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1. 무역구조의 변동과 시장권의 재편성
  • 2) 시장권의 재편성

2) 시장권의 재편성

 먼저 市場圈의 개념과 내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이 만나서 가격이 결정되고 거래가 이루어지는 영역이라면, 시장권은 그러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공간적 범위를 의미할 것이다. 공간적 범위로서 시장권을 이해하기 위하여 經濟地理學, 그 중에서도 中心地理論을 도입하고자 한다. 시장의 지역적 거점으로서 中心財를 공급하는 中心地는 그로부터 중심재를 공급받는 補完區域을 가진다. 중심지와 그 보완구역을 포괄하는 영역을 시장권이라 정의할 수 있다. 보완구역은 중심재의 到達距離의 上限에 의하여 결정된다. 도달거리란 중심지에서 제공되는 재화를 기꺼이 구입하고자 하는 수요자와 중심지간의 거리를 말하고, 그 상한을 넘으면 중심재를 얻을 수 없다. 도달거리는 인구의 분포, 시간-비용-거리를 고려한 경제적 거리, 중심재의 유형에 의하여 결정된다.331)李憲昶, 위의 책, 16∼17쪽. 중심재의 유형에 따라, 국지적 시장권, 원격지 시장권, 무역시장권 등의 다양한 시장권의 유형이 나온다. 시장권의 확대는 중심재의 도달거리가 증가하는, 따라서 그 교환관계에 참여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수가 증가하는 것으로, 그 深化는 주어진 공간범위에서 교환관계에의 참가자수가 증가하거나 개별 생산자의 상품생산에의 참여가 진전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시장권 안에서는 상품의 순환이 완결되고, 그것을 담당하는 상인의 이동이 이루어져 상인의 연계망이 형성되고, 거래를 지원하기 위한 정보의 흐름과 금융의 지원이 수반된다. 시장권 안에서는 수급사정이나 가격체계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공유되고 상품순환의 완결성이 크므로, 가격이 상당한 聯動性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시장권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상품의 순환, 상인의 이동과 연계망, 시장정보와 금융의 흐름, 가격체제를 들 수 있다.

 개항이래 시장권의 재편성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개항 전 시장권의 구조와 개항 이래의 외적 충격을 유기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개항 전의 시장권의 구조를 간략히 살펴보자. 조선후기의 상업중심지는 場市, 도시시장 및 浦口였다. 일반 장시는 행상과 주변의 농민이 참여하는 국지적 유통의 중심지라면, 포구는 대량의 물자를 원격지로 이동할 수 있는 선박이 출입하는 원격지유통의 結節點이었다. 국지적 유통의 주된 담당자가 陸商이라면, 客主는 대규모의 원격지유통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후기에 장시밀도가 증가하면서 장시간의 연계가 강화되고 장시간의 분화가 이루어져 大場이 출현하였다. 대장은 小場의 이출품을 集荷하고 圈外로부터의 이입품을 배급하는 기능을 하였다. 대장간의 분화도 진전되어 最大場이 출현하였다. 그런데 당시 도매상업이 발달하지 않은 만큼 시장의 계층구조는 취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시는 定期市라면, 도시시장은 市廛商業을 핵으로 하는 상설시장이었다. 도시시장은 주변의 장시와 포구를 통하여 광역의 집산범위를 가졌고, 서울은 거의 전국적인 범위에 걸쳐 상품을 흡수하였다. 産地의 장시에서 국지적 행상에 의하여 집하된 물자는 객주의 주선을 거쳐 원격지유통을 담당하는 행상에 넘겨져 대개 포구를 경유하여 소비지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객주를 거쳐 국지적 행상에 넘겨져 소비자로 전달되었다. 물론 품목·유통거리·유통수단 등에 따라 流通經路의 다양한 편차가 있었겠지만, 이러한 상인간의 연계를 통하여 도시시장과 포구와 장시가 연계되었다. 원격지행상이 객주를 통하여 국지적 행상과 만나는 곳이 포구나 大場이었다.332)李憲昶,<開港期 忠淸南道의 流通構造>(≪近代朝鮮工業化硏究≫, 一潮閣, 1993).

