道京 先鋒 金 準(金泰元) 中軍 李哲衡·金奉奎 後軍 李南奎 軍糧 金泰洙 總督 甘孝仁 監器 李永和 左翼 金昌馥 右翼 許景和 砲隊 金基淳

회맹소란 명칭 그대로 여러 의병부대의 연합체이다. 이미 호남지방에서는 을사보호조약 이후 전라북도 순창에서 거의한 최익현의 의병투쟁이 실패한 뒤에 불이 꺼지고 있었으나 회맹소가 깃발을 올린 데 자극을 받아 의병활동이 활기를 회복하게 되었다.

기삼연 자신은 1908년 정월에 체포되어 光州에서 총살되었으나 회맹소의 수뇌부들은 각지에서 의병세력을 온존하면서 그 대열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기삼연이 중심이 된 ‘호남창의회맹소’의 수뇌부는 그 중심이 유생들이다. 그러나 기삼연은 김봉규나 박도경과 같은 평민 의병장들을 대담하게 수뇌부에 등용하여 중책을 맡기고 있다. 그는 1896년의 ‘乙未義兵’ 때에도 역시 전라남도 장성에서 거의를 계획하다가 전주진위대에 체포된 바가 있다.

이 무렵 고종의 宣諭에 의하여 유생의병장들이 의병부대를 해산하자 그는 “선비와는 함께 일을 할 수 없구나”고 한탄하였다 한다.

기삼연이 총살된 후 김용구가 都統領으로서 그 부대를 인솔해서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도 1908년 4월에 일본군과의 격전중에 총상을 입었다. 그 부대를 인계받아 투쟁을 계속한 것이 박도경이다. 기삼연이 체포된 직후인 1908년 2월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① 장성 社倉 부근:약 50∼150명의 집단 1개와 40∼50명의 집단 1∼2개, 의병장 김용구와 김준(김태원).

② 태인∼순창 간:약 50∼60명 내지 10∼20명의 집단이 각처에서 출몰, 의병장 이철형(이진사).

③ 영광∼함평 간:약 50∼60명 내지 20∼30명의 집단 1∼2개, 의병장 김율·조성인

④ 무장:약 20∼30명의 집단 1개, 의병장 불명.

 (洪淳權,≪韓末 湖南地域 義兵運動史硏究≫, 서울대 출판부, 1994, 107쪽).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삼연이 총살된 후에 그 후계자가 된 것이 김용구이다. 그도 부상을 당하여 장성의 白岩山에 은신하게 되었으나 기삼연-김용구의 인맥에 속하는 의병장들이 다음과 같이 각처에서 분산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기삼연 의병부대의 봉기 이후 호남지역에서는 새로운 의병부대들이 여기 저기서 봉기하였다. 이들 새로운 의병부대들이 모두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들 가운데 많은 의병부대들은 기삼연의 연합 의진과 직접·간접으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제측으로부터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던 金泰元·金聿 형제를 비롯하여 金容球·이석용·吳聖述 등은 독립부대를 이끌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기삼연의 참모 내지는 部將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들보다 다소 늦게 독립부대를 형성한 朴道京·曺京煥·金公三·全海山 등의 의병장들도 기삼연의 의병봉기에 참가한 인물들이며, 또 1908년 이후 새롭게 출현한 의병부대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들의 의병진으로부터 재차 분화된 의병부대들이었다(洪淳權,≪韓末 湖南地域 義兵運動史硏究≫, 102쪽).

전라남도 장성을 중심으로 한 ‘호남창의회맹소’와는 독자적으로 전라북도에서도 李錫庸 부대가 활약하고 있다.

그는 1907년 8월에 진안에서 거의한 후 임실·남원·장수 등지에서 적극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 접어들면서 일본군경의 공세가 강화되자 1908년 3월에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休兵待時之計’로 들어갔다. 그러나 1913년 10월에 임실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은 전주에서의 공판에서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고 있다.

문:책을 많이 읽었다는데 과연 그런가.

답:4서3경에 諸般百家語(諸子百家)도 또한 섭렵했다.

문:재산은 있는가.

답:寒士에게 어찌 재산이 있겠는가.

문:어떤 목적으로 감히 폭도가 되었는가.

답:너희들 일본인을 배척하기 위해서다.

문:통솔한 부하가 3백 명이라 하는데 과연 그런가.

답:그렇다.

문:조선은 일본에 합방된 후 帝恩이 망극하여 일반 臣民 모두 기뻐하는데 당신은 충실한 신민이 될 생각은 없는가.

답:(크게 웃으며) 오히려 대한의 鷄犬이 된다 하더라도 너희 나라의 신민은 되고 싶지 않다.

문:의병이란 명칭을 쓰면서 인명을 살해하고 마을에 방화하고 공금을 강탈한 것은 불법이 아닌가.

