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 의병전쟁의 발전
  • 5) 독립군 운동을 위한 근거지 창설
  • (1) 동만·남만의 한인사회

(1) 동만·남만의 한인사회

국내에서 의병활동이 종말을 고하게 되고 일제 식민지 권력이 대도시로부터 산간벽지의 구석구석까지 포치하게 되자 국권회복을 위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비밀결사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무장투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 근거지를 국외에 건설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그를 위해서는 무장투쟁을 지원하는 군중적 기반이 있어야 했다. 그 공간이 바로 이미 유인석이 지적한 대로 백두산 산줄기가 한국의 북방지역과 연결되는 동만과 남만이라 하겠다.

만주는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후에 대대로 ‘封禁’의 성지로서 漢人이나 韓人의 이주를 금지해 왔다. 그것은 청나라 황실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을 지배하는 청나라 권력의 골간은 만주족에 의한 군사력인 八旗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만주족은 수렵생활에서 단련된 기마군단을 가지고 중국을 정복하였다. 청나라 황실은 무력을 연마하기 위한 수렵장을 보존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농경민족인 중국인이나 한국인이 이 지역에 침투하여 만주땅을 농지화하고, 만주족을 농민화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 했다. 그러나 끝내 중국인이나 한국인의 침투를 막지 못하고, 19세 후반기에는 점차 봉금정책을 해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 사람이 일반적으로 북간도(동만)나 서간도(남만)라 할 때 ‘間島’란 지명은 1934년까지는 문헌에 따르면 間土·墾島·艮土(艮=동북방)·艮島란 지명이 자의적으로 사용되었다. 1934년 12월에 만주국은 종래 길림성에 소속되어 있던 延吉縣·汪淸縣和龍縣·琿春縣에, 봉천성에 소속했던 安圖縣을 통합하여 間島省을 설치했다. 이 때부터 間島라는 지명이 정착되었다.

다음으로 동만지방에 한국인이 이주하는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만지방에는 봉금정책이 해제되기 이전부터 함경도지방 농민들의 ‘越江墾田’이 자주 있었다. 처음에는 ‘朝耕暮歸’라 하여 아침에 두만강을 건너서 밭을 갈고 저녁에 돌아왔다. ‘조경모귀’가 점차 ‘春耕秋歸’로 변하게 되었다. 즉 봄에 동만지방에 이주해서 농사를 짓고, 가을에 추수한 농산물을 가지고 돌아오는 현상이다. 자연히 동만지방에 정주하는 농민도 있기 마련이었다.

가장 대규모로 동만과 남만지방에 이주하게 된 것은 1869∼1871년에 함경도지방의 대기근 때이다.

결국 청나라 정부도 집요하게 침투하는 한국 농민을 막지 못하여 1875년 에 봉금정책을 해제하고, 1884년에는 길림성과 한국 정부 사이에<商民貿易地方章程>이 체결되어 大摺子·下泉坪·頭道溝를 상호간의 무역을 위한 商埠地로 지정했다. 뿐만 아니라 길림성은 1885년에 越墾局을 설치해서 오히려 한국 이주민에 의한 농지 개간을 장려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인 인구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동만지방에서의 한국 농민 중에는 청나라 사람처럼 ‘改風易俗’해서 귀화하여 지주가 되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다수의 농민은 山東省 방면으로부터 이주해 온 중국인 지주의 소유지를 개간하여 소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동만지방에서의 한인들은 청국 관헌에 의하여 거주권을 비롯한 제반 권익이 침해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1902년에 北墾島管理使로 임명된 李範允은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병단을 조직했다. 그런데 러일전쟁 당시 이범윤은 러시아편에 서서 일본을 반대했기 때문에 종전 후에는 煙秋로 자리를 옮겨 의병투쟁을 시작했다.

일본은 1907년 8월에 龍井村에 통감부 간도파출소(소장은 육군중좌 齋藤季治郞)를 설치하여 청나라 정부와의 사이에 소위 ‘간도문제’로 분쟁을 일으켰다. 결국 1909년에 간도협약이 성립되어 통감부 파출소를 폐쇄하는 대신 영사관을 설치했다.

1913년 현재 북간도 인구의 민족별 구성은 한인이 163,000명에 비하여 중국인은 49,000명에 불과했다.1268)牛丸潤亮·村田懋磨 編,≪最新間島事情≫(朝鮮及び朝鮮人社, 1927), 122쪽. 이것은 1909년 당시의 한인 82,900명에 비하여 불과 4년간에 배가한 것이다. 한국의 합방을 전후하여 홍범도 의병부대를 비롯하여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하는 인구수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서간도라 하는 남만지방에로의 이주도 사정은 동만지방과 비슷하다. 이 지역에 한인들이 대략적으로 이주한 시기는 동만지방과 같이 함경도지방에 대기근이 있었던 1869∼1871년이라 한다.

한국 정부는 1898년에 徐相懋를 西邊界管理使로 임명하여 이 지역의 한국이주민에 대한 행정사무를 관장하도록 했다. 그 당시 이미 한국이주민은 8,722호에 37,000명이었다 한다.

그 후에 이 지역에 鄕約을 설치하여 향약장에는 李容泰(의정부 참찬), 부향약장에는 서상무가 겸임하고 派員에는 李完求를 임명하였으나, 1909년부터 향약을 폐지하고 한국이주민의 완전한 자치제도가 인정되었다.1269)牛丸潤亮·村田懋磨 編, 위의 책, 76∼77쪽.

이와 같이 동만과 남만에는 한국이 합방되기 전에 이미 상당수의 한인들이 주로 생활상 이유로 이주하여 근거지 창설을 위한 군중적 기반이 굳어지고 있었다.

특히 한말에 민족주의적 역사관이 대두하여 만주의 遼東지방이 외국땅이 아니라 단군의 자손들의 혈맥을 잇는 부여→고구려의 故土라는 사관이 풍미했다.

申采浩는 1908년에≪大韓每日申報≫지상에 50회에 걸쳐서<讀史新論>을 연재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한국민족을 형성한 중심 종족이 단군의 후예로서의 부여족이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부여족은 곧 우리의 신성한 종족인 단군 자손이다. 4천년 동안 이 땅의 주인이 된 종족이다(丁海廉 編譯,≪申采浩 歷史論說集≫, 現代實學社, 1995, 15쪽).

이와 같이 요동지방이 부여→고구려의 고토라는 민족주의사관은 이 지역에 한국민족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한 독립군의 근거지 창설에 대한 역사적인 정당성을 제시해 주는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 지역이 청나라의 영토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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