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2. 일제의 토지 침탈
  • 2) 일제의 토지 확보와 토지법 정비
  • (1) 토지 확보 방법과 성격

(1) 토지 확보 방법과 성격

 일제는 조약이나 인허가를 통한 합법적인 토지거래, 외국인의 토지소유와 점유를 금한 지역에서 불법적이지만 경제적 거래방식의 잠매, 무력을 배경으로 한 강점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토지를 확보해 갔다. 일본제국주의가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일환으로 ‘한국의 일본화’를 목표로 전 국가적 차원에서 토지 점탈 작업을 추진해 간 것이다.303)최원규,<1900년대 일본인들의 토지침탈과 침탈기구>(≪부대사학≫19, 1995).

 일본인들은 관습적 거래제도에 편승하여 토지를 확보하는 잠매 방식을 가장 빈번히 이용하여 토지를 확보해 갔다. 구래의 거래제도는 자본주의 국가의 토지권 관리제도처럼 국가가 제도적으로 제3자 대항권을 보장해 주는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권리보장이 불안정했지만, 일본인이 국가의 법망을 피해 토지를 확대하기에는 더 없이 유리한 제도였다. 이들은 문기에 매득한 자의 이름을 기입하지 않거나, 한국인의 명의를 빌리는 방식으로 토지를 구입했다. 그렇게 해도 소유권 행사에 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도매·투매 등을 막기 위해, 일인자본가는 거간을 중간 매개자로 세워 방매토지를 수소문하고 현장 조사작업을 거친 다음, 촌의 유력자를 보증인으로 세워 계약하는 방식으로 토지를 확보했다.304)일본인들의 한국안내서와 일본농상무성 편,≪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서(각도편)≫(1906)에 대표적인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만약 2중 전매 등의 문제로 피해를 입게 될 경우는 대한제국의 공권력이 약화된 틈을 타 자기의 사적인 무장력을 동원하여 토지를 무단 점령하거나 문기를 탈취하여 강제로 차지하기도 했다. 일본인 지주·자본가의 자본 뒤에는 사적으로 조직한 상비군이나 일본정규군이 있었다.305)藤井寬太郞,≪朝鮮土地談≫(1911).

 일본인 투자자들은 농사개량의 가능성과 투자자금을 고려한 이윤율을 계산하여 上田은 물론 대하천 유역의 下田도 투자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영농, 신변안전, 상품화의 편리성 등을 고려하여 물산집산지나 경부철로 연변지역에 집중 투자했다. 투자대상으로 삼은 토지권은 경작권이 아니라 소유권이었다. 일본인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해 가는 소농층이 방매한 토지에 주로 투자했지만, 목장토·사원전·서원전·시장·산판·섬 등 수익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삼았다.306)최원규, 앞의 글(1995), 542쪽. 이러한 사태를 통해 우리는 향후 일제의 농지정책이 소유권 위주로 처리되고, 지주제를 육성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리라는 것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거래제도는 소유권 보장책에서 미흡했지만, 투기적 자본가들이 토지를 확보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내심 불안해하면서도 이 제도가 일정 시기까지 유지되기를 바랬다. 일제는 이 점을 고려하여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대한제국이 근대화 개혁으로 추진하던 토지조사사업과 토지법 제정 작업을 저지하면서 자국민들의 토지투기를 부추겼다.307)최원규, 앞의 글(1996). 일본인들은 ‘만한경영론’을 주장하는 자국 여론에 편승하여 투자열을 고조시켜 갔으며, 가까운 장래에 잠매가 공인받을 것이라는 확신아래 경쟁적으로 투기전선에 나섰다.308)일제가 한국에 적용한 만한경영론의 실례는 최원규, 앞의 글(1993)과 정연태, 앞의 글을 참조.

 전통적인 전당방식도 일본인들의 토지확보에 좋은 수단으로 기능했다. 대한제국은<전당포규칙>을 발포하여 외국인과의 전당을 금지했지만, 한국인만을 처벌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전당이 소유권의 점탈로 귀결된다는 점을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소유권만큼 규제를 하지 않아 일본인들은 공공연하게 소빈농층을 대상으로 전당행위를 일삼았다. 전당은 이자 획득을 목적으로 생활자금과 영농자금이 부족한 자에게 대금을 융통해주는 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전당업자는 이자획득보다는 토지수탈을 목적으로 전당을 활용했다. 피폐해져 가는 농민의 경제형편을 이용하여 엄청난 고리대를 조건으로 전당계약을 맺고 토지를 빼앗아간 것이다.

