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1.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
  • 1) 금융 지배
  • (1) 일본의 금융진출과 제일은행

(1) 일본의 금융진출과 제일은행

 1876년의 강화도조약 이후 3항이 개항되면서 일본은 무역의 편의를 제공하고 무역에 따른 상업적 이윤의 큰 부분을 장악하고자 일찍이 금융기관을 개설하였다. 후진국의 개항기에 도매업·은행·해운·보험 등은 이윤이 가장 큰 분야이므로 일본은 상대적으로 빨리 이들 분야에 진출하여 조직적으로 대응하였다.

 일본 금융기관의 조선 진출의 출발은 무역상업금융의 편의를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금융기관중에 한국에 제일 먼저 진출한 것은 第一國立銀行이었다. 제일국립은행은 1872년 일본의<國立銀行條例>에 의거하여 미츠이(三井)·오노(小野)의 출자에 의해 1873년에 설립된 일본 최초의 은행이고, ‘국립’은<국립은행조례>의 규정에 따라 설립된 은행이라는 의미에 불과하고 사실은 일개 사립은행에 지나지 않았다. 제일은행은 개항 직후인 1878년에 이미 부산에 지점을 개설하고 이후 1880년에 원산, 1882년 인천, 1888년 경성에 출장소를 개설하고 지점으로 승격시켜 나가는 등 영업망을 확충하였다.

 제일국립은행은 처음에 “주로 換 혹은 荷換의 길을 열고, 대부의 편리를 꾀하면서 한전을 교환함으로써 彼我의 상업상의 편익을 주기”003)澁澤榮一,≪韓國に於ける第一銀行≫(東京:第一銀行, 1908), 1쪽. 위해 진출하였다. 개항기 한일무역은 미곡·대두·우피 등을 수출하고 면직물을 수입하는 米綿交換體制로 대표되는 것이었다. 수입품의 구성에 있어서는 크게 보아 청일전쟁 이전까지는 주로 나가사키(長崎)를 중심으로 하는 중계상품의 무역이 중심이었다면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공업화가 시작되면서 일본산 면사·면직물의 비중이 증가하였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 금융기관은 제일국립은행을 필두로 1880년에는 쓰시마(對馬島) 이즈하라(嚴原)의 第百二國立銀行의 부산출장소, 1890년에는 나가사키 第十八國立銀行의 인천지점, 1892년에 오사카(大阪) 第五十八國立銀行의 인천지점이 설치되었다. 물론 일본계 은행 이외에도 香港上海銀行 및 챠타드뱅크(Chartered Bank)가 인천에 진출한 바 있지만 “그 거래는 2∼3인의 洋商 및 淸商에 한하고, 업무는 주로 換의 매매이고 대부는 극히 적어서”004)德永勳美,≪韓國總覽≫(東京:博文館, 1907), 1126쪽. 일본계 은행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외국 금융기관들의 침투과정에서 漢城銀行·大韓天一銀行 등의 민족금융기관도 설립되고 나름대로의 발전을 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직의 규모나 자금 등의 면에서 외국은행과 경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역의 확대 과정에서 금융기관의 진출로 日商들은 수출품 매집에 있어서 前貸金 등을 통해 생산자를 금융적으로 종속시켜 값싸게 곡물을 매집하기도 하고, 은행을 통한 무역결제상의 편의를 얻었으며, 이밖에도 다양한 목적을 위한 자금 융통의 편의를 얻을 수 있었다. 일본인의 경제침략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을 첨병으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에 진출한 일본 금융기관의 영업상황을 비교·검토하여 보면 다음<표 1>과 같다.<표 1>은 은행들의 예금, 대출고 및 荷換어음의 취급고를 보여주고 있는 바, 연도별로 차이는 있지만 제일은행이 예금·대출에서 특히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하환 취급에서도 대체로 50% 이상을 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상업금융을 중심으로 하는 제18은행과 제58은행 사이에도, 제18은행은 하환어음을 보다 많이 취급하고 제58은행은 예금·대출이 많은 등의 영업상의 특징이 없지 않았다.

 제일국립은행은 단순한 상업금융 이외에 한국의 재정자금을 이용하고 일본의 정책자금을 이용하는 점에서 타 은행과 다른 뚜렷한 특징이 있었다. 우선 제일국립은행은 諸 예금에서 점하는 公金預金의 비중이 일관하여 높고 특히 청일전쟁기 이후에 현저하였다.005)高嶋雅明, 앞의 책, 243쪽. 그리고 대출에서도 제일은행은 政府貸上을 할 뿐만 아니라 해관세를 비롯한 재정자금에 의거하여 영업을 하여 예대율(대출/예금)이 100% 미만인 특징이 있었다. 반면에 제18국립은행은 본점·오오사카지점에서의 자금투입을 통해 활발한 영업활동을 함으로써 한국내에서는 일관하여 예대율이 100%를 상회하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第一國立銀行 第十八國立銀行 第五十八國立銀行
預金·貸出 荷換어음 預金·貸出 荷換어음 預金·貸出 荷換어음
1878

