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1. 무역구조의 변동과 시장권의 재편성
  • 1) 무역구조의 변동
  • (3) 청일전쟁 이후 무역구조의 변동

(3) 청일전쟁 이후 무역구조의 변동

 일본은 산업혁명을 수행하면서 조선보다 한 차원이 높은 공업생산력을 확립하였고, 그것을 토대로 조선과 農工分業 관련을 맺을 수 있었다. 이러한 선·후진국간 분업관련이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표 5>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표 5>에 의하면, 1885년 대일 수입의 절반이 중계무역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해 일본으로부터의 수입 면제품 중에 일본산은 31%에 불과하였다. 대일 수입품 중 외국산품을 보면, 영국·미국·독일제품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면포가 최대 품목이었고 그 다음이 염료, 석유, 면사 등이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에서 식음료·구리·견포·면포를 수입하고 쌀·약재·생사·누에고치·眞棉類를 수출하는 점에서 농업후진국간의 무역관련이었다.

  중요 수출품 1885 1896 1908


미 곡
대 두
牛 皮
면 화
철 광 석
27.2( 5.8)
53.5(11.5)
305.0(65.3)
0.0( 0.0)
2,852.0(56.4)
1,534.1(30.3)
231.8( 4.6)
2.2( 0.0)
6,036(44.4)
4,226(31.1)
559( 4.1)
248( 1.8)
415( 3.1)



중요 수입품 일본상품 외국상품 일본상품 외국상품 일본상품
음·식료품
   술
섬 유 류
  견 포
  면 사
  면 포
금속제품
기 계 류
74.2(31.8)
11.6( 5.0)
53.1(22.8)
27.4(11.8)

20.7( 8.9)
6.4( 2.7)
21.8( 9.6)
4.1( 1.8)
116.9(51.4)
1.2( 0.5)
9.8( 4.3)
89.9(39.5)
1.6( 0.7)
1.2( 0.6)
336.4(11.0)
122.7( 4.0)
1,633.4(53.3)
79.6( 2.0)
403.7(13.2)
880.2(28.7)
188.1( 6.1)
0.6( 0.0)
50.1(16.6)
4.5( 1.5)
43.9(14.5)
0.8( 0.3)
1.7( 0.6)
16.5( 5.5)
3.2( 1.1)
0.7( 0.2)
4,509(15.3)
1,922( 6.5)
10,466(35.4)
188( 0.6)
2,733( 9.2)
5,523(18.7)
1,186( 4.0)
484( 1.6)
합 계 233.3(100) 227.4(100) 3,065.3(100) 302.4(100) 29,569(100)

<표 5>朝·日貿易構造의 변화 (단위:천 圓, %)

*1. 村上勝彦,<植民地>(≪日本産業革命の硏究≫下, 東京大出版會, 1975),<제2표>와<제3표>로부터 작성.
 2. 술은 음·식료품계에, 견포·면사·면포는 섬유류에 포함됨.

 그런데 일본이 산업혁명을 수행하여감에 따라, 한편에서는 중계무역을 서서히 탈피하여 자국 공업제품의 수출비중을 증대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증가하는 공장노동자에게 값싼 외국미를 공급함으로써 자본축적을 촉진하기 위해 조선을 자국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단계에서 대일수입 섬유제품 중 31%에 불과하던 일본산의 비중이 1896년 단계에는 97%에 이르렀다. 대일 수입품 전체에서는 일본산이 91%를 차지하였다. 수입품목의 구성이 변화하여 일본산 면포·면사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금속제품·술·성냥 등 공산품이 증대하였다.

 청일전쟁 이전에 수입 면제품의 중심을 이룬 구미국가의 金巾은 가격이 비싸면서도 내구력이 약하여 직접생산자층에게 널리 수요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일본제 면제품은 가격이 저렴하면서 내구성이 강한 이점을 무기로 하여 직접생산자층에 점차 수요기반을 확대하여갔고, 그에 수반하여 家內綿業이 본격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제 면제품 중에 중류층이 주로 소비하는 시팅은 경인지역에 집중하였고, 그보다 저품질인 백목면은 함경·평안도에 집중하였다. 외국면포의 침투에 대하여 직접생산자층이 輸入紡績絲를 이용한 土着綿布를 생산하여 대응함에 따라, 방적사의 수입이 증가하였다. 일본면제품의 침투와 수입방적사를 이용한 대응은 지역별로 편차가 있었다. 면화를 다른 지역으로부터 조달하여 직포하였던 경기·황해·충청지방에서는 수입방적사를 이용한 대응이 청일전쟁 직후부터 개시되어 1900년경을 전후하여 정점에 달하였다가, 1903년이래 시팅의 수입으로 쇠퇴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도시시장이 발달한 반면 면화재배가 활발하지 못했던 관계로, 외국면제품의 침투가 가장 활발하였다. 토착면업의 중심지인 영호남·관서지방에서는 외국면포의 침투가 상대적으로 약하였는데, 영남에서는 1897년부터, 관서에서는 러일전쟁 후부터 수입방적사를 이용한 대응이 활발해졌다. 수입면제품 중에서 면포가 방적사보다 많았다. 이것은 수입방적사를 이용한 대응이 대세는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면화 재배와 방적·직포가 결합되어 있던 소농경영이 광범하게 존재하였던 사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325)村上勝彦, 앞의 글.
吉野誠,<李朝末期における綿製品輸入の展開>(旗田巍先生古稀記念會 編,≪朝鮮歷史論集≫下, 龍溪書舍, 1979) 참조.

