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1.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
  • 4) 해운업 침투
  • (1) 일본의 해운정책과 해운 독점(1876∼1882)

(1) 일본의 해운정책과 해운 독점(1876∼1882)

 산업혁명 후 세계의 해운업은 풍력을 이용하는 범선을 증기선으로 대체하고 타인의 화물운송을 목적으로 기업을 경영하는 근대해운업 단계로 발전하고 있었다.140)古島敏雄·安藤良雄 編,≪流通史≫Ⅱ(東京:山川出版社, 1975), 319쪽. 산업혁명으로 상품생산이 발달하고 상품의 집산력이 큰 시장이 연안에 다수 존재해 화물운송량이 계절적 변동에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보장되면서 기선으로 화물과 여객을 대량 수송하는 해운업이 발전한 것이다.

 그런데 동아시아 3국, 즉 청·일본·조선141)조선은 국호가 1897년 10월 ‘대한제국’으로 바뀐 후 통상적으로 ‘한국’으로 불렸으나, 편의상 ‘조선’으로 통일하였다.은 아직 산업혁명을 달성하지 못한 단계에서 외세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선진적인 외국해운업에 의해 항해권을 침탈당하였다. 항해권은 상품의 유통거점을 연결하는 항로를 개설하여 기선을 정기적으로 운항함으로써 확립할 수 있는데, 연안무역이나 대외무역의 중요한 기반이었다. 또 해운권의 장악은 유사시 기선에 의해 군대나 군수품을 신속히 수송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해운업의 근대화를 통해 항해권을 회복하는 일은 무역의 진흥을 통한 경제발전과 군사적 우위의 확보를 위해 시급히 이룩해야 할 과제였다. 그러나 3국은 모두 민간자본의 축적이 미약하여 민간해운의 힘만으로는 외국해운업의 침투에 대응할 수 없었으므로, 국가정책적으로 해운업을 보호·육성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3국 중 가장 적극적으로 해운정책을 실시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明治維新을 거쳐 ‘富國强兵’을 목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경제정책의 중심을 무역정책에 두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민간해운의 보호·육성을 기본으로 하는 해운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정책의 밑바탕에는 연해의 항해권이 외국인에게 돌아가면 평상시에는 商權을 빼앗기고 전시에는 형세가 불리하여 독립자주국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 있었다.142)安秉珆,<李朝時代の海運業>(≪朝鮮社會の構造と日本帝國主義≫, 東京:龍溪書舍, 1977), 123∼124쪽. 이러한 정책 아래 육성한 기업이 미쓰비시(三菱)회사였다. 미쓰비시회사는 1873년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기선으로 해운업을 시작한 후 1875년 1월 정부의<제1명령서>에 의해 상해항로를 개설하여 일본 최초로 해외 정기항로를 개시하였다. 그리고 이 회사는 그 해 8월 13척의 정부소유 선박을 무상으로 불하받은 후 다시 舊郵便汽船會社 선박 17척을 불하받아 일본 최대의 해운기업으로 성장하였다.143)日本郵船株式會社 編,≪日本郵船株式會社五十年史≫(東京:同社, 1935), 5∼10·16쪽.
石井寬治 著, 李炳天·金潤子 역,≪日本經濟史≫(동녘, 1984), 78∼81쪽.
미쓰비시회사는 미국·영국 등의 주요 해운기업과 치열한 경쟁 끝에 결국 그들을 일본의 연안항로와 상해항로로부터 배제시킬 수 있었다.

 일본은 고종 13년(1876) 2월 조선에 강요하여<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하고 그 제6·7款과 같은 해 8월에 조인한<부록>제9·10관 및<조일무역규칙>제1∼8則에서 연안무역권과 연안해운권을 획득하여 일본선박의 개항장 출입을 보장받았다. 일본선박은 원칙적으로는 개항장이 아닌 포구 즉, 不開港場으로의 항행이 금지되었으나,<조일무역규칙>제8칙에 의거하여 조선정부나 정부의 免狀을 받은 조선인에게 고용되었을 때는 불개항장으로도 항행할 수 있었다.

  선박
연도
기 선 서양형 범선 일본형 범선(和船)
척수 톤 수 척수 톤 수 척수 톤 수
1876
1877
1878
1879
1880
1881
1882
1
6
13
29
39
51
45
208톤
1,248톤
2,401톤
6,390톤
12,548톤
16,938톤
18,036톤
1


9
118
135
135
200石


628톤
10,024톤
10,617톤
9,946톤
42
318
236
619
495
232
82
965석
2,800톤
23,276석
56,505석
49,058석
22,084석
7,555석

<표 1>1876∼1882년 조선의 개항장에 출입한 일본선박(入港)

*安秉珆,<李朝時代の海運業>(≪朝鮮社會の構造と日本帝國主義≫, 東京:龍溪書舍, 1966), 127쪽.