 개항이래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으로의 편입에 따른 국제무역의 성장이 상품화폐경제의 성장을 주도하고 시장권의 재편성을 초래하였다. 세계시장에 종속된 상품화폐경제의 성장을 시장의 측면에서 보면, 무역시장이 확대하여 전통적인 국내시장을 재편·종속시키는 과정이었다. 러일전쟁 이전까지는 국제무역이 개항장을 거점으로 이루어졌고, 개항장의 성립과 발달이 시장권의 재편성을 낳은 일차적으로 중요한 요인이었다. 개항장은 국제무역의 거점으로서 내지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새로운 국제분업관련 속에 편입시켰고, 그러한 가운데 개항장 시장권이 형성·성장하였다.333)개항장 시장권과 그 변동에 관한 설명은 별다른 언급이 없는 한 李憲昶, 앞의 책(1990), 제1장 開港場市場圈의 成長을 참조한 것임. 개항장 시장권은 개항장이 국제분업관련과 국내의 원격지유통을 통하여 자신의 상품유통망에 편입시키는 背後地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輸移出品이 각지에서 상품으로서 생산·유통되어 개항장에 이르고 輸移入品이 개항장을 거쳐 각지로 유통·소비되는 영역이다. 개항장 시장권의 범위는 수이출품의 出荷範圍와 수이입품의 到達範圍를 말하며, 그 범위는 경제적 거리 등에 의하여 결정된다.

 개항장 시장권의 확대와 심화를 결정하는 기본적인 요인은 국내에서의 구매력 증가와 생산 확대, 외국에서의 공급력의 신장과 국내품 수요의 증대 등으로 인한 무역의 확대이다. 무역규모의 확대는 앞서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무역의 편의를 제공하고 그에 수반된 유통비용을 결정하는 유통조건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물론 무역 확대가 유통조건의 정비를 요구하고, 후자는 다시 전자를 촉진하는 상호작용을 가진다.

 1880년대에 형성된 개항장과 배후지 간의 기본적인 유통망은 (주로 외국인)貿易商-開港場客主-遠隔地行商-내지의 상인-소비자 또는 생산자로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시장권의 공간적 범위를 결정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원격지행상, 특히 조선인 船商, 그리고 그들과 연계된 개항장객주였다. 선상과 객주는 영리계산에 밝아 유통조건의 변화에 따른 가격의 변동에 민감하게 대응하였고, 그러한 반응이 시장권의 신속한 재편·확대를 초래한 조선내적 요인이었다. 개항장 시장권의 확대·재편을 초래한 조선외적 요인으로는 무역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상인자본의 투하, 외국과의 定期直通航路, 금융기관 등을 들 수 있다. 상인자본 투하의 증대, 정기직통항로의 개설, 금융기관의 설립 등은 무역거래의 편의를 증진시키고 내지의 농민이 수출품을 비싸게 팔고 수입품을 싸게 살 수 있게 함으로써 개항장 시장권을 확대·심화시키고 무역을 증진시켰다. 일본상인이 개항장의 은행지점으로부터 대부받은 무역자금으로 개항장객주나 내지의 조선상인에게 자금을 前貸하는 것은 금융의 중심적 흐름이었다. 그럼으로써 ‘薄資’의 일본상인은 개항장과 배후지 간의 유통망에 대한 지배력을 증진시켰고 무역 확대의 선봉에 설 수 있었다.

 초기에 개항된 釜山·元山·仁川은 개항 초부터 부근의 배후지 뿐만 아니라 원격지와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부산은 80년대 초에 서해안과 원산 방면과 거래하였고, 원산은 개항 직후에 서울 부근의 牛皮를 흡수할 수 있었다. 이것은 개항 이전 원격지유통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였고, 조선상인의 활동이 이러한 광역의 거래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개항장의 무역설비의 정비는 내륙의 시장권을 계속 확장시켰다. 한 예를 들면, 부산 부근의 3∼4백 리 이내의 범위에서 집산되는 우피가 1895년을 기점으로 5∼6백 리 내지 7∼8백 리 밖에서 이입되기에 이르렀다.334)≪通商彙纂≫55, 號外<1895年 釜山港貿易年報>, 72쪽.

