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2. 일제의 토지 침탈
  • 2) 일제의 토지 확보와 토지법 정비
  • (2) 일제의 토지법 정비와 농장 건설

(2) 일제의 토지법 정비와 농장 건설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강점을 위한 법제 정비에 나섰다. 일본인이 토지투자활동을 하는 데 장애가 되었던 요인을 제거하고 그 발판을 세우는 조치였다. 가장 급한 일은 일제의 한국 재편작업과 일정하게 방향성에서 차이가 있는 대한제국이 추진해 온 부동산권소관법 제정작업을 막는 일이었다.313)부동산권소관법은 宮嶋博史, 앞의 책과 최원규, 앞의 글(1996)을 참조. 이것은 외국인의 토지소유금지와, 지주제의 성장을 가로막는 경작권의 물권화를 지향한 법체계였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이를 저지하는 동시에 토지거래의 안정성을 확보한다는 명분아래 외국인의 토지거래를 인정한<토지가옥증명규칙>을 제정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규칙에서 전당도 증명해주도록 규정했지만, 계약을 위반했을 때 처리방법을 마련하지 않은 점이었다. 일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을 제정했다. 이 규칙은 경매제도를 도입하고 流質契約을 인정하는 등 전당 집행절차를 규정했지만, 본질적으로 채권자인 지주 자본가 위주로 제정된 법이었다. 또 하나는 규칙제정 이전에 잠매한 토지를 합법화시키는 문제였다. 일제는 거래라는 절차가 없더라도 소유권자가 증명을 신청하면 일정기간 소유권을 공시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을 때 소유권을 증명해 주는<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을 제정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와 아울러 일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미간지 확보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1904년<대한시설강령>에서 기본 구상을 마련하고 한국정부와 직접 교섭을 시도한 바 있었다. 이 첫 시도는 일본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한 한국민들의 투쟁에 막혀 일단 실패했지만,314)윤병석,<일본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하여>(≪역사학보≫22, 1964). 통감부가 한국정부의 거의 모든 실권을 장악한 1907년<국유미간지이용법>을 제정하여 끝내 실현을 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법을 제정함으로써 일제는 종래 한국내에서 토지를 확보해가면서도 토지의 종류에 따라 한국정부로부터 불법이란 명목으로 당한 제약을 완전히 벗어나 한국인과 같은 위치에서 토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법제가 갖는 내용상의 특질은 경작권은 고려하지 않고 소유권만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일본제국주의가 일본인 지주들에게 절대적 권리를 갖는 소유권을 부여하여 농민들에게 소작시키는 지주제 방식으로 한국 농촌사회를 지배할 목적아래 이 법을 제정했다는 점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요청에 부응하여 이 법제를 잘 활용하여 토지를 확보해 간 것이다.315)증명규칙은 다음이 참조된다.
신용하,≪조선토지조사사업사연구≫(지식산업사, 1979).
조석곤,<토지조사사업과 식민지지주제>(≪한국사≫13, 한길사, 1994).
최원규, 앞의 글(1996).
다음 표는 1907년도 일본인이 매입한 토지 중에서<증명규칙>을 이용한 토지의 통계이다. 경기 이남 지역을 주대상으로, 적지 않은 규모의 토지를 매입하여 증명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소유자별 평균면적을 볼 때 남부 지역에서는 지주 자본가가 주로 이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도별 水 田 % % 소유자 평균면적
경기 2,327,940 70 987,789 3,315,729 9 127 9 町步
충남 2,021,120 64 1,147,348 3,168,468 9 59 18  
충북 64,140 30 149,900 214,140 1 18 4  
전남 2,950,000 86 500,000 3,450,000 10 85 14  
전북 3,364,785 83 704,445 4,069,230 11 95 14  
경남 2,221,480 12 15,664,020 17,885,500 50 532 11  
경북 1,142,600 48 1,216,048 2,358,648 7 130 6  
강원 1,200 12 9,160 10,360 0 2 2  
황해 58,200 8 645,480 703,680 2 9 26  
함남 10,000 54 8,500 18,500 0 20 0.3  
함북 8,500 61 5,400 13,900 0 5 1  
평남 15,200 8 185,000 200,200 1 32 2  
평북 10,331 8 123,413 133,744 0 22 2  
14,195,596 40 21,346,503 35,542,099 100 1,136 10  

<표 >일본인의<증명규칙>이용실태 (단위:坪)

*度支部 司稅局,≪韓國의 土地에 關한 調査≫(1908), 9∼11쪽.