답:背韓附日者에 대해서는 죽이지 않을 수 없고 방화하지 않을 수 없다. 공금에 대해서는 본래 대한의 국세이다. 군주가 잃은 것을 신하가 취하고, 부친이 잃은 것을 자식이 취하는 것은 이치가 당연한 일인데 어찌 불법이라 하겠는가(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1), 資料篇,<湖南倡義大將李錫庸全州公判記>).

그는 판사가 사형을 선고해서 퇴장한 후에 집안 일에 대하여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하여 자식과의 면회를 요구했다. 아들이 앞에 나서자 그는 태연하게 다만 ‘孝’와 ‘友’에 관한 수어를 유촉하였을 뿐이었다.

전라남북도에서도 기삼연이나 이석용 같은 유생 출신 의병장이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나 1909년 후반기에 들어서서는 그 양상이 달라지게 되었다. 앞에서 게재한<표 2>를 살펴보면 우리는 1908년 후반기에 최고조에 달한 의병전쟁이 점차 하향선을 걷게 된 1909년 전반기에 전라남북도가 전국적으로 보아 의병전쟁의 중심 지역으로 되는 추세를 쉽게 알 수 있다.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달한 1908년 후반기의 전국적인 전투횟수는 1,976건에 달한다. 이 시기 전라남도에서의 전투횟수는 270건(13.9%)으로 강원도의 272건(13.8%)과 거의 비슷하다. 이 양자가 1, 2위를 차지한다.

전라북도는 219건(11.1%)으로서 황해도의 232건(11.7%), 충청남도의 217건(11.0%)과 거의 비슷하다. 이 시기의 전투횟수는 전라남도, 강원도, 황해도, 전라북도, 충청남도의 순이다.

또한 1908년 후반기에 각 지방에서의 일본군경과의 전투에 참가한 의병수로 본다면 전국적인 참가 의병수 82,767명 중에서 강원도가 압도적으로 18,599명(22.5%)을 차지하여 1위이고, 전라남도의 10,544명(12.7%), 전라북도의 9,960명(12.0%), 황해도의 7,998명(9.7%), 충청남도의 7,666명(9.0%)의 순으로 된다.

즉 전투횟수는 전라남도와 강원도가 거의 비슷한데, 그에 참가한 의병수로 보아 강원도가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병부대의 규모가 전라남도에 비해서 크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데 1909년 전반기에 접어들면서 지방별로 본 의병전쟁의 양상이 일변한다. 이 시기 전국적인 전투횟수가 1,738건인데, 전라남도가 31.5%를 차지하는 547건, 전라북도가 15.8%를 차지하는 273건, 양자를 합치면 47.3%를 차지하는 820건이다.

뿐만 아니라 전투에 참가한 의병수로 보더라도 전라남도가 45.6%를 차지하는 17,579명, 전라북도가 14.5%를 차지하는 5,576명, 양자를 합치면 전국적인 참가 의병수의 60.1%가 되는 13,155명이 전라남북도에 집중하고 있다.

고쳐 말한다면 전반적인 의병전쟁이 하향선을 걷게 된 1909년 전반기에 전국적인 전투횟수의 47.3%, 참가 의병수의 60.1%가 전라남북도에 집중한 셈이 되겠다.

전라남도를 진원지로 하는 의병활동은 직접 전라북도에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상의병투쟁으로 파급되었고 제주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전라남도 의병이 봉기하여 해상을 왕래하면서 남한의 등대를 습격하고 드디어는 제주에 들어갔는데, 高承天·金光一(金先一의 오자) 등이 또한 이에 합세하였다(黃玹,≪梅泉野錄≫권 6, 융희 3년 기유).

당시 제주도에서는 高承天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李中心·金萬石(별명 金先一) 등이 중심이 되어 1909년 3월에 거의할 예정으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런데 고승천·김만석 등이 사전에 체포되어 3월 4일에 총살을 당하자 실패하고 말았다.1266)高昌錫,<1909년 濟州의 義兵運動>(濟州道 編,≪濟州抗日獨立運動史≫, 제2장, 1996).

이와 같이 1909년 전반기에 접어 들면서 여타 지방에서는 겨우 산발적이며 소규모적인 저항이 지속되는 속에서 전라남도와 그 외곽지역에서는 날이 갈수록 의병의 기세가 왕성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군중과 의병이 일체가 되어 상호간에 서로 변신하면서 전지역을 뒤덮게 되었다.

1909년 전반기만 하더라도 전라남도 지역에는 관내의 수비대 외에 타도로부터 병력을 증원하여 토벌작전을 벌였으나 별로 효과가 없었다. 또한 1909년 4∼5월에 이 지역에 헌병임시파견소를 45개소나 증설하고 7월부터 약 1개월에 걸처서 토벌작전을 전개했으나 결국 “마치 지엽만 치고 근간을 베지 못했다”라고 한탄하고 있다.