1882

1886

1890

1894

1898

1902

1906
 
4,090
17,865
21,072
43,233
114,802
229,002
211,165
367,361
1,030,689
505,107
2,252,650
804,196
3,970,901
2,775,054
10,728,548
4,384,794
1,360
6,250
296,677
120,703
107,218
43,383
1,108,241
629,529
629,794
517,044
1,648,556
1,556,889
4,026,253
1,651,998
4,733,941
5,290,386






1,000
53,900
57,875
129,007
164,967
554,605
252,332
717,354
1,527,029
1,914,174






19,720
38,376
338,852
611,444
1,449,243
823,505
3,536,970
1,766,929
3,725,587
3,273,938








37,397
88,681
95,544
208,744
283,526
722,270
1,503,092
3,521,912








425,598
217,363
97,648
66,755
417,350
528,895
1,531,218
1,421,501

<표 1>한국에 있어서 일본 금융기관의 영업상황 (단위:円)

*1. 高嶋雅明,≪朝鮮における植民地金融史の硏究≫(大原新生社, 1978), 244·248쪽.
 2. 預金(公金·일반예금 포함), 貸出(일반대출금만이고 政府貸上金은 포함하지 않음)은 年末殘高임. 各年次 上段은 예금고이고 下段은 대출고임. 荷換取組高는 각 년차의 總取組高 합계임. 상단은 取組高(조선내 각 지점에서 각지로 향한 것)이고 하단은 取立高(각지에서 조선내 각 지점으로 향한 것)를 나타낸다.
 3. 第五十八國立銀行의 1898년분은 부산지점만의 것이고 인천·경성지점은 포함하지 않음.

 제일은행은 일찍부터 한국정부의 재정자금을 이용하는 외에 보통은행 업무 이외의 특수업무를 취급하였다. 제일은행은 일본은행의 업무를 대행하는 등의 보통은행 업무 이외의 특수업무를 취급하였고 나아가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의 첨병이 되어 한국의 중앙은행이 되고자 시도하였다. 물론 제일은행이 취급한 특수한 업무는 처음부터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것으로 ①해관세의 취급, ②地金銀의 매입, ③화폐의 정리, ④한국정부에의 貸上金, ⑤은행권의 발행, ⑥한국 국고금의 취급, ⑦한국 중앙은행으로서의 업무 등을 행하였다.006)長谷川天代松 編,≪第一銀行五十年小史≫(1926), 72쪽.

 제일은행은 부산에 지점을 설치하자 일본의 통화를 유통시키고 한국산 금을 매수하고자 기도하였다. 그를 위해 제일은행은 일본정부에 출원하여 자금을 대여받았으며, 1880년에는 사금의 집산지인 원산에 출장소를 설치하였고, 1882년에는 해관세 취급을 위해 인천에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884년 2월 조선의 총세무사인 묄렌도르프(P. G. Möllendorff)와 해관세 취급조약을 체결하여 이후 조선의 개항장에서 해관이 징수하는 관세수수료, 벌금 등을 거의 모두 제일은행에서 취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일은행은 외국의 민간은행으로서 사실상 조선의 해관세를 취급하는 재정기관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제일은행은 해관세 취급은행이 됨으로써 해관세를 예금으로 유치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신용을 바탕으로 소위 ‘韓錢預託어음’을 발행할 수 있었다. ‘한전예탁어음’은 관세납입을 위한 편의수단으로서 제일은행에서 발행되어 해관을 거쳐 또한 동 은행으로 환류되는 일종의 관세지불증명 또는 수령증에 유사한 것이지만, 그 기능은 발행자의 신용에 힘입어 대차의 결제에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서 제삼자에 대해서도 능히 유통하고, 은행권에 대단히 유사하지만 그 주된 차이점은 표기금액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었다.007)四方博,<朝鮮における資本主義の成立過程>(≪朝鮮社會經濟史硏究≫, 京城帝大 法文學會, 1933), 95쪽. 제일은행이 이와 같이 단순한 상업금융기관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재정자금을 취급하고 이에 기초하여 한전예탁어음→一覽拂어음→은행권→법화로 이어지는 화폐발행권을 장악하는 과정은 한국에 대한 식민지적 금융지배과정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제일은행은 이제 관세금 취급에 그치지 않고, 청일전쟁 후에는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가 중심이 되어 한국의 중앙은행이 되고자 하였으나 이후 삼국간섭 등의 정세변화로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일은행은 1902년에 당시 한국이 폐제문란한 상태임을 기화로 일본정부의 허가를 얻어 화폐적 성질을 가진 일람불어음인 제일은행권을 발행하였다. 이것은 제일은행의 한국 중앙은행화를 시도한 본격적인 기도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정부가 존속하고 宋秀萬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 상민들에 의한 반대운동이 활발했으므로 그 유통이 크게 확대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이 조선의 재정자금을 이용하여 성장한 제일은행은 1905년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에 의한 화폐재정정리사업이 시행될 때에는 백동화를 정리하는 담당기관이 되고, 조선의 중앙은행으로서 은행권을 발행하는 특권을 공인받았으며, 또한 중앙금고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제일은행의 중앙은행화는 금융 침략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다음에서 보는 화폐발행권의 장악과정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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