 무역설비의 확장에 따른 개항장 시장권의 확대·심화는 圈內 금융의 확대와 유통구조의 재편을 수반하였다. 초기의 권내 유통경로에서는 위탁매매업을 통하여 내지의 상인이나 농민을 외국무역상에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던 開港場客主가 거래기반의 축적, 일정한 자금력 및 특권을 토대로 하여 거래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상인이 일본 금융기관의 지원과 불평등조약 상의 內地行商이란 특권에 힘입어 점진적으로 개항장객주로부터 거래의 주도권을 탈취하고 유통경로를 재편하였다. 자본력이 취약한 개항장객주를 비롯한 조선상인은 근대적 금융기관의 지원을 받은 일본상인의 資金先貸에 얽매여 상거래를 지배당하게 되고 고리대에 걸려 파산당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외국상인은 개항장객주의 중계를 받지 않고 내지행상을 통해 산지의 상인·생산자와 직접 거래하기 시작했다. 1887년부터 일본인행상이, 1888년부터 중국인행상이 활성화됨에 따라 산지와 포구의 객주가 외국상인의 위탁매매를 담당하면서 성장하였는데, 이들도 외국상인의 자금선대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내지행상의 확대가 크게 진전되지는 않았고 무역규모는 계속 확대하여, 개항장의 객주수가 대체로 1900년을 전후한 시기까지는 증가하였다. 개항장객주를 배제한 유통이 확대되고 있었지만, 그들의 중계에 의존한 유통경로가 여전히 강고하게 작동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철도운송의 확대와 外國人內地定住商業의 발달이 개항장 시대의 막을 내리고 개항장객주를 매개로 하는 유통경로를 급격히 해체시켰을 것으로 판단된다.335)吉野誠, 앞의 글(1975).
李炳天,≪開港期 外國商人의 侵入과 韓國商人의 對應≫(서울大 經濟學博士學位論文, 1985) 참조.

 청일전쟁 이전에 개항장은 부산·원산·인천뿐이었지만, 1897년에 木浦와 鎭南浦가, 1899년에 群山·馬山 및 城津이 개항되었다. 이들 포구는 개항되기 전부터 부산·원산·인천의 시장권에 편입되어 있었다. 이들은 개항 직후에 시장권의 범위가 매우 협소하였고 무역설비가 정비된 기존 개항장의 중계를 받아 외국무역을 수행하였다. 예컨대 목포가 개항된 다음해에 부근의 조선인 船商이 목포의 쌀값이 부산에 비하여 1升에 2文 이상 헐하다면 부산으로 가서 판매하고 金巾 등의 수입품을 헐값으로 매입하여 돌아왔다고 한다.336)≪通商彙纂≫121,<木浦, 群山兩地相場ノ懸隔(1898년 12월 10일)>, 50∼51쪽. 새로운 개항장에 무역상인이 진출하고 定期直通航路와 금융기관 등의 무역설비가 정비되면서 기존 개항장과 수출입품의 가격차가 축소되었으며, 그 결과 부근 배후지의 선상들을 끌어들여 독립적인 무역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증설된 개항장의 독립된 무역항으로의 성장은 단지 기존 개항장의 시장권을 잠식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개항장이 원격지를 시장권에 포섭하더라도 내륙교통의 불편과 그에 따른 높은 운임, 그리고 재래선박의 취약함으로 인하여 활발한 교환관계를 가지기 어려웠는데, 개항장의 증설은 종전에 表皮的으로밖에 접촉할 수 없었던 지역에 대한 관련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예컨대 청일전쟁 직후에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하고 수륙교통이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개항장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무역이 활발한 편이 아니었는데, 목포와 군산이 개항된 이래에는 이 지역의 외국무역이 급속히 신장하였다. 그리고 개항장의 증설은 종전에 교통관계 상 포섭할 수 없었던 지역을 새롭게 그 시장권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예컨대 진남포의 개항은 평안북도의 연안지방을 개항장시장권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러일전쟁 이전에 일본상인은 반식민지 내의 식민지인 개항장을 거점으로 하여 內地行商과 불법적인 內地定住를 통해 내지에 침투하였지만, 러일전쟁 이후에는 내지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지배가 확고해지고 내지정주가 法認되고 철도와 新作路란 내륙교통수단이 정비됨에 따라 침략의 거점을 항구에 국한시킬 필요가 없이 내륙 곳곳의 요충지에 설정할 수 있었다. 1903년 조선 거주 일본인 24,627명의 7%가 내지에 거주하는 데에 그쳤는데, 1909년에는 146,147명의 37%가 내지에 거주하였다. 1905년에는 일본선박은 개항장뿐만 아니라 모든 곳으로의 자유항행권을 획득하였는데, 이것도 일본상인의 내지침투를 촉진시켰다. 개항장을 거점으로 한 내지 침투의 시대가 철도 등에 의해 전국적 지배가 실현되는 시대로 전환되었고, 철도수송의 확대에 수반하여 시장권의 급격한 재편성이 일어났다.

