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1.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
  • 5) 이권 탈취
  • (2) 전기·전선 이권

(2) 전기·전선 이권

 전기는 근대화를 추구하는데 있어 기간산업으로 커다란 비중을 갖고 있으며, 전선의 경우는 정보 전달의 기본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에 전기와 전선에 대한 한국정부의 관심은 상당히 컸다. 또 다른 한편 선진적인 기술과 지식을 갖고 있었던 열강들의 입장에서 전기와 전선은 한국에 대한 자신들의 경제적 이권을 실현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한국정부도 주체적인 입장에서 그 개발에 주력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그 결과 열강의 이권 쟁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기이권이 한국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열강의 손에 넘어가게 된 대표적인 사례는 대한제국정부가 산업진흥정책의 하나로 추진했던 漢城電氣會社의 성립 과정과 거기에 관계하고 있는 미국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240)노인화,<대한제국시기의 한성전기회사에 관한 연구-광무개혁과 미국측 이권의 일양태->(≪이대사원≫17, 이화여대, 1980) 참조. 경인철도 부설권과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차지했던 모오스의 동료인 콜브란(A. H. Collbran)과 보스트윅(H. R. Bostwick) 양인에 의해 추진된 전기사업의 독점권 요구는 고종의 빈번한 洪陵 행차를 그 구실로 삼고 있었다. 콜브란 등은 고종의 홍릉 행차에 소요되는 경비와 번잡을 피하는 길은 전차를 가설하는 데에 있다고 고종에게 상주하였고, 고종도 그 취지에 찬성하여 곧 육군총장 李學均에 명하여 교섭을 추진하도록 하였다.241)윤병석, 앞의 글, 120쪽.

 이리하여 한성전기회사는 광무 초기인 1898년 1월 산업진흥정책의 일환으로 황실의 주도 아래 미국측의 기술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으며, 이 회사가 추진한 주요 사업으로는 전차노선의 부설·경영, 전등의 가설, 전화사업 등이었다. 그러나 그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업추진 주체인 황실측의 주체적인 자세의 결여와 자본·기술의 부족, 미국측의 교묘한 수법으로 인하여 운영권이 미국측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1904년 7월 韓美電氣會社로 개칭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한미전기회사는 표면적으로는 황실과 미국측이 똑같이 출자하고 그 주식도 똑같은 비율로 소유하는 합자회사의 형태를 띠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본사를 미국의 코네티컷(Connecticut)州로 이전하고 그 州法의 지배를 받는 미국회사로 바뀌고 말았으며, 사장 또한 한성전기회사 설립의 미국측 책임자였던 콜브란이 담당하였다.

 한편 한성전기회사에 부여되었던 전기사업 특허권도 한미전기회사로 이전되어 미국측 이권의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측은 당시 한국내에서 미국인 사업에 대해 민중들의 반발이 심했던 것을 고려해, 한미간의 합자회사인 한미전기회사의 소속 재산은 한국정부가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여 그 책임마저 한국정부에게 전가시키고 있었다.

 이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한국에 대한 침략을 보다 노골화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미국세력의 구축을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한미전기회사에 대한 매수작업을 본격화하였다. 그 결과 한미전기회사는 1909년 일본측 국책회사로 사업권만을 획득한 채로 아직 영업조차 시작하고 있지 않았던 日韓瓦斯會社에 매각되고 말았다. 즉 일본의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일한와사회사가 일본의 ‘國策上의 理由’로 한미전기회사를 매입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한미전기회사의 이권을 허여해 주었고 자본금의 반을 투입하였던 고종은 전적으로 제외되어 있었으며, 콜브란은 자신의 자본만 회수하여 영국으로 떠나버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콜브란은 자신에게 맡겨져 있던 고종 명의의 주를 자의로 매각하였고, 이 사실에 대해 고종이 추궁하자 고종이 사실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고만 말하고는 일체 언급을 회피하였다. 결국 고종은 자신 명의의 주마저도 회수하지 못하였고, 전기 이권은 이제 일본측으로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청일전쟁 이후 전선이권의 판도를 보면, 모두 일본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그들은 경인 지방과 일본 본국간의 신속한 전신 연락 때문에 이에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일본은 남로전선이 자주 불통된다는 것을 빌미로 한성·부산간에 남로전선 외에 그들의 군용선을 새로이 따로 설치하겠다고 요구하는 한편으로는 경인간에 한국정부의 허가도 없이 군용 전선을 불법 가설하였다. 일본은 이미 인천에 병력을 파견할 때 野戰電信隊 800여 명을 인천과 부산에 상륙시켰던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주권 침해라 하여 강력히 거부하였지만, 끝내 일본은 부산·대구·충주를 거쳐 서울에 이르는 경부간 군용전선을 불법 가설하였다. 그리고 그 해 8월<暫定合同條款>을 체결하여 불법 가설한 경부·경인간 군용전선을 강제로 합법화시켰다.242)≪高宗實錄≫, 고종 31년 7월 20일,
≪日本外交文書≫27, 사항 8, 문서번호 428∼442.

