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2. 일제의 토지 침탈
  • 1) 토지관계 조약과 정부의 대응
  • (1) 토지관계 조약과 일제의 식민정책

(1) 토지관계 조약과 일제의 식민정책

 일제가 침탈한 토지소유권을 최종적으로 일본 민법으로 ‘法認’한 조치는 1910년부터 시작한 토지조사사업이었지만, 그 출발점은 1876년 2월 2일 일본의 군사적 위협아래 강제로 체결한<조일수호조규>였다.260)불평등조약에 대한 연구는 다음이 참고된다.
이현종,≪開港場硏究≫(일조각, 1975).
김경태,≪한국 근대경제사연구≫(창작과 비평사, 1994).
김정기,<조선 불평등조약의 間行權 한성 開棧權 분석>(김용섭교수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한국 근현대의 민족문제와 신국가건설≫, 지식산업사, 1997).
또 일본인의 연구로는 다음이 있다.
四方博,<朝鮮に於ける近代資本主義の成立過程―その基礎的 考察>(≪朝鮮社會經濟史硏究≫上, 國書刊行會, 1976).
奧平武彦,<朝鮮ノ條約港ト居留地>(≪朝鮮社會法制史硏究≫, 京城帝大 法學會, 1937).
이 조약에서 토지와 관련된 내용은 부산을 비롯한 3곳에 通商港을 개설하여 조계를 설치하고, 여기에 일본인이 토지와 가옥을 賃借·造營할 수 있는 거주권을 주되 임대료를 지불할 것과, 조계를 중심으로 사방 10리 이내에서 일본상민의 상업활동과 통행을 허락한다는 것 등이었다.261)國會圖書館 立法調査局,≪舊韓末條約彙纂≫上(1964), 13·21쪽.

 조선정부는 일본인의 행동반경을 일정범위내로 제한하고, 일본인에 허가한 부동산권도 소유권이 아닌 이용권에 한정하여 개항의 영향을 최소화하려 했지만, 그 자체가 중계무역을 통해 상업이윤을 추구한 일본상민에게 통상무역의 거점을 마련해 준 조치였다. 이때부터 중세국가 조선은 전통적인 왕토사상에 배치되는 외국인의 토지소유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세계자본주의, 구체적으로 일본자본주의는 자기의 필요에 따라 이러한 요구를 조선에 강도 높게 요구했으며, 조선은 조약개정운동 등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수세적 자세로 여기에 대응해 갔다.

 다음으로 문제가 된 조약은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맺은<조미수호통상조약>이었다. 이 조약에서 조선정부는 지대 지불을 조건으로 미국이 조계내에서 토지나 가옥을 임차하거나 주택 및 창고를 건축하는 것을 허가했다. 그 수준은<조일수호조규>의 내용을 구체화한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 때 문제가 된 내용은 미국에 부여한 최혜국대우였다.262)≪舊韓末條約彙纂≫中, 300∼301쪽. 한국은 미국에 임차권을 준 반면, 조선은 미국내에서의 모든 부동산권을 소유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선 조선은 미국과는 처한 자연적·경제적 조건이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조선은 이 조약을 계기로 모든 열강들에게 최혜국대우를 부여했으며, 열강은 이를 빌미로 조선에 이권침탈을 강요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이 이를 가장 잘 활용하여 최대의 이권을 확보해 갔다.263)이 때 일본은 1882년 7월 間行里程을 사방 100리로 확장한다는 내용의<조일수호조규속약>을 체결하여 일본상인이 조선의 중요 요충지를 자기 활동범위로 포괄할 수 있도록 했다(≪舊韓末條約彙纂≫上, 35∼37쪽).