 일본의 공업화가 막 개시되려는 80년대에는 조선의 곡물수출은 양적으로 작았을 뿐만 아니라 기복이 심하였다. 일본이 공업화와 도시화의 진전에 수반하여 1890년을 기점으로 미곡수출국에서 미곡수입국으로 변모하기 시작함에 따라, 미곡수출은 도약하였고 그 이래에는 안정되었다. 미곡과 콩이 수출주종품의 지위를 굳혔던 것이다. 조선미는 일본미와 모양·품질이 유사하였기 때문에, 수입미 중에는 비싼 편이었고 도시시장에서 수요가 많았다. 조선미는 주로 오사카(大阪)·코오베(神戶) 지방에서 하층 노동자나 都市雜業層의 주식으로 소비되었다.

 1890년대이래 조선이 일본의 식량공급기지로 재편되어감에 따라, 미곡·콩의 상품화가 한층 진전되었다. 지주·상층농민이 미곡판매층의 중핵을 이루었고 미곡상품화가 이들에게 경제적 상승의 계기인 반면, 영세농에게는 窮迫販賣를 통하여 궁핍화·영세화를 촉진하는 요인이었다. 그래서 미곡수출의 진전과 더불어 부농층, 특히 지주층의 성장이 촉진되었다. 미곡구매자의 주된 층은 노동력판매자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영세빈농이었으므로, 미곡수출의 증가와 미가의 등귀는 이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일본상인의 유통과정으로의 침투, 조선상인·농민에 대한 資金前貸의 활성화 등은 수출미의 안정된 확보를 보장하였다.326)吉野誠,<朝鮮開國後の穀物輸出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12, 1975).
―――,<李朝末期における米穀輸出の展開と防穀令>(≪朝鮮史硏究會論文集≫15, 1978) 참조.
러일전쟁 직후부터 일본인의 농지투자와 지주경영이 진행됨에 따라, 일본자본주의는 조선의 미곡유통과정뿐만 아니라 생산과정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에 의한 미곡의 생산·유통의 전기구적 장악은 미곡수출의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을 뒷받침하였다.

 1890년대에 조선이 일본의 상품판매시장과 식량공급기지로 재편되어감에 따라, 조선과 일본의 무역관련은 선·후진국간의 경공업 대 농업이란 국제분업체계로 전환되어갔다. 그것은 조선의 쌀을 소비하는 오사카·코오베 공업지대의 노동자가 생산한 면제품을 조선농민이 구입한다는 것과 관련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단순화하여 ‘米綿交換體制’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은 한신(阪神)공업지대와 조선 농촌지대의 구조적 관련을 의미하여 그 내부에서는 한신공업지대 노동자의 저임금을 유지하는 기반이었고 조선측의 미곡수출을 통한 세계시장으로의 편입, 그 속에서 지주층의 성장과 빈농의 窮迫販賣·영세화·소작인화(결과적으로 지주제의 성장)를 의미했다.327)村上勝彦,<植民地>(≪日本産業革命の硏究≫下, 東京大學出版會, 1975), 250쪽.