 인천-서울간의 운임이 인천-오사카간의 운임의 2배 가까이 되었고 結氷期에는 수운이 불가능하였으므로, 1900년 완공된 京仁鐵道는 기선 운송을 대체하면서 경·인간의 교통편의를 한층 증진하였다.337)≪通商彙纂≫52,<1895年中京城商況年報>, 62쪽.
朝鮮總督府,≪京城商工業調査≫(1913), 14쪽.
1905년과 1906년에 京釜鐵道와 京義鐵道가 각각 완공되어 정비된 도로망과 항만에 연결되면서 수송력이 결정적으로 강화되었다. 경부철도는 영업 개시와 더불어 關釜連絡船을 통하여 일본 내의 주요 철도와 연락운수를 하였고, 경부·경의철도가 동일한 賃率 하에 일반영업을 개시한 1908년부터는 일본철도의 全線 各 驛과 연락운수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해운과 강운의 화물을 철도로 흡수하기 위하여 장거리운임의 체감법과 항구에 도착하는 곡물의 特定運賃制를 실시하였다.338)이 시기 철도운송에 관해서는 鄭在貞,<韓末·日帝初期(1905∼1906년) 鐵道運輸의 植民地的 性格>(≪韓國學報≫28·29, 1985)을 주로 참조하였다.

 신속성과 안정성을 가진 철도운송은 이러한 이 점에 힘입어 수운을 점점 잠식하고 압도하여갔다. 漢江水運은 1907∼8년경부터 점차 철도운송에 잠식되어갔고, 특히 1908년 철도요금율의 변경으로 인하여 장거리 운송비가 절감됨에 따라, 상인들의 철도 이용이 확산되었다.339)≪財務彙報≫10, 1909년 3월,<五江商民近況>, 21쪽. 1911년 철도에 의하여 서울로 유입되는 미곡은 26만여 석인데, 한강수운에 의한 것을 미곡으로 환산하면 22만 석 정도였고, 牛馬背에 의한 이입은 소량에 그쳤다. 육로로 서울에 이입되던 명태가 개항 이후에는 기선의 운송으로 바뀌었는데, 경부철도가 개통된 이래에는 선편으로 부산에 수송한 다음 철도로 서울에 이입되었다. 선편으로 인천을 경유하여 유입되던 모시는 대전-군산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철도로 전환되어갔다.340)≪京城商工業調査≫, 126∼130쪽, 153쪽, 159∼163쪽, 171쪽. 1911년 부산에 집하된 곡물의 49%가, 인천에서는 41%가 철도수송에 의거하였다. 철도운송은 단지 운송방식을 변화시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육상 운송의 제약을 극복함으로써 서울시장의 수집력을 강화하였다.

 경인철도는 운송구역의 제한성으로 인하여 서울과 인천간의 교통편의를 증진하는 정도에 그쳤겠지만, 경부철도와 경의철도는 시장권의 재편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경부·경의철도가 개통된 이래 부산의 집산력은 현저히 신장되고 인천의 집산력은 위축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내륙의 도시가 무역의 거점으로 성장하였던 점이다. 특히 서울시장의 성장이 현저하였다. “鐵道聯帶輸送 및 일반 回送貨物의 수송을 개시하면서부터는 종래 인천·부산 兩港 상인의 손을 거쳐 수입·이입되던 화물이 점차 서울상인의 직접 거래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종래 오직 인천에 의하여 행하여지던 서울의 무역은 철도연대수송의 개시이래 점차 경성의 직접거래로 바뀌었다.” 京城稅關에 통관수속을 거친 것으로서 부산을 경유하여 철도연대수송으로 수입된 것과 인천항을 경유하여 수입된 것 중에 전자의 비중이 1908년에 70%, 1909년에 76%, 1910년에 82%, 1911년에 83%였다.341)≪京城商工業調査≫, 62∼63쪽.