 이와 아울러 일본인들이 조선내 토지를 합법 혹은 불법으로 침탈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조약은 1883년 11월 26일 영국과 맺은<조영수호통상조약>이었다. 이 조약에서 조선은 영국인에 제물포·원산·부산·한양·양화진 등의 지정 장소내에 있는 토지 가옥에 대해 暫租 혹은 永租를 할 수 있도록 했으며, 나아가 조계 밖 10리까지 이를 확대 허용했다.264)≪舊韓末條約彙纂≫中, 321∼236쪽. 이 조약은 이후 모든 통상조약의 모델이 되었으며, 일본 미국과 맺은 조약에도 소급 적용되었다. 이 같은 유형의 통상조약은≪舊韓末條約彙纂≫中·下에 실린 구미 각국과 맺은 수호통상조약을 참조. 조선정부와 조약 대상국가간에 합의하여 설치한 조계의 경계를 넘어서 까지 외국인이 토지를 매득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것이다. 조선 국법이 적용되는 조계 밖 지역은 地契制度가 실시된 조계지역과 달리 전통적인 방식으로 토지거래가 이루어졌으며, 외국인도 이 방식에 의거하여 토지를 매득해 가게 된 것이다. 특히 일본인은 전통적 거래제도를 적극 활용하여, 조계 밖 10리내 지역에서는 합법적으로, 조계 10리 밖의 지역에서는 불법적으로 몰래 토지를 매득하는 잠매 행위를 통해 조선의 토지를 차지해 갔던 것이다.

체 결 일 조 약 명
1877. 1. 30
1879. 8. 30
1879. 8. 30
1884. 10. 3
1897. 11. 18
1897. 10. 16
1899. 6. 2
1902. 5. 17
1886. 1. 31
1891. 1. 21
釜山港租界條約
元山津開港豫約
元山津開港豫約決定書翰
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
仁川日本居留地擴張에 關한 駐韓各國使臣會議協定書
鎭南浦及 木浦各國租界章程
群山 馬山浦 城津 各國租界章程
馬山浦 日本專管租界協定書
絶影島地所借入約書
月尾島地所借入約書
1900. 3. 18
1900. 3. 18
1899. 11. 13
1904. 2. 25
1904. 3. 23
1908. 1.
1908. 3. 30
1908. 3.
1913. 4. 21
 
巨濟島不租借에 關한 韓露條約
馬山浦地所 租借에 關한 韓露條約
平壤開市에 關한 駐韓使臣의 宣言
義州開市에 關한 韓國外部大臣 宣言
龍岩浦開市에 關한 韓國外部大臣 宣言
咸北 富寧郡 淸津開放에 關한 件
淸津土地管理에 關한 協定書
淸津官有地 賣下規則
在朝鮮各國居留地制度廢止에 關한 朝鮮總督府外事局長과
當該締約國領事官協議會議定書

<표>항구별 조계조약과 조차조약

*國會圖書館 立法調査局,≪舊韓末條約彙纂≫中·下(1964).

 자본주의 열강은 통상조약을 기본조약으로 하고, 개항장마다 별도로 위와 같은 조계 및 조차 조약을 체결하여 침략의 거점을 확보해 갔다. 일본과는 1877년 1월 30일<부산항 조계조약>, 1879년 8월 30일<원산진 개항예약>, 1883년 9월<인천항 일본조계조약> 등을 체결했다.265)≪舊韓末條約彙纂≫中, 1∼13쪽. 이들 조약에는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내의 토지권을 운영하기 위해 지계제도를 도입하고 있었다. 지계제도는 조선국가의 전통적인 토지권 관리제도와는 다른 방식의 토지관리제도였으며,<인천항 일본조계조약>에서 첫 선을 보였다. 그리고 잇달아 체결한<仁川 華商地界章程>(1884. 4. 2)·<인천 제물포 각국 조계장정>(1884. 10. 3) 등을 거치면서 형태를 갖추어 갔으며,<진남포·목포 각국 조계장정>(1897. 10. 16)에서 가장 완비된 모습을 보였다.266)≪舊韓末條約彙纂≫下, 427·299∼311쪽 및 위의 책(中), 311∼338쪽.