 1910년까지 일본인이 확보한 토지의 규모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다음 통계에서 그 대강을 볼 수 있다. 1910년 현재 2,254명이 86,952정보의 토지를 소유한 것에서 보듯 상당수의 일본인이 많은 토지를 확보하여 지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이들 토지는 전국 각지에 분포했지만, 그 비중은 전남-전북-경남-황해-충남-경기의 순이었다. 지목별로는 지주 경영의 핵인 논이 과반 이상을 점했으며, 규모는 전북-전남-경남-황해-충남의 순이었다.

 일본인지주들의 침투로는 처음에는 주로 전라도·경상도·충청도였으며, 1907년경에는 경기도와 황해도를 포괄했다. 대지주는 전북·전남·경남·경기 등에 많이 분포했다. 구체적으로는 전북의 군산부근과 전주평야, 전남의 영산강 유역, 경남의 낙동강유역의 김해평야, 경기도의 수원과 진위 등에 집중되었다. 일본인 지주제가 발전하기에 자연적·경제적 입지 조건이 우월한 때문이었다.

구 분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강원 평남 평북 함남 함북 합계
1,997 112 3,484 16,219 10,748 889 4,566 3,852 - 693 - 15 - 42,585
1,511 62 1,759 2,109 7,538 1,466 3,281 7,974 4 755 15 215 24 26,726
임야 원야 1,869 129 1,255 1,288 3,732 536 4,542 417 - 74 - 16 - 13,867
기 타 70 2 161 634 84 66 2,333 292 - 96 - 30 - 3771
5,450 308 6,661 20,251 22,105 2,960 14,726 12,537 4 1,620 16 278 24 86,952
인 원 182 84 370 284 381 427 353 46 7 61 14 40 5 2,254

<표 >1910년 지역별 일본인 토지소유면적과 인원 (단위 : 정보, 명)

*조선총독부,≪조선총독부통계연보(1910)≫(1912), 183∼184쪽과 부록 25∼39쪽에서 작성.

 구체적 이유는 첫째, 평야가 넓고 철로나 항구가 인접한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쌀의 상품화에 유리했다. 둘째, 지가와 개발가능성이 고려되었다. 이 지역은 강하류 지역으로 비옥하기는 하지만, 아직 한국인의 개발 여력이 미치지 못하여 지가가 낮고 개발의 여지가 풍부한 곳이었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이곳에 대규모의 토지를 구입하여 대규모의 수리시설을 설비하여 대농장으로 개발했다. 일본인 대농장의 대표적 지역이 되었다.316)이경란,<일제하 수리조합과 농장지주제>(≪학림≫12·13합집, 1991).

 지주의 규모별로 성장 추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30정보 이상의 지주는 1909년 총 135명이었다. 이 중 13명이 1903년 이전에 들어왔으며, 일제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된 러일전쟁부터 일제가 실권을 장악한 1907년 사이에 가장 적극적으로 몰려와 무려 109명이나 되었다. 500정보 이상을 확보한 대지주도 21명 가운데 17명이 이 때 들어왔다. 상당히 짧은 기간에 대규모의 토지를 집적한 것이다.317)일제초기 일인 지주의 침투실태는 다음이 참조된다.
조기준,≪한국자본주의 성립사론≫(대왕사, 1977).
淺田喬二,≪日本帝國主義と舊植民地地主制≫(御茶の水書房, 1968).