 일본인들이 이용한 전당방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계약기한이 경과되는 즉시 아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소유권을 차지할 수 있는 流質계약을 체결하거나, 토지매도증을 첨부하는 방식으로 전당계약을 맺었다. 둘째, 당초 계약할 때 계약서에 빌린 돈보다 과도한 금액을 기입하여 갚을 수 없도록 하는 방법을 채용했다. 셋째, 토지의 사용권이나 수익권을 저당잡는 質權을 설정했는데, 토지사용권을 영원히, 혹은 100년 이상 차지한다는 영대사용수익권을 조건으로 다는 방식을 이용했다. 이것은 소유권은 아니지만 동일한 효과를 볼 수 있고 주 단속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 고리대자본이 즐겨 이용하는 수법이었다. 일본인 고리대자본은 대한제국이 정한<전당포규칙>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으며, 일본에서도 불법으로 규정한 방식을 동원하여 토지를 침탈해 간 것이다. 이들은 자기가 정한 방식을 생존의 위협에 빠진 농민에 강요했고, 한국농민들은 구래의 방식대로 대응하다 결국 토지를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농민은 반발하고 저항도 했지만, 대한제국은 무기력했고 경제력과 무력을 동원한 이들의 강압적 수단에 눌려 토지를 되찾을 수는 없었다. 일제초기 거대지주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방법을 이용해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일본정부와 자본가는 한국의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로부터 인허가를 받아 사업을 벌여 토지를 확보해 가기도 했다. 대한제국은 산업화를 위해 철도나 도로부설, 군사기지 건설, 광산개발 등 각종 토목 건설사업을 추진했으며, 여기에 일본정부나 기업들이 대거 참여했던 것이다. 때로는 스스로 사업계획을 세워 대한제국에 받아들이기를 강요하기도 했다.309)당시 열강의 이권침탈은 이윤상,<제국주의 경제침탈>(한국역사연구회 편,≪한국역사입문≫3, 풀빛, 1996), 104∼119쪽에 소개된 논저 참조. 공공사업부문에서 대한제국정부는 일본의 투기적 자본 공세에 밀려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이들에 인·허가권을 내주었던 것이다.310)한일 합작사업은 일본과 가까운 부산 경남 지역에 집중적으로 시도되었다. 동래온천 영업권·부산항 매립·동래부 하단의 개간·삼랑진의 농원개발 등을 들 수 있다(吉倉凡農,≪實利之朝鮮≫, 1904). 나아가 일제는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말썽이 나면 공공사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한제국정부에 분쟁을 해결해 줄 것을 강요하는 등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확보하는 방향에서 사업을 추진했다. 일본인 자본가는 이러한 조건을 활용하여 필요이상으로 엄청난 토지를 사업 계획면적에 포함시켜 수용하는 동시에 주변토지도 점탈할 수 있었다.

 토지는 給價買土방식으로 수용하였으나 보상가는 시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군사기지는 일시 사용이라는 명목아래 한푼도 지급하지 않고 강제 점유했으며, 반환을 요구할 경우에는 사용목적이 종결되면 반환한다는 당초 약속과는 달리 무력을 동원하여 헐값으로 사들여 일인들에게 분배하기도 했다. 일단 수용이 결정되면 소유자는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국가가 주도하는 사업은 배타적으로 성장해온 사적 소유권을 무력화시키면서 추진되었기 때문에 농민에게는 원망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이에 대응하여 줄기차게 저항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제는 토지수용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일찍이 표명했으며, 강점하자마자 1911년<토지수용령>을 제정 공포했다.311)金正明,≪日韓外交資料集成≫6-中卷(巖南堂書店, 1964), 763쪽.
조선총독부,≪조선총독부관보≫186호, 1911년 4월 17일.

 일본인 지주 자본가가 토지에 투자할 때 제기한 당면 해결과제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킨 소유권 분쟁이나 이중 전당문제였다. 이 문제는 한국인 상호간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매·투매로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 일본인 사이의 권리 다툼으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일제는 외국인 토지소유의 합법화를 쟁취하고 등기제도를 도입해야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인식은 했지만, 당장은 현 제도를 유지하는 편이 토지 침탈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기존 틀내에서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목포흥농협회·목포농회·군산농사조합 등 일인농사조합은 이러한 구상아래, 지주·자본가가 일본정부의 행정적 지도아래 조직한 토지침탈 기구였다. 구체적으로 조합에서는 투자 지역을 조합원별로 구역을 정하여 할당했으며, 조합원이 잠매하거나 저당잡은 토지는 조합에 등록하게 하고 그 순서에 따라 권리를 인정하는 방안을 강구하여 시행했다. 일본인들이 서로 이중으로 매매하거나 이중저당하여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312)최원규, 앞의 글(1995), 549∼552쪽.

 이러한 사업 목적 때문에 일제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1906년<토지가옥증명규칙>을 공포한 뒤에도 이 조합을 계속 존립시켰다.<토지가옥증명규칙>이 단순히 거래계약을 관에서 증명해주는 데 불과하여 여전히 도매나 투매 등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소유권의 절대성의 원칙아래 토지조사를 실시하고 등기제도를 도입하여 ‘근대적’ 부동산권 관리체제를 마련한 다음에야 비로소 이 기구를 해체시켰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일본인이 비정상적으로 획득한 불안정한 토지를 합법화시키고 안정화시키려는 데도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일제가 일본인 지주를 중심으로 한 지주제를 기반으로 한국 농촌과 농민을 무권리한 상태로 구조화시켜 지배하리라는 점, 그리고 이것은 일본 자본주의의 지원아래 가능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 유지 성장도 여기에 기여할 때만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이들은 늘 농민의 저항에 직면하리라는 점을 예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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