 인천의 수입무역이 1907년까지는 증가하다가 1908년부터 격감하였던 것으로 보건대, 인천의 물화집산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1908년의 철도연대수송이었다. 인천은 청일전쟁 이전까지는 “경기·충청·황해·평안 등의 道에서의 物貨集散의 중심점”이었지만, 1897∼9년에 걸쳐 진남포·목포·군산이 개항되고 게다가 경부·경의철도가 개통되고 1908년부터 철도연대수송이 이루어짐에 따라 집산구역이 현저히 축소되어갔다. 그래서 인천의 집산구역은 수운으로 접촉하기 편리한 연안지방을 중심으로 축소되어서, 1911년의 연안무역액 중에 황해·전북·경기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75%에 달하였다.342)朝鮮總督府,≪仁川港商工業調査≫(1913), 49쪽 및 125∼130쪽. 예컨대 종관철도가 개통되고 遠距離運賃低減法이 실시됨에 따라 일찍이 船便에 의하여 일단 인천을 경유하여 이입하던 和金巾은 철도편에 의하여 직접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수용지로 搬送되기에 이른 것이 결코 적지 않았다. 인천의 집산구역의 축소를 달리 본다면 서울이 물화의 소비지인 동시에 근래 교통기관의 발달에 수반하여 화물집산지의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343)朝鮮總督府, 위의 책, 88∼89쪽 및 92·125쪽.

 경부·경의철도는 중요 상업지를 통과하도록 설계되었고, 철도역의 정거장 구역마다 일본인이 이주하고 상업행위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경부철도의 영업 개시 직후부터 일본인은 철도역 주변에 활발히 진출하여 상설점포를 설립하고 상권을 장악하여갔다. 이들은 거래처·금융면에서 개항장의 무역상인에 대한 의존을 탈피하여 일본과의 직거래를 추진하였다. 개항장과 철도 연선의 상설점포를 연결하는 유통망이 새로이 형성되고, 심지어는 오사카·코오베의 무역상과 조선 내륙의 일본상인 간에 철도연락운수를 통하여 직결되기도 하였다. 개항장이 침략의 거점으로서 의의를 약화함에 따라 開港場客主의 존립기반이 극히 취약해졌다. 또한 일본상인의 내지정주가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산지와 포구의 상인이 한층 일본상인에 종속되거나 무력해졌고, 청국인 행상의 세력도 약화되었다.344)鄭在貞, 앞의 글, 158∼166쪽. 요컨대 철도운송은 조선시장의 일본경제에 대한 편입을 한층 심화시키고, 일본상인의 국내 상권에 대한 지배력을 현저히 신장시켰다.

 개항장 시장권의 확대·심화와 철도망의 확산을 통하여 국제 분업 관련망이 확대·심화되었지만, 한일합방 무렵에도 전국을 완전히 포섭한 것은 아니었다. 내륙교통의 전통적인 수준으로 인하여 국제무역과 미약한 관련을 맺은 지역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 육로수송은 비용이 많이 들었고, 수상운송은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그래서 평안도 동북부지방에서는 높은 수송비로 인하여 수출물의 반출이 수지가 맞지 않았다 한다. 江陵은 강원도에서는 개항장에 접근하기 유리한 굴지의 시장이었지만, 1908년경에도 정기항로가 개설되지 않아 미곡의 가격이 원산의 1/3 정도였다 한다.345)李憲昶, 앞의 책(1990), 62∼64쪽.

 개항장체제와 철도운송은 단지 시장권의 재편을 낳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시장을 확대시키는 면이 있었다. 개항장 무역은 저율 관세만 부담하면 거래의 자유를 보장하고 기선·은행·근대적 통신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전통적인 무역방식에 비하여 거래비용을 현저히 절감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수입품의 수요와 수출품의 공급을 확대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철도의 개통은 내륙 유통의 혁신을 낳았다. 개항전부터 육로로 유입되던 서양산 면포가 개항장을 통하여 보다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공급되었고, 청국산 마포가 새로운 수요자층을 확보하였다. 이들 수입품은 국내 代替상품의 수요를 위축시키기도 하였지만, 전반적인 수요는 확대되었음을 다음의 인용에서 알 수 있다.

전라도는 본품(麻布-인용자주)의 산출지이며 종전에는 그것을 他道에 판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산출량은 제한되어 일반의 수요에 응할 수 없었으나, 이곳(木浦-인용자주)의 개항 후에는 도리어 이 산지로 외국품을 수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通商彙纂≫108,<木浦ニ於ケル麻布輸入ノ情況(1898년 8월)>, 38쪽).