 일본의 불법 가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전주·군산간과 전주·강진간에 전선 가설을 추진하였다. 왜냐하면 전주 이남의 전라도에는 전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라도는 농민군의 근거지인 동시에 농산물과 해산물을 목표로 삼은 다수의 일본 상인과 어민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목포 개항을 요구하고 있었다.243)≪日案≫3, 문서번호 3048·3109·3167. 이 군사적·경제적 필요성에서 전주로부터 서북해안의 군산과 남쪽 해안의 강진에 이르는 호남선의 착공을 8월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이 전선을 가설하기 위해 電柱·기술자 등 수백 명을 부산에서 파견하기로 하였는데, 9월말 경 중지되었다.244)≪日案≫3, 문서번호 3175. 그 이유는 戰場이 북진함에 따라 전라도 전선 가설의 일을 중지하고 그 인원을 인천으로 보내 경성 이북에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지게 되자 일본은 이제까지 華電局에서 관할하던 西路電線을 전리품으로 접수하여 그들의 군용으로 專用하기 시작하였다.245)≪駐韓日本公使館記錄(번역본)≫5(국사편찬위원회, 1990), 鑛道·電線·開港貸金公債(上), 機密送 제12호, 鐵道·電信條約의 件.
≪日案≫3, 문서번호 3987.
엄연히 서로전선도 1885년 청국과 조약을 맺을 때 관리는 화전국에서 하더라도 소유권은 한국정부에 있는데도 청국의 소유로 못박아 전리품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곧이어 北路電線의 관할권마저 강탈해 갔지만 우리 정부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제 한국정부의 관할권은 상태 불량의 남로전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전용인 경부간의 군용전선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전지역의 전신 연락은 日本軍用電信所에 의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894년 말에는 조선인의 公衆電信을 경인·경부간의 군용전선에서 취급하기도 하였지만 국문 전보를 취급하지도 않았거니와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쉽사리 이용하려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민족적 울분으로 일본 군용전선을 파괴·절단하는 사건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은 대륙침략의 가장 중요한 바탕의 하나로 전신권의 완전강탈을 획책하여 1895년 1월 이른바<韓日電線設置條款續約改正案>(全 13조)을 만들어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에게 그대로 한국정부와 체결할 수 있도록 훈령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종래 조선국에서 상당한 전기 기술자를 양성하여 전선건설·전기통신의 업무를 적당히 시행할 수 있을 때까지 이웃나라의 우의에 따라 조선정부를 대신하여 조선국내에 이미 건설한 전선 및 장래 건설할 일체 전선을 수축 관리하고 또 통신업무를 시행한다.

제2조. 앞의 제1조의 취지에 따라 부산·한성간 및 한성·인천간 그리고 한성·평양·의주간의 전선으로 공중통신의 취급을 개시한다.

제3조. 조선정부가 건설에 관계한 한성에서 공주·전주를 거쳐 부산에 도달하는 전선과 한성·원산간의 전선은 조선정부에서 상당한 댓가로서 차제에 이것을 일본정부에게 양도하고 일본정부는 적당한 수리를 하여 공중통신의 취급을 개시한다.