구 분 1903 1904 1905 1906 1907 1908 1909
30∼50정보 1 4 3 2 3 7 - 20
50∼100 3 6 7 4 7 3 - 30
100∼200 2 5 5 12 6 - 1 31
200∼300 3 5 2 2 - - - 12
300∼500 2 2 5 10 2 - - 21
500∼1000 1 3 1 3 3 1 - 12
1,000∼2,000 - 1 1 1 2 - - 5
2,000∼5,000 1 - 1 - - - - 2
5,000 이상 - 1 - - - 1 - 2
13 27 25 34 23 12 1 135

<표 >30정보 이상 일본인 지주의 소유규모별·창업년도별 인원 (단위:명)

*淺田喬二,≪日本帝國主義と舊植民地地主制≫(御茶の水書房, 1968), 68쪽에서 재인용.

 일본인들이 지주경영을 위해 토지를 확보한 다음 가장 유의하였던 문제는 농민들이 경작자로서 갖고 있던 경작권 문제였다. 경작권의 강도는 지대 수준으로 표현되며, 지주경영의 성패는 지대의 확보 수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경작권의 소유권에 대한 투쟁은 19세기 내내 항조운동으로 표출되었으며, 양자의 타협점은 경작권의 물권화 방향이었다.

 조선정부의 지주제 운영방침은 갑오개혁이후 대한제국 단계에서 일단 제도적으로 정리되는 조짐을 보였다. 당시 궁방이 추진한 지주경영책에서 제도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소유자와 경작자 사이에 존재하는 중답주의 권리를 부정하여 소유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지대수입을 증대시키려는 것이었다. 둘째는 농민의 경작권을 보장하고 지대를 민간 수준의 도지제의 수준에 맞추어 정액지대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주의 소유권을 대전제로 하면서도 경작자 농민의 경작권을 일종의 물권적 권리로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대한제국은 이러한 작업의 기초 위에서 토지조사사업과 민법 제정작업을 추진했던 것이다.318)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이 참고된다.
김용섭,<한말에 있어서의 중답주와 역둔토지주제>(≪한국근대농업사연구≫하, 일조각, 1984).
박찬승,<한말 역토 둔토에서의 지주경영의 강화와 항조>(≪한국사론≫9, 서울대 국사학과, 1983).
최원규,<대한제국기 양전과 관계발급사업>(≪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 민음사, 1995).
―――,<한말 일제초기 일제의 토지권 인식과 그 정리 방향>(≪한국 근현대의 민족문제와 신국가건설≫, 지식산업사, 1997).

 반면 일제는 일본인 지주들의 지주 경영을 강화하는 측면에서 농정을 수행했다. 그것은 쌀의 상품화를 목표로 일본의 농법을 조선에 보급하는 한편,319)정연태,<1910년대 일제의 농업정책과 식민지 지주제>(≪한국사론≫20, 서울대 국사학과, 1988). 기술보급의 주체로서 지주의 절대성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의 경작권을 약화 또는 박탈하는 일이었다. 1908년의 탁지부령으로 공포한<역토관리규정 및 소작료 징수규정>에서 이 방침을 확정했다. 그 내용은 첫째, 소작료징수와 감독권을 행정기구로 일원화하였다. 둘째, 소작권을 임차관계로 확정하여 양도·전당·전대를 금했다. 소작기간은 5년으로 정했다. 셋째, 소작료를 금납으로 정했다. 넷째, 소작인의 의무사항을 정하고 이를 위반할 때 경작권을 박탈한다는 것이었다.320)조선총독부,≪역둔토실지조사개요보고≫(1911)부록, 탁지부령 제27호, 1908년 8월 12일,<역둔토관리규정> ;탁지부 훈령 제178호, 1908년 8월 6일,<역둔토소작료징수규정>.

 이 규정은 일제가 국유지 경영의 원칙과 수준을 정한 것이다. 지주권은 절대성을 보장한 반면, 경작권은 무권리한 임대차 관계로 확정했다. 이 조치는 국유지에만 한정한 것이 아니라,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인 지주도 이에 근거하여 소작계약을 체결했다. 한국인 지주들도 점차 이 방식으로 지주경영 방식을 전환해 갔다. 이 같이 지주들이 권력에 힘입어 경영을 직접 관장하고 지대 강화를 꾀하자, 농민들은 이에 반대하여 일제 강점기 내내 줄기차게 대 지주투쟁을 벌여 나갔다.

<崔元奎>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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