 지계제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조계 구역내의 토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시가지 계획에 따라 구획을 나누어 토지대장을 만들었다. 구획한 구역은 公拍法(競貸)에 따라 대여(租與)하고 지계를 발급했다.267)≪舊韓末條約彙纂≫中, 11쪽. 이것은 借地계약이었지만, 지계로 공인해준 권리는 제3자 대항권이 인정된 ‘永遠租與’한 소유권적 권리였으며, 이전과 상속이 보장되었다. 借主는 그 대가로 조선정부에 지세를 부담하도록 했다.268)≪舊韓末條約彙纂≫中, 12쪽. 조계내의 토지는 조약국 인민 외에는 그 권리를 소유 또는 매수할 수 없도록 했다. 그리고 토지대장의 관리를 비롯한 행정사무는 법인인 租界公社를 설립하여 담당하도록 했으며, 별도의 조선관리를 두어 등기소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다.269)≪舊韓末條約彙纂≫中, 327쪽. 지계제도는 조선정부로부터 토지권을 보장받으려는 외국자본과, 외국인의 소유지를 조계내로 제한하려는 조선정부가 탄생시킨 절충물로, 일종의 ‘근대적’ 부동산등기제도였다.

 일본자본주의는 통상조약과 조계조약을 근거로 한국내에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했지만, 저임금의 기반으로 주요 수입품이었던 쌀은 조선내의 수급사정에 곧바로 영향을 받기 때문에 조약에서 규정한 방식만으로는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없었다. 이를 영구히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불안정한 무역체제가 아니라 한국농업을 직접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270)일본자본주의와 지주제에 대하여는 다음이 참조가 된다.
楫西光速 外,≪日本におけゐ日本資本主義の發展≫(全)(東京大 出版會, 1952).
大內力,≪日本資本主義の農業問題≫(東京大 出版會, 1952).
中村正則,≪近代日本地主制史硏究≫(東京大 出版會, 1979).
일제는 청일전쟁이후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민척식’사업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겼다.271)일제의 척식 이민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조기준,≪한국자본주의성립사론≫(대왕사, 1973).
金容燮,<일제의 초기 농업식민책과 지주제>(≪韓國近現代農業史硏究≫, 一潮閣, 1992).
최원규,<일제의 초기 한국식민책과 일본인 농업이민>(≪동방학지≫77·78·79 합집, 1993).
정연태,<대한제국 후기 일제의 농업식민론과 이주식민책>(≪한국문화≫14, 1993) 등.
이것은 일본인이 한국에 건너와 정주하며 직접 농업에 종사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상업활동을 위해 맺은 통상조약으로는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일제는 일본내의 여건을 정비하는 작업을 추진하는 동시에 한국내의 조건도 여기에 적합하도록 조정하거나 강요했다.