제8조. 조선정부 본 조약에서 내건 전신을 보호하며 파손할 우려를 없애기 위한 형률을 제정하여 연도 지방관에게 戒諭하여 이를 행하게 한다. 만약 違犯하는 일이 있을 때는 속히 범인을 문책하고 그 손해를 배상시킨다.

제11조. 1883년 3월 3일(음력 1월 24일) 체결한<韓日海底電線設置條款>제1조 및 제2조에 기재된 만 25년 특허기한은 다시 본 조약을 체결하는 날로부터 새로 계산할 것을 특별히 약정한다.

제12조. 1885년 12월 21일(음력 11월 16일) 체결한<海底電線設置條款續約>은 본 조약 시행일로부터 폐지한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번역본)≫5, 鐵道·電線·開港賃金公債 下, 機密送 4호, 日韓電線設置條款續約改正案).

 이와 더불어<韓日電線條約秘密副約案>도 추가로 만들어 앞으로 25년 동안은 일본국의 동의를 얻은 후가 아니면 타국 정부 또는 타국 회사에게 해저 전선이든 육상선을 막론하고 넘길 수 없음을 특별히 약정한다는 조항을 만들었다. 여하튼 일본의 의도는 전년에 맺어진<잠정합동조관>을 더욱 구체적으로 명문화시키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 국내의 기설 전선 및 앞으로 건설하는 일체의 전선 수축과 관리 및 그 업무를 대행함으로써 완전히 한국의 전신사업을 독점적으로 장악하려는 목적이었다.

 훈령을 받고 교섭을 개시한 이노우에공사는 한국정부에서 이 조약안에 대해 쉽게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한 반발에 접하게 된 애로점을 본국에 회답하고 있다. 즉, 한국정부에서는 “서로전선의 관리를 청국이 행할 때는 일본에서 이를 몹시 비난하였는데 이제 그 일본이 도리어 조선의 전선을 전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것은 천만부당하다”라고 강력히 반박하고 일본측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던 것이다.246)≪駐韓日本公使館記錄(번역본)≫5, 機密送 12·13·16호. 이에 대해 이노우에공사는 조선인은 사리에 어둡고 의심이 많은 점과 꽤나 도도한 품성을 가지고 있어 어느 정도 위압과 압력을 가하지 않고서는 결말을 보기가 어렵다는 점과 이 조약이 조선인의 독립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여 우려하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아울러 한국정부의 반발을 무마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247)≪駐韓日本公使館記錄(번역본)≫5, 機密 제26호, 鐵道電信條約의 件. 즉, 일본이 점거하고 있는 전선을 다시 한국정부에 반환하고 그 대신 일본 전신기사를 파견하여 관리하고 또한 비밀조약을 맺어 앞으로 전쟁 기타의 사변이 일어나 조선 전선을 필요로 할 경우에는 수시로 접수하여 관리할 수 있도록 약정하면 일본의 이익도 보장받고 한국정부 뿐 아니라 다른 열강들의 간섭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형식적으로는 반환해도 실질적으로는 일본이 지배하는 방향을 취하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노우에공사의 반환 건의를 거절하고 삼국간섭 직전까지 조선의 모든 전신선을 일본 관리하에 넣을 것을 강조하여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게 하였다. 특히 의주전선(서로전선)에 대해서는 그들이 강구한 조치가 모두 불법인줄 알면서도 일본정부의 수중에 넣어두는 것은 장래를 위해 극히 필요한 조치임을 거듭 확인하는 훈령을 내리고 있다.248)≪駐韓日本公使館記錄(번역본)≫5, 機密 제20호, 義州電線所屬의 件.

 그런 동안 삼국간섭에 접하게 되어 열강의 견제가 심해지고 설상가상 乙未事變으로 인해 일본의 정치적 입지가 위축됨에 따라 그들의 야망은 실현되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한국정부의 일본의 독점적인 전선 이권 침탈에 대한 저항도 거세어짐에 따라 1896년 7월 서로·북로전선은 한국정부에 반환하게 되었다.249)≪日案≫3, 문서번호 4089. 그러나 京釜軍用電線은 그대로 점거하여 그들의 수비병을 배치하여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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