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1.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
  • 3) 철도 부설
  • (1) 열강의 각축과 철도 부설권의 향방

가.<조일잠정합동>과 철도 부설권 문제의 대두

 일본은 甲申政變(1884)의 실패 이후 한국에서 약화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淸과 一戰을 불사한다는 각오로 군비확충에 박차를 가했다. 10년 후 東學農民戰爭(1894)이 일어나 청이 한국에 3,000여 명의 진압군을 파견하자, 일본은 곧바로 6,000여 명의 군대를 京仁지역에 포진시켰다. 그리고 한밤중에 경복궁에 침입하여 친일정권을 세우고(1894년 7월 23일),<朝日暫定合同>(동년 8월 20일)과<朝日攻守同盟>(동년 8월 26일)을 체결하였다.048)日本外務省 編,≪日本外交文書≫27-2(東京:日本國際連合協會, 1936), 문서번호 629 및 636. 일본이 한국정부를 협박하여 체결한<조일잠정합동>의 제2항에는 한국정부가 경인선과 경부선의 부설권을 잠정적으로 일본에 許給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049)國會圖書館 立法調査局,≪舊韓末條約彙纂≫上(1964), 50쪽.

 그렇지만 이러한 사정은 1년만에 급변하였다.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정세가 유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청에 대한 전쟁에서 승리하여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臺灣과 遼東半島를 할양받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일본 세력이 증대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프랑스·독일은 함께 일본에 압력을 가해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주도록 하였다. 흔히 말하는 三國干涉이 그것이다.050)崔文衡,≪列强의 東아시아 政策≫(一潮閣, 1979).

 삼국간섭은 곧바로 한반도의 정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1895년 5월 4일, 영국·미국·독일·러시아의 주한공사들은 합동으로 한국정부에 공문을 보내어, 철도 등의 이권을 일본에만 許與하는 것은 한국과 다른 나라 商民의 이익에 배치된다고 항의하였던 것이다.051)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舊韓國外交文書≫11(고려대 출판부, 1967∼1973),≪美案≫2, 문서번호 1364(이후≪舊韓國外交文書≫는 생략하고 각국 문서, 즉≪美案≫·≪日案≫·≪法案≫·≪德案≫·≪英案≫·≪俄案≫등으로 표기한다).

 일본세력의 침투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한국정부는 열강의 항의를 적절히 이용하여, 경부선과 경인선의 부설권을 허급할 수 없음을 일본에 통고했다. 그리하여 이미 이 철도에 눈독을 들이고 노선답사까지 마쳤던 일본의 야욕은 일단 좌절되게 되었다.052)≪日本外交文書≫29, 문서번호 342 및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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