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5. 의병전쟁의 특징과 의의
  • 6) 의병전쟁의 의의

6) 의병전쟁의 의의

의병전쟁은 무엇보다 먼저 수천년 문화민족의 전통을 입증하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비록 근대화에는 늦었던 대한제국이었지만, 문화의 전통을 자부하며 일제 침략에 항전하였다. 그 문화의 전통은 침략자 일본을 가르쳐 준 문화였으므로 의병들의 자부는 더욱 높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사적으로도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맞아 항거한 한국인의 항전이 원시적 본능에 의한 반발이 아니라 문화적 근거에 기초한 이념적 항전이었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수천년간 키워온 조선 신사도(선비)의 유형을 사육신과 생육신형으로 나눈다면, 의병은 사육신의 전통을 계승함이요. 생육신의 전통은 自靖論으로 이어졌다고 하겠다.

두번째는 의병전쟁이 항전하여 결국은 패전하고 말았으나 거기에서 잃었던 것은 인명과 재산이었지만 귀중한 정신적 유산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 정신적 유산 위에서 독립운동이 꽃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의병들이 전사한 무덤과 그들의 집이 불탄 잿더미 위에서 정의는 꽃피고 역사는 발전했던 것이다. 국내외 독립운동가가 자신들의 독립운동 전통을 이야기할 때, 누구나 의병들의 항전을 앞세웠던 사실이 그것을 말한다.

세번째는 그와 같이 의병전쟁은 독립운동의 단서를 열었다는 의미에서 주목되지만 독립운동에서도 독립군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1908년부터 연해주에서 柳麟錫·李範允·安重根·崔在亨 등을 중심으로 한 의병은 독립군 형성의 선구적 조직이 되었고,1300)윤병석,≪의병과 독립군≫(세종기념사업회, 1977).
조동걸, 앞의 글(1969).
유한철,<유인석의 의병근거지론-1907년 이후를 중심으로>(≪한국독립운동사연구≫8, 1994).
洪範圖를 비롯한 함경도 의병은 그대로 독립군으로 전환해 간 사례였다.1301)박민영, 앞의 책. 신민회의 계몽주의자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기지를 개간한 사실도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의 통합성격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1302)신용하,<신민회의 독립군기지 창건운동>(≪한국문화≫4, 서울대, 1983). 그것은 곧 계몽운동이 해외로 이동하면서 이념은 계몽주의가 갖는 근대주의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독립운동 방략은 의병 노선으로 전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의병전쟁을 계승한 독립군의 독립전쟁이 독립운동 방략의 주류를 형성했던 것이다.

네번째로 의병전쟁이 진행되면서 당초의 척사의병이 1904년부터는 근왕적 구국의병으로, 1907년 후기의병부터는 근왕주의도 서서히 탈피하면서 민족의식이 부상해 갔다. 그리고 당초에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한 의병조직이 특히 후기의병에 이르면 그러한 신분제적 봉건성을 극복하면서 평민이 주도한 의진이 확대되어 갔다. 그와 같은 변화는 의병전쟁이 근대적 성격으로 발전해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의병전쟁이 보여준 근대적 성장은 의병전선에 참전한 봉건적 유생의 자기 변화에 의해서 달성한 것이기도 하지만, 농민의병의 참전에 의한 평민적 역할의 결과로 이해된다.

다섯째는 의병전쟁을 통하여 농민조직이 크게 발전하였다는 점이 큰 의미를 갖는다. 농민조직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역사에 크게 부상하였으나 그것이 일제의 침략을 받아 파괴되었는데, 그것이 다시 의병 봉기와 더불어 결집되어 1900년을 전후한 광무농민운동을 통하여는 동학이나 의병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 농민조직으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그의 대표적 조직이 활빈당이었고 그것은 또 중기의병의 기초 조직이 되어 의병전선의 봉건성 탈피에 기여했던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여섯째는 의병전쟁은 전민족의 반제국주의적인 항일이념의 표명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일제의 통계를 따르더라도 의병전쟁에서 1907년 8월부터 1910년까지 일본군과 2,852회의 전투를 전개했고, 17,779명의 의병이 전사하였다.1303)朝鮮駐車軍司令部,≪朝鮮暴徒討伐誌≫(≪獨立運動史資料集≫3, 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1971), 823∼829쪽. 이는 의병이 전국토를 피로 물들이며 항전했던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적 항전의 사실은 먼저 일제의 한일합방의 합법성 강변이 얼마나 거짓인가를 입증해 주는 가장 확실한 근거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하지만, 다음에 당시 세계를 풍미하고 있던 제국주의 사조에 항전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항전한 세계사적 기록으로 중시해야 할 것이다.

일곱째는 의병전선에서 봉건성을 탈피하면서도 근대적 지도이념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근대국가의 정치이론을 개발하지 못하여 의병전쟁의 합목적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의병이 근대적 독립군으로 발전하자면 계몽주의의 정치이론을 수용한 해외의 독립군기지에서 성취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끝으로 전기의병 가운데 정치 파쟁에 편승하여 봉기한 의병이 있었고, 후기의병에서 잡범 방식의 의병이 있었다고 의병전쟁의 역사적 위치를 폄하하는 수가 있는데, 그런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이 의병전쟁의 주류현상이 아니며 중심 개념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해 둔다.

<趙東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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