 즉 전통적인 생산·유통조직하에서 일반의 수요에 응할 衣料를 충분히 공급할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저렴하고도 실용적인 청국 마포의 수입은 수요를 창출하기 마련이다. 개항장의 성장과 무역설비의 확장은 상품시장을 확대하는 기구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포의 산지인 전라도에서도 공급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형편이었다면, 마포의 이입지인 서울에서는 청국 마포의 수입이 수요를 창출하는 효과가 한층 컸을 것이다.

 개항장 시장권의 확대·심화와 철도유통망의 확산은 국제분업관련에 입각한 유통의 확장을 반영하고 있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국내분업관련에 입각한 유통에 영향을 주고 전통적 시장구조를 변모시킨다. 원격지유통의 변모가 특히 현저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개항된 곳 중 개항 전부터 원격지유통의 중심지로서 기능한 곳은 馬山뿐이었지만, 이들이 개항장이 되어 국제무역의 거점으로 성장하면서 객주 등의 조선상인을 끌어들이고 기선 등의 무역설비를 정비함에 따라 국내 분업관련에 입각한 원격지유통의 중심지로도 부상하였다. 강화도조약 이전에는 마산이 함경도의 명태 등 각종 물산이 이입되어 삼남의 물산과 교역되는 대집산지였는데, 먼저 개항된 부산이 마산의 원격지유통을 흡수하였다. 전라 서부에서 조선인선상의 거점이던 법성포와 沙浦는 목포가 개항되면서 그 지위를 탈취당하였다. 기선은 육로를 통한 원격지유통을 해상수송으로 전환시키면서 개항장의 집산력을 강화하였다. 개항 전에 함경도의 명태 등은 해상수송의 위험으로 인하여 육로로 서울에 반입되었지만, 점차 원산항에서 기선에 의뢰하여 해로로 서울로 수송되기에 이르렀다. 철도의 개통 이후에는 해상수송이 철도수송으로 전환되었다.346)李憲昶, 앞의 책(1990), 51∼54쪽.

 개항장이 해상의 원격지유통 체계를 크게 변모시켰지만, 내륙의 유통구조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필자는 충청도지방의 장시망이 개항 이래부터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안정적이고 그 기본구조가 변동되지 않았던 사실을 확인하였다. 전통적인 장시망은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으로의 편입에 따른 상품유통의 성장과 변동이라는 충격을 커다란 재편을 겪지 않고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효율적이고 견고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고 싶다.347)李憲昶,<朝鮮後期 忠淸道地方의 場市網과 그 變動>(≪經濟史學≫18, 1994), 43쪽.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 개항장 시장권은 전통적인 유통망에 의존하였고, 그럼으로써 초기부터 광역의 시장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철도유통은 내륙의 원격지유통 체계를 급격히 변모시켰다.<표 8>에서 1908년경 충청북도의 수출입품의 유통로를 보면, 괴산-청안-진천의 위쪽에서는 전통적인 한강수운과 육로에, 청주의 아래쪽에서는 주로 경부철도에 의존하고 있었다. 경부철도는 개통된 지 수년 이내에 철도가 통과하는 내륙지방의 원격지유통을 흡수하였다. 철도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충주·괴산·음성지방은 1908년경 忠州場을 거점으로 하는 한강 수운에 의존하였지만, 합방을 전후한 시기부터는 조치원역을 통하여 철도유통에 의존하기 시작하였다. 충청북도 내륙의 원격지유통의 중심이 한강수운으로부터 철도운송으로 급격히 전환하였던 것이다.

 철도 정거장 구역에는 일본인 定住商業이 발달하였으므로, 철도수송망에 포섭된 지역의 확대는 일본상인의 상권 장악의 진전을 보여준다. 예컨대 충청북도의 沃川市場에 이입되는 석유·금건·면사·명태 기타 잡화류는 대부분 부산·인천·대전 방면으로부터 정거장 앞의 일본인이 구입하여 다시 그것을 시장의 상인에 轉賣하였고 곡류도 정거장 앞의 일본인이 조선인의 仲買로 하여금 買集시켜서 철도편에 의해 각지로 출하하였던 것이다.348)朝鮮總督府鐵道局,≪朝鮮鐵道沿線市場一班≫(1912), 73쪽.