 이 때 세간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작업은 일본인이 한국에 자유롭게 건너올 수 있는 제도, ‘自由渡韓’을 실현하는 문제였다.272)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이 참고가 된다.
김용섭,<광무년간의 양전지계사업>(≪한국근대농업사연구≫하, 일조각, 1984).
최원규, 위의 글.
木村健二,≪在朝日本人の社會史≫(未來社, 1989).
일본은 당시 이민보호법을 제정하여 해외이민을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을 한국에 이주시켜 지배를 위한 인적 기초를 구축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273)≪皇城新聞≫, 1901년 8월 24일,<自由渡韓>.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은 입장이 서로 달랐다. 일본인은 일본에 거주하든 한국에 거주하든 여기에 적극 동조한 반면, 한국인은 그 궁극적인 목표가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있다고 판단하고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었다.274)≪皇城新聞≫, 1901년 10월 12·10·14일, 論說. 그렇지만 일본제국의회는 일본인의 여론을 바탕으로 상민의 ‘자유도한’과 부동산 점유를 인정하는<이민보호법 중 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다.275)≪大日本帝國議會誌≫5, 1246·1254·1255쪽 및 1259∼1260쪽. 일본정부도 여기에 근거하여 여러 이주정책을 강력히 추진해 갔다. 일본 각지에서도 한국으로의 이주가 커다란 이슈로 대두되었으며, 지방자치단체나 지주·자본가 단체는 한국 각지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인물·풍속·토질·농업·상업 등 각 방면에 걸친 조사작업을 벌였다.276)≪皇城新聞≫, 1902년 1월 13일,<移民現狀>.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드디어 완전한 ‘자유도한’을 실현시켜 일본인이 한국을 자국을 여행하듯 여권없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일제가 노골적으로 한국‘척식이민’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척식사업을 방해한 또 하나의 조건은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금지한 한국의 국내법과 국제조약이었다. 당시 한국이 국내법과 조약에 근거하여 열강과 대적하기에는 대단히 무력했지만, 이것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일본자본의 투기활동을 규제하고 저지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후술하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조선정부의 법적 강제력을 무력화시키면서 토지를 잠매하여 직접 농사경영을 시도했다. 그리고 농업 식민사업을 위한 일본내 여론 조성작업도 추진했다.277)이 시기 일본정부의 농업식민사업을 위한 조사작업에 대하여는 金容燮,<日帝의 初期 農業殖民策과 地主制>(앞의 책, 1992) 참조. 여론의 주 논조는 일본자본과 농민이 주체가 되어 明治農法을 이식 보급하여 생산량을 확충하여 일본내의 쌀 문제를 해결하자는 ‘한국농업개발론’이었다. 한국은 농업기술이 미숙하여 개발에 힘쓰는 만큼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으며, 나아가 지가가 저렴하고 金利도 높아 토지 확보에 유리하다고 했다. 또한 조세와 생활비가 적게 들고 자연 환경도 좋아 농업이민의 조건이 매우 양호하다는 식의 선전활동도 강화했다.278)당시 한국의 지가는 일본의 1/5∼1/10정도라고 보고했다. 지가 동향은 다음이 참고된다.
加藤末郞,≪韓國農業論≫(1904), 258쪽.
岩永重華,≪最新韓國實業指針附渡航案內≫(寶文館, 1904), 121쪽.
山本庫太郞,≪最新朝鮮移住案內≫(1904), 80∼81쪽.

 일제의 이민정책은 지주 이민, 자작이나 소작농 이민 등 여러 방향에서 활로를 모색했지만, 대규모 농장을 설립하여 한국농민을 소작농으로 삼는 지주 이민을 정책의 주 방향으로 택했다. 본래 한국으로의 이민사업은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하는 대제국을 건설한다는 ‘滿韓집중이민론’을 근거로 시행되었다. 여기서 주 대상은 소·빈농층이었으며, 이들을 한국에서 자작농으로 육성시켜 한국을 완전한 일본 땅으로 만들려는 계획이었다.279)일본제국주의의 이 같은 야심찬 계획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주도했지만, 처음부터 자금 부족으로 적극 추진하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1927년 중단하고 말았다(大河內一雄,≪幻の國策會社 東洋拓植≫, 日本經濟新聞社, 1982, 57∼74쪽).

 농업경영을 위한 일제의 토지투자는 기본적으로는 개별 일본인 투기자본이 사적인 이익을 꾀하기 위해 추진한 것이었지만, 일본정부가 국책으로 실시한 척식사업의 일환으로 뒷받침해준 사업이기도 했다. 이 점은 일본정부가 국가적 차원에서 일본영사관을 통해 조선정부가 외국인의 소유는 허락하지 않으나 사실상의 점유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니 적극적으로 토지투기에 나서라고 자국민을 독려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280)1902년 일본영사관이 원산 거류민에 내린 지령 참조(山本庫太郞, 앞의 책, 208∼210쪽). 일본 자본주의 총체가 동원되어 한국을 침탈한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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