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5. 의병전쟁의 특징과 의의
  • 4) 조직상의 특징

4) 조직상의 특징

의병이 민병이었던만큼 부대의 편성도 정규 군대의 조직처럼 규모를 갖춘 것이 아니었다. 또 당초에 유림에 의해서 비롯된 의병 조직이었으므로 전통시대의 편성 방법을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후기의병까지 전투부대를 전군·중군·좌군·우군·후군 방식으로 편성하고 있었던 사실이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의병이 새로운 변화에 대처하여 근대 군대조직으로 발전하지 못한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인원 구성은 시기에 따라 달랐다. 전기의병에서 지휘부는 유생이 맡았고, 병사는 대부분 농민이었다. 지휘를 맡은 유생 가운데 무신이나 무과 출신자는 극히 드물었다.1291)전기의병장 가운데 이필희·서상열이 무과 급제자란 기록이 있다.
元容正,≪昭義新編≫(國史編纂委員會, 1975), 234쪽.
이정규,≪육의사열전≫해당조 참조.
갑오의병인 안동의진의 徐相轍이나 을미의병인 남한산성의진의 沈相禧·閔丙天·李麟榮·金河洛, 홍주의진의 金福漢·李楔, 광산의진의 奇宇萬·高光洵, 나주의진의 李鶴相, 춘천의진의 李昭應·柳弘錫, 강릉의진의 閔龍鎬, 제천의진의 柳麟錫·安承禹·徐相說·李春永·朱庸奎, 문경의진의 李康秊, 안동의진의 權世淵·金道和, 선성의진의 李晩燾, 영양의진의 金道鉉, 의성의진의 金象鐘, 경주의진의 李韓久, 김산의진의 李起燦, 진주의진의 盧應奎 등 모두 글하는 선비들이었다. 다만 갑오의병으로 상원의 金元喬와 을미의병으로 강경의진의 金利彦은 문무 성분이 불확실하고 또 이강년이 무과에 급제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것도 확실치 않다. 그러니까 전기의병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보다 더 유생의 성격이 짙었다. 하급장교격으로 포수가 많이 기용되었던 것은 임란 등의 전통시대 의병과 비슷하였다.

유생들의 집결 범위는 갑오의병인 서상철의 경우는 그가 청풍 유생인데 고향을 떠나 안동에서 기의한 것은 유림의 본고장을 근거했다는 의미로 이해되지만, 이듬해 을미의병의 경우는 강릉의 민용호 의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향토성과 학통성에 따라 집결했다. 그리고 당시 전국을 8도에서 23관찰부로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였는데 8도 감영 소재지에서는 의병이 집결한 사례가 없고, 새로 관찰부가 된 춘천·강릉·안동·진주·나주·홍주·충주 등지에 집결한 사례가 많았다. 그것은 행정개편에 따른 행정력의 공백을 이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직의 향토성은 단발령을 집행하는 관찰사나 군수에 대한 직접적 저항을 의미하고, 학통성은 척사이념을 실현하려는 사상과 이론의 동질집단의 형성을 의미한다.1292)조동걸,<한말 의병운동의 한국민족주의상의 위치>(≪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28∼32쪽.

병사의 역할을 담당한 농민은 유생 지주를 따라 출전한 소작농민, 동학농민전쟁 후 동학잔당을 색출하고 있던 당시에 그를 피하여 잠적한 동학농민, 다음에 의병이든 관군이든 보상을 찾아 모인 용병적인 포수농민으로 구분할 수 있다. 어느 경우라고 해도 농민이 주체적으로 참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을미의병은 수적으로는 농민이 많았더라도 농민의식이 반영된 의병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을미의병에서 농민의 위치는 종속성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의병으로 일단 집결하여 전투까지 경험하면서 새로운 농민으로 변질하고 발전했던 사실은 주목되어야 한다. 즉, 을미의병은 농민조직이 새로 발생할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1896년 의병이 해산한 후 전국적으로 파다하게 일어난 영학당·남학당·동학당·초적·화적·북대·남대 등의 농민조직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농민조직은 1900년 무렵부터 활빈당으로 개편되어 갔지만 그것을 광무농민운동으로 파악할 수 있다.1293)조동걸,<지계사업에 대한 정산의 농민항요>(≪사학연구≫33, 1981;위의 책).

활빈당 등의 광무농민운동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1904년부터 중기의병으로 전환해 갔다. 그러므로 중기의병의 조직은 농민의병에서 비롯되었다. 그 때 조직상의 특징은 활빈당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전기의병과는 달리 농민 독자적인 의병이 나타난 것이 중기의병의 특징이었다. 농민 독자적 의병은 신돌석 의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휘부와 병사가 모두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1904년 8월 한일협약과 특히 이듬해의 을사조약 문제를 계기로 유림의병이 크게 일어난 것도 중기의병의 특징이었다.1294)김의환,<면암선생의 의병활동>(≪나라사랑≫6, 1972).
배용일,<산남의진고>(≪논문집≫, 포항실업전문대학, 1982).
유한철,<홍주의진의 조직과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그런 경우 지휘부는 유림, 특히 관료 출신자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병사부는 대개 농민이었다. 농민이라고 하더라도 전기의병과 같은 종속성에서는 탈피해 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후기의병의 조직상의 특징은 다양하였다. 이강년·이석용·고광순·허위·이진용·이인영 의진처럼 유림을 중심으로 한 의진이 있었던가 하면 홍범도·김수민·안규홍·지용기 의진처럼 평민의진도 있었고 민긍호·연기우·金圭植 의진처럼 해산 군인의 의진도 있었다.1295)신용하,<홍범도 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1, 1986).
―――,<민긍호 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4, 1989).
홍순권,≪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연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1).
정제우,≪구한말 의병장 이강년연구≫(인하대 박사학위논문, 1992).
홍영기,≪대한제국시기 호남의병연구≫(서강대 박사학위논문, 1993).
의진의 구성원도 중기의병과 비교했을 때 유생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또 군인·상인·관리 등 신분이나 직업도 다양하여 의병전쟁이 국민전쟁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대조직에서 중기의병까지는 대부대 단위가 일반적이었으나 후기의병부대는 소부대의 활동이 많아졌다. 특히 1908년 5월 서울진공작전을 끝내면서 대부대의진을 지휘하던 이강년·민긍호·허위 등의 의병장이 체포되거나 전사한 뒤에는 유격전을 수행하기 편리한 소부대조직이 일반화되었다.

특히 1909년 9, 10월의 일제의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이 큰 타격을 입은 뒤에는 유격전투의 소부대만 존속할 수 있었다. 하물며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식민통치 속에서 항전한 의병은 말할 여지가 없었다. 후기의병이 소부대의 유격 조직으로 개편되어 항전할 때는 의병전선이 민중화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때 양반 유생이 참전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재산은 의병 자금으로 소진하였고 일본군이 집조차 불태워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산중에서 노숙하며 쫓고 쫓기는 유격전투를 수행하자면 전통 유생이나 양반의 행색과 의식으로는 불가능하였다. 결국 유생도 민중화되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는 지휘부와 병사층이 따로 구성되지 않고 양반이든 상놈이든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의병이 지휘를 맡았고 따라서 상놈 대장 밑에 양반 병사가 소속하는 사례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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