 <표 2>에 나타난 바와 같이, 청일전쟁 이후 일본으로의 금수출이 청국으로의 수출을 압도하면서 급증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으로부터 공산품 수입이 확대되어 수입무역에서 청국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 금수출에서의 일본의 우위를 낳은 기반이 되었다.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金吸收策도 일본으로의 금수출을 확대시킨 중요한 요인이었다. 특히 일본은 金本位制로 이행한 다음해인 1898년부터 강력한 금 흡수책을 추진함에 따라, 금수출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으로부터 유출된 막대한 양의 금은 일본이 산업혁명을 수행하는 데에 중요한 요건이 된 금본위제로의 성공적인 이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20세기로 접어들면, 무역구조가 새로운 변화의 조짐을 나타낸다.<표 1>에 의하면, 1890년이래 미곡과 콩을 위주로 하는 수출품의 단순한 구성은 변하지 않았다. 단, 철광석·비료·면화의 수출이 대두한 것이 주목된다. 그 반면 수입에서는 1900년까지 대개 과반을 넘던 면제품의 비중이 그 이후 급격히 감소하여 1906년이래 2할대로 떨어졌고, 목재·술·석탄·석유·종이 등의 비중이 증대하고 철도투자와 광업투자를 위한 설비도 활발히 수입되었고 기계류의 비중이 미미하나마 증대하기 시작하였다. 수입품의 다양화는 외국자본주의의 경제적 침투의 확대를 반영한다. 일본자본주의는 조선을 철광석의 공급지이면서 기계류의 판매시장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을 면제품 판매시장으로 재편하였을 뿐만 아니라, 면화공급지로 편성하였다. 조일간의 수직적 분업관련이 심화되었던 것이다.

 <표 2>에 의하면, 수입무역에서는 청국의 지위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획기로 하여 급격히 하락하였지만, 수입총액이 급증하였으므로, 대청수입액은 완만하나마 증가하는 추세였다. 청국상인이 중계무역권을 여전히 장악하였던 서양의 生金巾이 1890년대와 1900년대에 1∼2백만 圓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수입되고 있었고, 쇄금건의 수입액은 급증하여 1905년이래 백만 원을 넘어섰다. 청국산 비단의 수입이 꾸준하게 증가하였고, 청국산 麻布가 청일전쟁 이후 인천항의 중요한 수입품으로 부상하였다.

 청국 수입품의 중요한 결제수단이던 금의 대청수출은 청일전쟁 직후에 위축되었다가 1897∼8년에는 백만 원을 넘어서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적극적인 금 흡수책을 추진함에 따라,<표 2>에 나타난 바와 같이, 1899년부터 대청 금수출은 급감하였다. 이것이 대청무역의 확대를 제약하는 한 요인이었다. 그 반면 청국으로의 물품 수출의 비중은 1897년 이전까지 5% 내외에 불과하다가 1898년 이래에는 2할 내외로 도약하였다. 대청수출의 증가를 낳은 한 품목은 紅蔘이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의 公貿易資金으로 충당되고 개항장을 통한 수출이 금지되었던 홍삼은 청일전쟁으로 대청 朝貢貿易이 폐지됨에 따라 1895년부터 상인에 의하여 수출되었다. 1896년부터 홍삼은 인천항을 통하여 해마다 수십만 원 정도, 많은 해에는 백만 원 이상 수출되기에 이르렀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만주 진출이 진전됨에 수반하여 在滿 일본인이 급증함에 따라, 1907년부터는 조선의 精米가 백만 원 내외 수출되기에 이르렀다.

 이상으로 보건대 청일전쟁 이후의 대청무역은 구미 면제품의 중계무역이 한 축을 이루었고, 개항 이전부터 육로로 인삼을 수출하여 비단을 수입하는 무역구조가 개항장무역으로 재편된 것이 다른 한 축을 이루었다. 그런 점에서 조청무역은 조일무역과 달리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의 만주로의 진출이 대청수출을 증가시킨 한 요인이었던 점도 주목된다.

 일본은 산업혁명을 수행하면서 중계무역으로부터 탈피하고 조선에 대하여 미면교환체제라는 수직적 분업관련을 강요하였지만, 구미국가에 대해서는 2차세계대전 전까지도 고급 원자재와 기초 원료를 수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일본이 조선을 사실상 식민지화한 후에도 구미국가의 수입품이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였고, 식민지화 기초공사를 위한 고급설비를 선진자본주의국에 의존하여야만 했다.<표 6>에 의하면, 러일전쟁 이후에도 가는 실로 짠 고급면포인 金巾類에 대한 영국의 우위는 흔들리지 않았고, 석유는 미국이 독점적인 공급권을 가지고 있었다. 철도 부설을 위한 각종 자재는 미국과 영국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본은 철도 枕木을 전량 공급하는 정도에 그쳤다.

