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1.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
  • 4) 해운업 침투
  • (3) 일본해운업과 러시아해운업의 침투확대(1895∼1904)

가. 개항장 증설과 일본의 항로확장

 청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군대와 군수품의 수송을 위해 민간선박도 징발하였다. 청일전쟁 때 동원된 민간기선은 일본우선회사와 오사카상선회사 기선을 포함하여 총 140여 척에 달하였다.165)大阪商船株式會社 編, 앞의 책, 56쪽. 일본은 조선의 官營 기선까지 임대하고, 더 나아가서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강화된 틈을 타 항해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1895년 1월 일본정부는 재정난에 처한 조선정부에 13만 원의 차관을 연 8%의 저리로 제공하는 조건으로 관영 해운기업인 利運社의 기선을 일본우선회사에 위탁·운항케 하였다. 이에 따라 재정개혁에 의해 조운제도를 폐지한 후 이운사를 민영화하여 해운업을 육성하려던 조선정부의 정책은 좌절되었다.166)孫兌鉉. 앞의 글, 273∼276쪽.
羅愛子, 앞의 책, 104∼110쪽.

 그 후 1895년 6월 金嘉鎭이 일본측에 우선회사와의 약정 변경안을 신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167)≪駐韓日本公使館記錄(국역본)≫7(國史編纂委員會, 1992), 171쪽,<郵船會社 約定變更 不可 지시>(1895년 6월). 이 계약은 1896년 2월 俄館播遷으로 甲午政權이 무너진 뒤 새로 들어선 정권에 의해 비로소 파기되었다. 정부소유 기선은 1897년 3월 말 總稅務使 브라운(J. Mcleavy Brown, 柏卓安)에 의해 세창양행에 위탁·운항되었다가 1900년 6월 민간회사인 大韓協同郵船會社에 불하되었다.168)羅愛子, 앞의 책, 110∼113쪽.

 조선연안의 항권장악 기도는 무너졌으나, 일본정부는 일본우선회사와 오사카상선회사를 계속 지원하여 항로를 확장해 나갔다. 노선은 개항장이 鎭南浦(1897)·木浦(1897)·馬山(1899)·群山(1899)·城津(1899)·평양(1899, 開市場)·義州(1904)·龍岩浦(1904) 등으로 늘어남에 따라 신설되거나 변경되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은 경제호황을 맞이하여 수출이 급증함에 따라 해외항로를 대만·남중국·유럽·북미·호주 등으로까지 확장하였는데,169)大阪商船株式會社 編, 앞의 책, 59∼60쪽. 대조선 항로의 경우는 수출증대보다 주요 수입품인 쌀·콩의 수입증대에 더 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쌀·콩의 직송을 위하여 특히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배후에 둔 목포와 군산에 기선이 수시로 기항할 수 있도록 각 항로의 경유지를 조정하거나 일본으로의 직통항로를 열고 정기선 외에도 임시선을 배정하였다. 군산의 경우 직통항로가 개시되기 전에는 江景에 집하된 쌀의 대부분이 군산을 거치지 않고 조선선상에 의해 인천·목포 등으로 수송되었는데, 1901년 4월 일본과의 정기항로가 열리면서 유통로가 바뀌어 상당수의 쌀이 강경에서 군산으로 수송된 후 바로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그래서 1902년말 군산에는 기선의 왕복이 빈번해도 매편마다 만선이 되어 미처 배에 싣지 못하고 부두에 쌓아두는 쌀이 많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170)≪通商彙簒≫제256호,<群山最近貿易槪況>(1903년 2월 13일).

 청일전쟁 후 일본해운업의 정기항로 개설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일본우선회사는 1895년부터 코오베-블라디보스톡선(3주 1회 운항)과 코오베-天津線(시모노세키·나가사키·부산·인천·연대 경유, 4주 1회 운항), 코오베-牛莊線(시모노세키·나가사키·쓰시마섬·부산·인천·연대·太沽 경유, 4주 1회 운항)의 운항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이 회사는 1896년 홍콩-블라디보스톡선(상해·연대·인천·나가사키·부산·원산 경유, 3주 1회 운항, 1899년 가을 폐지)을 신설하였다. 1898년 4월부터는 코오베-천진선 및 코오베-우장선에 배정된 기선이 목포에 기항하였고, 1900년 10월 일본 遞信省의 항로변경령에 의해 목포기항이 폐지된 뒤에는 회사에서 임의로 코오베-인천간의 자유항로를 열어 목포에 임시 기항하였다. 1899년 봄에는 코오베-鎭南浦線(시모노세키·부산·인천 경유, 3주 1회)이, 1901년에는 코오베-태고선(門司·나가사키·부산·인천·연대·여순 경유)이 신설되었고, 코오베-인천간에 임시선(門司·부산 경유)이 부정기적으로 운항되다가 1902년 말에 폐지되었다.171)羅愛子, 앞의 책, 135∼136쪽.

