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5. 의병전쟁의 특징과 의의
  • 5) 활동상의 특징

5) 활동상의 특징

의병전쟁의 시기별 활동상을 보면, 전기의병은 전투의병외에 시위의병도 적지 않았다. 의병을 일으켜 단발령을 감행하려는 관리를 처단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전투태세를 미리 갖추었던 의진이 아니었다. 춘천관찰사·충주관찰사·안동관찰사 등 고급 관리를 처단한 경우도 어디까지나 처단이었지 전투에서 전사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관군이 공격해 오면 그 후부터 전투의병으로 전환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중기의병부터는 전투의병만 존재하였다. 중기의병에서는 최익현·정용기·신돌석·민종식 의진에서 나타나듯이 대부대 작전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민종식의 홍주의진이나 정용기의 산남의진처럼 패전할 때는 희생이 대량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1907년부터의 후기의병에서는 의병전쟁이 더욱 활기를 띄었다. 그것은 해산 군인이 참전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전투는 승전한 경우도 적지 않았으나 패전을 거듭했다. 일본군은 정규군이었고 중화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적하기란 용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이른 1907년 12월부터 1908년 5월까지의 서울탈환작전을 고비로 의병전선은 유격전투로 전환해 갔는데, 특히 1909년 9, 10월의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에서 크게 타격을 받고 모두 소부대에 의한 유격작전으로 변하였다. 일본군의 전면적 반격을 맞아 대부대조직으로는 이동이 어려웠고 효과적인 공격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전투지역은 전국에 걸쳤는데 전기의병은 처음에 향교에 집결하여 관아를 중심으로 한 들판에서 전투가 전개되었다. 그것은 의병이 처음부터 전투를 목표한 것이 아니라 단발령을 저지하는 등의 관리의 활동을 봉쇄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중기의병부터는 홍주의진이나 태인의진, 그리고 남원의진의 경우처럼 읍성이 무대가 되었다가 산성으로 이동하여 싸운 사례가 많았다. 아직까지 대부대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후기의병에서는 산악이 무대가 되어 점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때 지리산과 태백산, 그리고 추가령지구대와 개마고원은 의병전쟁의 훌륭한 무대로 이용되었다. 소부대의 유격전이 전개된 의병전쟁의 추이를 말해 주고 있다.

다음에 전쟁 이론은 전기와 중기의병은 전통시대의 병법을 따랐다. 그런데 1907년 군대해산 후 해산 군인이 참전하면서 전술과 전투 양상도 변화하였다. 그러나 의병전선이 유격전으로 변모하자 이론을 앞세울 겨를이 없었고, 결국 천차만별의 전투 양상을 나타냈다.

전기의병은 평소의 옷을 그대로 입고 무장도 갖추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무장을 했던 경우는 포수들의 화승총이 고작이었다. 그러므로 유인석의 제천전투나 민용호의 원산진격 전투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전투중에 비만 오면 전투 능력을 상실하고 패전하였다. 기록상 군복을 입은 경우는 閔龍鎬 의진이 강릉에서 원산 진격을 앞두고 제복을 만들 때, 한복에 황색을 입혔고 장교는 소매 끝에 검은 줄테를 둘렀다.1296)閔龍鎬,≪關東倡義錄≫(國史編纂委員會, 1984).
조동걸,≪독립군의 길따라 대륙을 가다≫(지식산업사), 29쪽.
그리고 중기의병 때 林炳瓚의 문서인≪갑진일기≫에 군복의 규정이 발견되는데 연령의 干支에 따라 청·홍·황·백·흑색으로 상하의를 염색하도록 했다고 한다.1297)김의환,<을사조약과 후기의병>(≪독립운동사≫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371쪽. 그외는 제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중기의병부터 自起銃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정환직·신돌석·최익현 의진이 관아를 습격하여 뇌관을 타격, 폭발시켜 총을 쏘는 근대식 자기총을 압수하여 사용하였다. 후기의병은 군대해산 후이기 때문에 자기총을 사용한 것이 일반화되어 갔다. 혹간 천보총과 한식총이란 이름이 기록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화승총을 자기총으로 개조하거나 장총을 단총으로 개조한 것을 가리켰다.1298)이일룡,≪秘錄 한말 전남의병전투사≫(전라남도 경무국,≪전남폭도사≫번역본,전남일보사, 1977), 58쪽. 후기의병 당시 梁會一과 林昌模 의진이 무기를 제조하던 유적이 지금도 전남 화순군 증리 중조산 밑에 있어, 의병이 무기를 생산했던 실상을 전해주고 있다.1299)조동걸,<雙山義所의 의병성과 武器製造所 遺趾>(≪한국독립운동사연구≫4, 1990). 후기의병에서도 군복은 별도로 있을 수 없었다. 구한국군의 복장을 구해 입거나 일본군의 군복을 노획하여 입은 외에는 평상복을 입었다. 평상복이 농민으로 가장하기 쉬웠으므로 오히려 유리한 경우가 많아 유격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의병전쟁에서 특히 후기의병은 의병전쟁사를 대표할만큼 여러 가지 특징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지적할 것은 후기의병은 해산병의 합류로 전투 조직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의병전쟁이 독립전쟁의 양상과 성격을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그전까지만 해도 활발하지 않던 북부지방에서 후기의병부터 의병이 크게 일어나 전국이 의병전쟁의 격전장이 되었던 점은 곧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예고하는 현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현상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1907년 말부터 전개한 13도 연합의진의 서울진공작전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의병전쟁의 격조와 높은 수준을 웅변하고 있는 역사적 계획이었고 그의 실천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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