품 목 수입액 일 본 청 국 영 국 미 국
綿 織 絲
시 팅
금 건
백 목 면
絹 綿·絲
석 유
砂·精 糖
淸·麥 酒
紙 卷 煙 草
木 材·板
石 炭
鐵 道 部 品
2,024
2,976
2,939
1,183
713
1,442
852
1,074
1,053
1,671
1,371
2,936
98.9
71.9
1.1
100
0.1
0.1
79.0
99.4
58.4
69.9
99.9
11.8
1.1
0.2
0
-
99.9
-
1.0
-
16.7
28.1
0.1
-
0
26.6
98.6
-
-
-
0.4
0
9.5
-
-
33.9
-
1.3
0.3
-
-
95.0
0.2
0.2
4.6
2.0
-
53.0

<표 6>1908년 重要輸入品의 製造國別 구성 (단위:천圓, %)

*1.≪第三次統監府統計年報≫, 408∼410쪽.
 2. 철도부품은 鐵條·竿, 電鍍板鐵, 軌條, 軌條附屬品, 筒鐵·管鐵, 鐵釘, 鐵道機關車와 그 부속품, 鐵道客車貨車와 그 부속품, 鐵道沈木을 합한 것.

 <표 1>에 의하면, 청일전쟁 이후에도 무역적자가 계속 누적되었다. 상품무역수지의 적자는 확대되어간 금수출로 일부분 메워지기는 하였지만, 금수출을 포함해도 무역수지도 적자였다. 자본주의적 생산방법에 의거하여 공급의 확대가 순조로운 공산물의 수입무역이 자연적 제약을 강하게 받는 1차산품의 수출무역보다 빨리 증가하기 마련이어서, 무역적자가 불가피하였다. 무역적자의 확대는 자본수입의 확대를 반영하고 있다. 러일전쟁 이후 무역적자가 현격히 증가하였는데, 이것은 식민지화 기초공사에 수반하여 일본으로부터 자본수입이 급증하였음을 반영한다.

 <표 7>에 의하면, 조선의 교역조건은 대체로 1890년까지 개선되다가 그 이후 악화되어 1900년에 바닥에 달하였으며 그 이래 다시 개선되었다. 조선의 교역조건은 기복을 가졌지만, 악화되는 추세가 아니었다. 수출주종품인 미곡·콩과 수입주종품인 면제품간의 교역조건을 추계한 연구들은 한결같이 조선측의 교역조건이 개선되는 추세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교역조건이 유리하여졌기 때문에 수출품 생산자와 소비자는 무역을 통한 이익을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장기적인 경제발전으로 본다면 교역조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무역구조이다.328)吳斗煥,≪韓國近代貨幣史≫(韓國硏究院, 1991), 18∼34쪽. 공산물을 수입하고 1차산물의 생산에 특화하는 분업관련 하에서는 산업사회로의 전환은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저렴한 공산물의 유입은 토착 공업의 성장기반을 억압하였고, 그로 인하여 근대적 공업생산조직으로의 전환이 더욱 곤란해졌다.

연 도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1895 1896 1897 1898
지 수 93 76 121 124 123 122 109 116 108 102 101 122
연 도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1905 1906 1907 1908 1909 1910
지 수 109 105 100 106 115 128 125 128 128 119 112 123

<표 7>상품교역조건의 변동

*1. 1901년을 지수 100으로 기준하여 작성한 것임. 소수점 이하는 반올림.
 2. 崔柳吉,<韓國の貿易動向 1877-1911年>(≪アジア經濟≫15-1, 1974),<제 2표>로부터 작성.

 이 시기 무역규모는 조선의 경제에서 얼마만한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것이 미친 영향은 어느 정도였을까. 무라카미 카츠히코(村上勝彦) 교수의 추정에 의하면, 1인당 연간 면포소비량을 1疋로 본다면 1899∼1901년 단계에서는 면제품의 소비량 중에 외국면포 41%, 紡績土布 27∼30%, 在來土布 29∼32%이며, 1908∼10년 단계에서는 외국면포 62%, 방적토포 26∼28%, 재래토포 12∼10%였다고 한다.329)村上勝彦, 앞의 글(1979), 168∼170쪽. 그는 당시 조선의 인구를 1,200∼1,300만으로 보았지만, 실제로는 1,700만 정도로 추정되므로, 재래토포의 비중을 과소평가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외국 면제품의 침투에 따른 가내면업의 해체가 급격하였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1908∼1911년 농작물의 연평균 총수출액은 1,115만 圓인데, 당시 농작물 총생산액을 3억 원 정도로 잡으면, 농작물의 수출은 생산액의 4% 정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농작물의 상품화액의 1∼2할 정도를 차지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출주종품인 쌀과 콩은 한일합방 전후에 각각 60만 석 전후 수출되었는데, 그것은 각각 총생산량의 5% 내외, 17% 내외로 추정된다.330)李憲昶,≪開港期 市場構造와 그 變化에 관한 硏究≫(서울大 經濟學博士學位論文, 1990), 304·348쪽. 이 시기 무역이 경제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크지 않았지만, 그 급속한 확대가 상품시장의 확대와 생산구조의 변동을 초래하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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