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 의병전쟁의 발전
  • 5) 독립군 운동을 위한 근거지 창설
  • (2) 신민회의 근거지 창설

(2) 신민회의 근거지 창설

신민회는 1907년에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비밀결사로서, 애국계몽운동의 일익을 담당했다.

신민회는 교육과 殖産에 의한 실력양성을 우선해서 결정적인 기회를 포착해서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 그의 정치노선이다. 개화파의 사상적 계보에 속하는 신민회는 위정척사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의병전쟁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신민회는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합방되자 독립군운동을 위한 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하여 남만지방에로의 이주를 계획했다. 즉 실력양성운동으로부터 독립군운동으로 정치노선을 전환시킨 것이다.

우선 李哲榮·李始榮·李會榮 등의 6형제를 비롯한 신민회의 선발대들이 가산을 팔아서 얻은 자금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그들은 독립군운동의 근거지를 奉天省 柳河縣 三源堡 鄒家街로 결정했다. 여기에서의 근거지 건설은 목적의식적으로 신민회의 사상을 구현시키기 위한 활동과 결부되어 있는 데 특징이 있다. 1911년 4월에 삼원보에 모인 이주민들은 大孤山에서 노천대회를 개최하여 ‘耕學社’를 결성하고 李相龍을 초대 사장으로 선출했다.

경학사의 ‘경’은 산업이요, ‘학’은 교육이다. 바로 신민회의 정치노선을 연장시킨 것이다. 그러나 ‘학’이란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독립군의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고, 그를 위하여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다. 무관학교란 명칭을 피한 것은 청국 관헌과의 마찰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만주땅이 옛날 부여→고구려의 고토라 하더라도 현재는 청나라 영토이며 그 주권하에 소속된다. 따라서 ‘경’과 ‘학’을 결부시킨 근거지 건설을 위해서는 선차적으로 외국인으로서의 거주권을 비롯한 제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상룡은 1913년의<敬告南滿州僑居同胞文>에서 종래의 산업과 교육에 권리를 추가하여 3대 강령을 정식화했다.1270)李相龍,≪石洲遺稿≫권 5. 3대 강령 중에서도 ‘권리는 우리 생명의 근저’이기 때문에 최우선해야 하며 권리를 쟁취하는 방법은 團合 밖에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즉 경학사는 근거지 군중을 결속시키고 생활하기 위한 산업과 교육을 진행하고 나아가서는 근거지 군중이 결속해서 권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유인석의 근거지 사상을 살펴 봤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요약해서 근거지에 ‘華脈’을 보존하고, 군중을 결속시키는 방법으로써 향약을 발전시킨 ‘貫一約’이었다. 군중과의 생활과 유리된 너무나도 道學的이고 초현실적인 구상이었다.

신민회의 근거지 구상이 결실되고 계속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1271)경학사의 발전과정에 대해서는 姜在彦,<한국독립운동의 근거지 문제-1910년 전후의 두가지 사상적 대응->(앞의 책) 참조. 근거지 군중이 놓여 있는 생활적 현실에 입각하여 그 과정에 부닥친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實學的인 지도이념이 아니겠는가.

<姜在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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