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1.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
  • 4) 해운업 침투
  • (4) 외국해운업의 불개항장 침투

가. 조선인 명의의 외국선박 운항과 조선정부의 정책

 1880년대 후반 이후 민간인의 외국선박 도입과 외국상인의 개항장 밖으로의 행상이 본격화하면서 외국선박의 불개항장 출입이 늘어갔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외국선박은 원칙적으로는 불개항장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조선인에게 고용되었을 때에는 불개항장으로도 항행할 수 있었다. 또 외국선박은 일정한 시간외에는 짐을 부리거나 실을 수 없었으나 조선인에게 고용된 외국선박은 그러한 제약이 없었으므로, 외국인 운송업자들은 표면상으로만 조선인의 명의를 빌려 연안포구는 물론 河岸포구로도 침투하였다. 외국인에게 명의를 빌려준 조선인 중에는 관료도 있었다. 특히 인천항 경찰관·이운사 사무관을 지낸 禹慶善과 부산항 경찰관·기선회사 간사를 지낸 朴琪淙은 해운업관계 업무에 종사하면서 일본인 운송업자와 결탁하여 명의를 빌려주거나 동업을 하여 불개항장으로의 침투를 도왔다. 이러한 행위는 일본의 해운권 침탈을 가져와 해운업에서의 민족자본의 성장을 저해하였다.183)藤永壯,<開港後の‘會社’設立問題をめぐって>(上)(≪朝鮮學報≫140, 東京:朝鮮學會, 1991), 65∼75쪽.
羅愛子, 앞의 책, 231∼239쪽.

 조선정부는 기선 등 외국선박의 도입이 본격화하자 우선 1886년 7월<政府允許洋船赴未通商口岸章程>을 제정해 서양선박의 구입 및 운항절차를 정하였다. 그리고 외국선박을 임대하려면 통리아문으로부터 항행인가증인 憑票를 발급받도록 하고, 임차기간을 2개월로 제한하되 기간을 연장하려면 빙표를 새로 발급받도록 했다.184)孫兌鉉, 앞의 책, 239쪽. 1894년 이후에는 빙표를 각 항 감리서에서 발급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1900년 이전까지 대체로 외국선박의 불법적 운항을 철저히 단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빙표 수수료나 약간의 상납금을 대가로 불법을 눈감아주어 외국해운업의 침투가 조장되기도 하였다. 원산거류 타케노 코노베(武野伊平)와 니시지마 류조(西嶋留藏)는 1893년 3월말과 6월말부터 각각 조선인의 명의를 빌려 기선 壽都丸과 元山丸으로 원산과 불개항장인 鏡城간의 운송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원산감리와 교섭해 통리아문에 일정액의 상납금을 내고 감리서에 순익의 몇 %를 상납하면 임차기간의 제한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영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을 얻어냈다.185)≪日本外交文書≫26, 1893년 9월 8일. 또 한강에서의 외국기선의 항행은 금지되었는데도 통리아문은 1892년에 10만 냥의 차관제공의 대가로 청상 同順泰 등에게 한강에서의 기선운항권을 허용하고 세곡운송권까지 부여하였다.186)金正起,<朝鮮政府의 淸借款導入(1882∼1894)>(≪韓國史論≫3, 서울대 국사학과, 1976), 476∼477쪽. 법적 제약으로 청상은 명의상 通惠公司라는 조·청합작회사를 설립하여야 했지만, 결국 외국해운업의 강운업 침투를 허용한 것이었다.

 외국선박의 불개항장 운항에 대한 통제는 1899년 7월<國內船稅規則>이 개정되고 1900년 3월 농상공부 통신국이 通信院으로 승격·독립되어 외국선박의 구매와 고용인허 등의 해운업무를 맡으면서 강화되었다. 통신원은 2개월의 빙표 유효기간 제한규정을 엄격히 지키도록 하여 외국선박의 장기간 임대를 막고, 외국선박의 임차 자체를 억제하기 위해 임차에 대한 免狀 발급기관을 각 개항장의 감리에서 중앙의 통신원으로 전환하였다. 나아가 통신원은 당시 조선인이 운항하고 있는 외국선박의 현황을 조사하여 이에 대한 통제를 하였다.187)羅愛子, 앞의 책, 75∼77쪽.

 이러한 통제강화책의 밑바탕에는 당시 일본인에게 빼앗기고 있던 항해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고, 이는 곧 1900년에 官民이 합동으로 설립한 大韓協同郵船會社를 육성·보호하려는 정부의 민간해운 육성책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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