일본군 측에서는 종래의 제12여단 대신에 일본 본토에서 파견된 2개 연대를 여기에 투입하여 종래와 다른 새로운 전술을 짜기 시작했다. 일본군측은 이 지역에 대한 토벌작전이 어려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그러나 폭도의 행동이 매우 교묘해져, 백주에 양민으로 변장하고 공공연하게 郡衙 소재지를 배회하여 官署의 동정을 정찰하고, 만약 기회가 있으면 바로 刺客的인 행동을 감행하여 총기·탄약·財貨를 약탈하고, 혹은 虛를 틈타 저격기습을 시도하는 등 隱現出沒을 파악하기 어려운 자들이다(朝鮮駐箚軍司令部 編,≪朝鮮暴徒討伐誌≫, 135∼136쪽).

즉 의병부대의 행동방식은 백주에 공공연하게 지방의 중심지에 들어가 정찰하고, 적의 허점이 있으면 기습하는 전형적인 게릴라전술이다. 이러한 행동방식은 의병과 군중이 일체가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전술이 아닐 수 없다.

원래 의병과 일본군과의 전투는 ‘화승총과 38식 소총과의 싸움’이었다. 화승총과 38식 소총의 성능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유효 사정거리 400야드(약 800m)에 매분 8내지 10발을 사격할 수 있는 정예무기 앞에서 의병들은 먼저 화승에 불을 붙여 들고 다른 한손으로 철환과 화약을 비벼 넣어 사격했으니 차마 볼 수 없는 전투광경이었다. 화승총의 유효사정거리는 불과 20보 내외였다니까 이런 고대 무기로 3년 동안 막강의 일본군과 대적한 의병의 감투정신에 우선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朴成壽,<1907∼10년간의 의병전쟁에 대하여>,≪韓國史硏究≫1, 1968).

그런데 전라도에서는 종래의 화승총을 개량하여 雷管式 화승총이 보급되어 있는데도 일본군은 큰 관심을 돌리고 있다.

폭도는 2월(1908년) 이후 화승총의 개조에 고심하여 4월 초순까지는 그 대부분을 뇌관식으로 개조했다.

화승총을 뇌관식으로 개조했다 해서 38식 소총에 따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여간 근대적인 장비로 잘 조직되고 훈련된 일본군경에 대하여 어제까지 농민이거나 산포수들이었던 의병들이 그 나름대로 창출한 전술이 바로 게릴라전술이라 하겠다.

‘남한대토벌작전’이 실시되기 직전의 전라남도의 의병활동에 대하여 일본군측이 파악하고 있던 실태에 의하면 대원 200명 이상의 유력한 의병부대만 하더라도 영광과 무안지방에 할거하는 전해산 부대(500명), 능주 부근에 할거하는 沈南一 부대(500명), 보성 부근에 할거하는 安圭洪 부대(450명), 역시 보성 부근에 할거하는 林昌模 부대(300명), 광양 부근에 할거하는 姜武京 부대(300명) 등이다.

100명 이상의 의병부대도 黃俊性(150명), 金京久(130명) 등 6개 부대가 활동중에 있었다. 전라북도의 의병부대는 100명 이하의 소부대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군이 주목하고 있던 부대는 다음과 같다.

전라남도의 폭도 가운데 거괴인 심남일·강무경·安桂洪(安圭洪)·임창모 등의 일당은 약간 그 취향이 달라서 부하의 비행을 엄하게 戒飭해서 약탈을 금하고, 오로지 한국인을 선동하여 폭동의 영속과 도당의 강대에 힘쓰는 자들 같다.

그리하여 그들의 목적은 이 폭동의 영속적이고 항구적인 지속에 의하여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대륙정책의 실패를 가져오게 하고, 통감정치의 부당함을 명시케 하여, 마침내는 열국으로 하여금 이에 간섭케 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安固하게 할 수 있다는 망상을 품고 있는 자들이다(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臨時韓國派遣隊의 南韓討伐實施報告의 件>, 82쪽).

이 시기 전라남도의 의병부대들은 종래 기삼연이 조직한 유생 중심의 ‘호남창의회맹소’와는 그 규모에 있어서나 성격에 있어서 확연히 구별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앞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의병장들의 전략사상은 이미 유교적인 위정척사사상을 뛰어 넘고 있다. 군중과 일체가 된 의병부대에 대한 토벌작전은 스스로 군중을 휩쓸게 하는 무차별적 학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 정부는 1909년 7월 4일에 한국합방에 관한 기본 방침을 결정하였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호남지방의 의병부대들을 소탕하는 것이 초미의 문제로 부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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