 조일무역이 발전하면서 일본선박은 앞의<표 1>과 같이 조선의 개항장에 빈번하게 출입하였다. 초기에는 일본형 범선(和船)이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나 1880년부터 그 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대신 서양형 범선의 출입이 현저하게 늘어났으며, 기선도 1877년 6척에서 1882년 45척으로 늘어나 톤수에서는 서양형 범선을 훨씬 능가하였다.

 이 시기에 개항장에 출입한 일본기선은 대개 일본정부가 지원하여 운항한 미쓰비시회사의 기선이었다. 일본정부는 1876년 9월<제2명령서>에 의해 미쓰비시회사에 나가사키(長崎)-부산간의 명령항로(고토〔五島〕·쓰시마섬〔對馬島〕경유, 월 1회 왕복 운항. 이하 기선운항 횟수는 모두 왕복 운항임:자주)를 개설케 하였다. 그 해 11월부터 개시된 이 항로에는 일본정부가 미쓰비시회사에 지원하는 연 25만 엔의 해운업 조성금 중 1/5이 지원되었다. 쌀·콩·우피·金巾(옥양목)·銅 등 상품의 적하량이 점차 증가하자 미쓰비시회사는 1880년 3월부터 항해 정박일수를 단축하여 기선의 운항횟수를 매달 2∼3회씩으로 늘리고 發船地를 나가사키에서 코오베(神戶)로 바꾸었다.144)羅愛子,<開港後 淸·日의 海運業 浸透와 朝鮮의 對應>(≪梨花史學硏究≫17·18, 梨花女大 梨花史學硏究所, 1988), 409∼410쪽. 나가사키는 영국산 면제품의 중개항이었고, 코오베는 오사카(大阪)와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공업지대로, 조선산 쌀의 주요 수요지이면서 금건·방적사·잡화·일본목면 등 수입화물의 주된 매입지였다.145)吉野誠,<朝鮮開港後の穀物輸出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12, 東京:朝鮮史硏究會, 1975), 37∼38쪽.
日本外務省 通商局第一課 編,≪通商彙纂≫166호,<釜山32年貿易年報>(1900년 4월 21일).
따라서 이후 조선과 일본간의 정기항로는 대개 나가사키와 코오베·오사카를 기점으로 하였다. 스미토모(住友)家의 경우는 1880년 9월 오사카와 부산간 항로(코오베·시모노세키〔下關〕·하카타[博多]·나가사키·쓰시마섬 경유, 월 2회 운항)를 열었다.

 1880년 원산이 개항하자 미쓰비시회사는 정부의 명령으로 그 해 3월부터 원산-코오베간 항로(부산 경유, 격월 1회 운항)를 개설하였다. 이 항로에는 해운업조성금과 별도로 항해보조금이 연간 1만 엔씩 지급되었다. 이후 일본상인들이 增航을 요청하고 미국 등 서구열강이 조선과 수교를 맺으려는 움직임이 있자 일본정부는 구미열강이 진출하기 전에 조선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항로를 시급히 확장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일본정부는 미쓰비시회사에 기선 구입자금으로 은화 8만 엔을 10년 동안 무이자로 빌려주기로 하고 1881년 2월 나가사키-露領 블라디보스톡(海蔘威)간 항로(부산·원산 경유, 월 1회 운항, 1889년 봄 코오베까지 연장)를 신설케 하였다. 그 해 5월 기존의 코오베-원산선은 폐지되었다.146)羅愛子, 앞의 글, 411∼414쪽.

 이와 같이 일본은 아직 미숙한 해운기업에 자금지원을 하여 자국의 무역항 및 공업지와 조선의 개항장을 연결하는 항로를 열어 무역확장의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대조선 수출품의 9/10에 가까운 서양제품의 중계무역에서 폭리를 취하는 한편, 값싼 조선 쌀을 공업지대의 노동자에게 공급하여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촉진할 수 있었다. 또 개항초 조선에 들어온 일본상인들은 대부분 모험상인으로 영세하였으나, 일찍이 조선에 진출한 第一國立銀行과 제18·58·102국립은행으로부터 자본을 융통받고 일본정부의 해운지원에 의해 무역품을 신속하게 유통할 수 있어 자본의 영세성을 극복하고 商權을 확대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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