郡名 1908년경 그 이후의 변화
永春
堤川
丹陽
淸風
忠州
延豊
槐山
陰城
淸安

鎭川
淸州
文義
懷仁
報恩
沃川

靑山
永同
黃澗
堤川場을 경유
서울-漢江水運-忠州牧溪·淸風北津-堤川
서울-漢江水運-丹陽
서울-漢江水運-淸風
서울-漢江水運-忠州
槐山場을 경유
서울-忠州盤川-槐山牧渡-槐山
서울-陸路-陰竹長湖院·忠州鷹盤川-陰城
서울-鳥致院-淸州-淸安
인천-牙山屯浦-鎭川-淸安
인천-屯浦-安城場·稷山笠場-鎭川
주로 鳥致院, 부분적으로 屯浦·芙江을 경유
沙金의 경우 芙江을 거쳐 수출,
주로 鳥致院, 부분적으로 大田을 경유
沃川驛을 경유
곡물은 부산으로 直送, 수입품은 江景-芙江 경유

深川驛을 경유
철도로 부산·인천·서울에 直結
철도로 부산·인천·서울에 直結




13년 鳥致院과 관계를 가짐

11년 鳥致院과 관계를 가짐
11년 鳥致院과 관계를 가짐
11년 鳥致院에 강하게 편입

13년 鳥致院과 활발한 관계
11년 거의가 鳥致院을 경유

11년 大田과의 관련이 확대

11년 수입품도 철도로 인천·
대전으로부터 직송
별 변화가 없음
    〃
    〃

<표 8>충청북도 각 군별 수출입품의 유통경로

*1. 1908년경은 忠淸北道觀察道,≪韓國忠淸北道一班≫, 1909.
 2. 1911년은 朝鮮總督府鐵道局,≪朝鮮鐵道沿線市場一班≫, 1912.
 3. 1913년은 朝鮮總督府鐵道局,≪朝鮮鐵道驛勢一班≫上, 1914.

 내륙의 원격지유통의 중심지인 令市의 쇠퇴도 철도유통과 일본인 정주상업의 발달에 기인한 바가 크다. 개항전 전국의 약재를 취급하는 특수한 시장으로서 성립된 大邱와 公州의 令市는 1880년대에는 전국 각지의 특산물은 물론 수입품을 활발히 집산하는 유럽의 大市와 같은 것으로 성장하여 있었다. 갑오경장 후에는 全州·晋州·淸州에도 영시가 발생하였다. 영시의 발달은 지방관의 시장육성책에 힘입은 바가 있었다. 1900년대가 되면 영시가 쇠퇴하여 한일합방 당시에는 대구의 藥令市만 남았다.349)李憲昶, 앞의 책(1990), 224∼230쪽. 철도운송에 의한 원격지유통의 재편은 영시와 같은 전통적인 원격지 유통시장을 급격히 위축시켰던 것이다.

 철도운수가 장시에 미친 영향은 어떠한가. 철도망은 가급적 상업거점인 장시를 많이 통과하게끔 설계되었다. 1911년말 철도역 111곳 중에 인구 만 명 이상의 도시와 개항장에 위치한 역을 제외하면 모두 96곳이었다는데, 그 중 십리 이내에 장시를 가진 역이 70곳이었다. 그 중에 철도 부설 전에 장시의 존재가 확인된 역은 51곳이었던 것으로 보건대, 철도운수는 장시의 확산에 기여하였다.350)李憲昶, 위의 책, 222쪽. 철도에 의한 내륙교통의 발전으로 인하여 “종래 큰 시장은 더욱 커지고 작은 시장은 더욱 작아지는 추세를 나타내었다.” 철도의 개통 전에는 각 산지의 물자가 “牛背에 의해 각지의 시장을 거쳐 순차적으로” 소비시장에 모여들었는데, 烏山·芙江·金泉과 같은 중요한 철도연선시장이 남대문시장이나 부산과 직접 거래하고 그곳에 직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51)≪通商彙纂≫49,<京釜鐵道全通ノ經濟界ニ及ホセル影響>(1905년 7월 19일), 23·24쪽. 그 반면 철도유통은 소규모 장시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종래 장시에서 집하되어 원격지로 이출되던 물화는 일본인 정주상인이 철도연선시장의 상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장시를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정거장으로 가서 철도편에 의하여 각지로 이출되었다. 철도운송은 일본자본주의와 내지의 생산자·소비자간의 경제적 거리를 단축함으로써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지원하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내지시장의 구조가 재편되었던 것이다.352)李憲昶, 앞의 책(1990), 206∼207쪽.

<李憲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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