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1.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
  • 2) 차관 제공
  • (5) 차관과 민족운동

(5) 차관과 민족운동

 조선의 개항이후 차관도입은 외세저항 민족주의를 생성시킨 또 하나의 다른 인자였다. 다시 말하자면, 차관도입의 악순환은 민족운동을 촉발시킨 도화선의 한 가닥이 된 것이다. 원리금 미상환의 적체는 그 부담이 고스란히 民에게 전가되어 증세로 귀결되었고, 동시에 부수 조건으로 탈취당한 이권 역시 민의 부담으로 이전되어 또한 증세로 연결되었다. 청에 탈취당한 서로전선의 전선세와 독일세미운송선의 운송세 징수가 그 예이다. 당시 한계생존 수준에서 허덕이던 민에게 차관으로 인한 두 측면의 증세는 반외세 민중항쟁의 불길을 당기는 점화기제였다. 동학농민전쟁에서 그 첫 점화가 시동되었다.

㉠ 電報는 민간에게 多弊하니 철폐할 것.

㉡ 電報局은 민간에게 최대의 폐가 되니 혁파할 것.

㉢ 輪船上納 이후 매 結에 磨練米가 추가되어 3∼4斗가 될 정도로 많아졌으니 즉각 혁파할 것.

㉣ 轉運司는 혁파하여 舊例에 따라서 邑으로부터 상납할 것.

(≪續陰晴史≫上 7卷, 고종 31년 6월 24일,<正月全羅道儒生等原情後錄>및<又原情列錄追到者>)

 ㉠·㉡의 전보국은 전선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여기에 서로·남로·북로전선이 포함되는데, 서로·남로전선은 차관도입과 직결된 전선이었다. ㉢·㉣은 세미운송 때문에 도입한 증기기관의 기선, 즉 윤선을 말하는데 10척의 윤선 도입 역시 차관도입과 직간접 관련을 맺고 있다. 모두가 원리금상환의 부담, 윤선·전선유지비의 부담이 차관도입에 따른 반외세 차원에서 동학농민전쟁을 터뜨린 발생원인이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전봉준은 1894년 음력 4월 직접 작성했다고 추정되는 茂長布告文에서 서울 공경으로부터 지방의 수령에 이르기까지 관리 승진·등용, 시장, 과거장에서 자행된 부정 때문에 “나라에 쌓인 빚이 있다(國有積累之債)”고 하여 國債의 심각성을 환기시켰다. 이것은 내국채를 말한 것이지만, 그 상대인 외국채의 존재를 전봉준이 모를 리가 없었다. 사실 1894년까지 도입차관의 총액은 앞의<표 3>에서 확인되듯이 2백 60여만 원으로 1880년대 평균 예산 2백 80여만 원(약 200만 냥)과 맞먹는 거액이었는데다가 당시에 파악된 차관 미상환액 74만여 원은 내국채 총액의 65%였다. 이러한 구체적인 상황을 전봉준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조선에서 차관망국론을 최초로, 그것도 정확하게 인식했던 사람은 전라도 농촌지식인 李沂였다. 동학농민전쟁 초기 전봉준을 방문하여 국내외 정세를 논하면서 ‘반란’에 동참하려 했던 그는 거의 1년 뒤 300만 원 일본차관의 도입 소식을 듣고 탁지대신 어윤중을 질타하는 글을 보냈다.

각하는 차관을 일삼고 있으니 금년 내년 이어가면서 부채의 누적이 많아질 것이니 그 대세는 반드시 땅을 떼어 갚아야할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정말 500년 사직과 삼천리 봉토가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니 후세의 군자가 붓을 들어 죄인을 찾을 때 나는 각하가 자연히 그 首級이라 여겨집니다(李沂,≪海鶴遺書≫ 권 5, 고종 32년 을미,<答魚度支允中書>).

 “땅을 떼어서 갚는다(割地而償之)”는 이기의 차관망국론은 10년 뒤 현실로 다가서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전후한 시기에 의병장 崔益鉉은 1904년에 割地論을 계승하고 나서 1906년 마침내 “차관을 도입하려는 마음은 망국이고 외국에 의존하려는 마음이 화근이다”047)崔益鉉,≪勉菴集≫ 三疏, 갑진 12월 28일.라는 차관망국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1907년 2월 대구를 시발로 해서 전국으로 국채보상운동이 터졌다. 유길준이 전망한 조선의 이집트화, 그러니까 차관 때문에 이집트가 영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1882년의 역사적 사례가 조선에서 재생된 것을 보고 조선민족이 궐기하고 나선 것이다. 세계사에 그 유례가 없는 이 경제적 측면에서의 내셔널리즘이 저항운동 차원으로 번져가는 와중에서도, 일본은 보호국을 식민지로 전환시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대조선차관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진행하였다.

한국을 보다 더 철저히 감독하기 위하여 일본정부는 우리 정부와 1천 3백만 원의 負債를 지우는 계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한 庶民이었던 徐相敦은 일본 담배의 불매운동을 제의하여 전국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한편으로 그는 한국정부가 체결한 1천 3백만 원의 국채를 갚기 위하여 어떤 단체의 조직을 착안했다. 이 구상은 대성공리에 즉각 실천되었다. 빈부·남녀노소·유아들까지 국채경감 운동에 참여했다. 그들이 가져오는 것은 돈만이 아니라, 돈이 없는 사람들은 보석과 때로는 옷가지도 희사했다. 아낙네와 처녀들은 패물과 머리채를 제공할 정도로 희생을 감수했다(尹炳奭,≪李相卨傳≫, 일조각, 1984), 85쪽에서 재인용).

 위의 글은 1907년 6월 27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각국 대표와 세계 신문·방송기자의 이목을 모은 조선 특사의 회견문 일부이다. 李相卨·李儁 특사가 초안을 잡고, 이것을 李瑋鍾 특사가 불어로 작성한 명문의 외교문서이다. 일본의 빈틈없는 침략의 전체상을 간략하고 생생하게 묘사함과 아울러 그 침탈에 대한 조선 민족의 저항을 감동적으로 소개했는데 그 저항의 일부가 위 글에 보이는 국채보상운동이다. 이것은 바로 일본의 차관공세에 대한 조선 전민족의 저항이었다. 당시 세계에 유례가 없었던 경제적 민족주의의 폭발이었다.

<金正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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