 코오베-블라디보스톡선에 배정된 기선은 1901년 4월부터 부정기적으로 성진에도 기항하였는데, 블라디보스톡과의 직무역에 종사하는 조선상인이 많이 이용하였다. 블라디보스톡은 오래전부터 지리적으로 가까운 함흥 이북의 北關지방과 교역이 활발하였고 당시 성진은 북관지방의 유일한 개항장이었다. 북관지방에서 블라디보스톡·연해주 방면으로 수출하는 물품 중 중요한 것은 식육용 生牛였으며, 노령 연해주지방으로 出稼하는 북관지방 주민도 해마다 늘어 1900년대에 들어와서는 1∼2만여 명에 달하였다.172)梶村秀樹,<舊韓末 北關地域 經濟와 內外交易>(≪秋堰權丙卓博士華甲紀念論叢 2·韓國近代 經濟史硏究의 成果≫, 螢雪出版社, 1989), 162·167∼173쪽.
金載昊,<개항기 원격지무역과 ‘회사’-對러시아 무역과 鏡城天一會社->(≪經濟史學≫ 27, 經濟史學會, 1999), 94∼96쪽.
일본정부는 정기항로의 개설이 유망하다고 보고 일본우선회사에 지시하여 1902년 10월 정기선을 성진에 기항시키고 겨울에는 自由航船인 伊勢丸을 투입케 하였다.173)≪韓國城津ニ神戶浦潮間ノ定期船寄港方在同地分館主任ヨリ稟申一件≫(外務省記錄 3.6.4.13)<城津港ニ定期船寄港ノ儀ニ付上申>(1902년 8월 5일) 및 公 제78호,<郵船會社自由航船伊勢丸冬季中城津ヘ寄港方ノ儀ニ付上申>(1902년 10월 22일). 그런데 1903년 4월 블라디보스톡 거류 崔鳳俊이 원산-성진-블라디보스톡간 항로(월 3회 이상)를 열어 생우 등을 상당량 운송하였으므로, 일본우선회사는 영업에 지장을 받았다.174)≪通商彙簒≫1903년 改 제12호,<城津浦鹽間臨時汽船航路開始>(1903년 4월 20일).
최봉준은 한국의 국권상실 후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오사카상선회사는 1894년 12월말 오사카-인천선(코오베·시모노세키·부산 기항, 월 2회 운항하다가 1901년 이후 매주 1회 항해)의 운항을 재개하고 오사카-부산선은 폐지하였다. 오사카-인천선은 1897년 10월 이후에는 목포에도 기항하였고, 오사카와 인천간에 임시선을 정기선의 2배나 배정하였다. 1899년 4월에는 오사카-진남포선이 개설되었다(코오베·시모노세키·나가사키·부산·인천 기항, 3주에 2회 운항하다가 1901년 이후 매주 1회 항해). 1900년 8월 오사카-군산선(월 2회 부정기적 운항)이 개설되어 對日 직통항로가 개통됨에 따라 군산의 외국무역은 발전하였으나, 외국무역의 10여 배에 달하였던 연안무역은 크게 위축되어졌다. 오사카상선회사는 1900년 10월에는 인천-목포-부산간 연안항로(월 4회 운항)를 개시하고 도중에 군산과 마산에도 기항하도록 하였다. 1901년 4월 이 항로는 폐지되고 대신 ‘마산-군산 經過 오사카-인천선’(코오베·시모노세키·부산·마산·목포·군산 경유, 월 2회 운항)이 개설되었는데, 1904년 2월 항로를 단축하고 오사카-군산선이라고 개칭하였다. 오사카상선회사는 1902년 2월에는 오사카-부산선(코오베·시모노세키·하가다·嚴原 기항)을, 그 해 9월에는 오사카-원산선(코오베·시모노세키·부산 기항)을, 1903년 하반기에는 인천-진남포선(1904년 6월 안동현까지 연장하여 인천·안동현선으로 개칭)과 인천-군산선을 재개 또는 신설하였다.175)大阪商船株式會社 編, 앞의 책, 62·189·190쪽.
羅愛子, 앞의 책, 136∼138쪽.

 이상 오사카상선회사가 개설한 항로는 일본정부의 지시에 의한 명령항로가 대부분이지만, 일단 자유항로로 개설되었다가 명령항로로 지정되어 보조금을 지급받은 것도 있었다. 이 회사는 1903년 8월 체신대신과 외무대신에<한국항로 개량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하여 기존의 항로 개량 및 항로 신설에 대한 계획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오사카상선회사는 항로 개량책에 대해 “(일본과) 조선간의 무역을 유발하고 한국 각지의 이민을 장려하며 경부철도와 함께 청국과 한국의 경영에 적지 않은 효과가 있을 것”176)≪韓國及北淸航路ノ改良竝ニ補助ノ義ニ關シ大阪商船會社ヨリ請願一件≫(外務省記錄 3.6.3.63),<請願書>(1903년 8월).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여 한국의 식민지화를 앞당기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일본의 해운기업은 개항장이 증설될 때마다 항로를 확장하여 조선의 해운권을 거의 장악하면서 무역확대를 꾀하였다. 특히 곡물의 집산지인 개항장과 일본과의 직통항로가 늘어나 쌀의 유출이 촉진되었고 연안무역이 외국무역으로 전환하여 연안무역에 종사하는 조선상인의 상업은 위축되었다. 반면 일본상인은 일본기선을 이용하여 대외무역은 물론 명태·해초·곡류·수입품 등의 연안무역에서도 상권을 침탈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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