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2. 상회사 설립과 상권수호운동
  • 1) 상회사 설립
  • (1) 회사정책

가. 갑오·광무개혁기의 회사정책

 개항 이후 회사 명칭의 기업조직이 출현한 데에는 개화파 지식인들이 기여한 바가 컸다. 兪吉濬은 1882년≪商會規則≫을 저술하여 기선회사의 설립방식을 소개하였으며,353)兪吉濬全書編纂委員會,≪兪吉濬全書≫4-政治經濟編(一潮閣, 1971), 89쪽.≪漢城旬報≫도 1883년에<會社說>이라는 논설을 실어 회사의 설립과 운영, 국가의 회사 보호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였다.354)≪漢城旬報≫, 1883년 10월 21일,<會社說>. 정부에서도 신사유람단, 영선사의 파견을 계기로 식산흥업을 위한 새로운 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1883년부터 機器局·博文局·廣印社·蠶桑公司·蓮花烟務局·三湖玻璃局·交河農桑社 등의 官營·官督商辦型 기업을 속속 설립하였다.355)全遇容,≪19世紀末∼20世紀初 韓人會社硏究≫(서울대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7), 22쪽.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민간에서도 大同會社·長通會社 등 회사 명칭을 쓰는 기업조직이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초기의 민영회사들은 전통적 상업질서, 즉 都賈商業體制 위에서 활동해야 했기 때문에,356)도고상업체제에 관해서는 姜萬吉,<開化期의 商工業問題>(≪朝鮮時代 商工業史硏究≫, 한길사, 1984) 참조. 개화파 지식인들이 소개했던 회사와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였다. 이들 회사가 합자를 통해 자본을 마련하였던 점에서는 서구의 회사와 다를 바 없었지만, 정부에 대한 납세를 대가로 하여 영업독점권·징세청부권 등의 특권을 행사하였던 점에서는 都賈와도 유사한 존재였다.357)개항 직후 회사의 영업특권에 대해서는 韓㳓劤,≪韓國開港期의 商業硏究≫(一潮閣, 1970) 참조. 회사의 조직·운영원리도 전래의 상인단체인 都中의 運營例나 민간 자치규례인 향약에서 차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초기 회사가 지닌 이러한 성격은 전통적 상업질서가 온존된 상황에서 서구의 제도를 형식적으로만 도입함으로써 나타난 것이었다. 따라서 회사가 명실상부한 근대적 기업으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경제질서 전반의 개혁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극심한 재정곤란으로 인해 관영 기업조차 운영할 수 없었던 정부가 그와 같은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다. 오히려 1880년대 말부터는 회사를 수세확대를 위한 징세청부기구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되었다.358)須川英德,≪李朝商業政策史硏究-十八·十九世紀における公權力と商業-≫(東京大 出版會, 1994), 201∼202쪽. 그에 따라 이 무렵부터 상회사 뿐 아니라 수세를 주업무로 하는 객주조직이나 도고도 회사의 명칭을 쓰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회사의 존립 양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는 1894년 갑오개혁 때에 비로소 마련되었다. 개화파 정권은 화폐·재정개혁과 아울러 貢物制度의 혁파와 市價貿用, 六矣廛 폐지, 商理局의 혁파, 각종 특권회사와 收稅都賈의 혁파, 雜稅 철폐 등 도고상업체제의 혁파에도 주력하였으며,359)吳斗煥,<甲午 經濟改革의 構造와 性格>(≪仁荷大論文集≫3, 1984), 14쪽. 이와 관련하여 1895년 4월에는 農商工部告示 제1호로<各 會社로부터 官許章程과 商業憑票를 還收하는 件>을 공포하였다.360)宋炳基 外,≪韓末近代法令資料集≫1(國會圖書館, 1970). 이는 도고적 체질을 벗어나지 못한 종전의 회사를 전면 혁파하고, 근대적 경제질서에 합당한 회사만을 새로 육성하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또 1895년 11월 10일에는 法律 제17호로<商務會議所規例>를 제정하여 객주 상법회사의 도고적 성격을 일소하고, 이를 근대적 상업회의소의 위상을 갖는 순수 협의기관으로 개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개화파 정권의 급진적인 회사 근대화정책은, 그들의 구상대로라면 가장 적극적인 지지세력이 되었어야 할 상인층 일반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외국 상인의 상권침투를 가속화하는 구실을 하였을 뿐이다. 도고상업체제는 민간에서의 자본축적을 저해하는 것이기는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고한 독점적 폐쇄성으로 인해 외국 자본의 침투를 일정 정도 저지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61)姜萬吉,<大韓帝國時期의 商工業問題>(≪亞細亞硏究≫16-2, 1973) 참조.

 개화파 정권이 붕괴한 후 高宗은 양반유생층과 특권상인층의 지지를 얻어 강력한 皇權을 구축하였으며,362)나애자,<대한제국의 권력구조와 광무개혁>(≪한국사≫11, 한길사, 1994) 159∼160쪽. 이를 바탕으로 근대화 정책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고종의 전제황권이 구축된 광무년간에는 토지소유권의 확립, 호구 파악, 산업 재편, 지세 징수 등 국가 경영 전반의 획기적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量田·地契發給事業이 추진되는 한편,363)李永鶴,<대한제국 전기 토지조사사업의 의의>(≪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 민음사, 1995), 35쪽. 식산흥업정책도 본격화하였다.

 광무년간의 경제정책 및 식산흥업정책은 외세를 가능한 한 배제하면서 지주 및 특권상인층의 기득 권익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마련되었던 바, 회사정책 역시 이러한 기조에 입각해 있었다. 그리하여 특권상인으로부터 수세하는 대가로 그들에게 물종별, 지역별 영업 독점권을 부여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특권적 상업질서가 복구됨에 따라 민간자본이 축적될 수 있는 여지는 축소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수탈을 기반으로 황실과 특권 관료층이 대자본가로 등장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광무년간의 식산흥업정책은 외국에 침탈된 이권의 회수와 추가적인 이권 침탈의 방지를 통한 국내 생산기반의 보호, 그리고 근대적 산업기술인력 양성을 위한 기술교육의 확대에 중점이 두어져 있었다. 정부는 1899년에 프랑스로부터 경의철도 부설권을 반환받은 이래, 철도부설권의 추가적인 양도를 중단하였으며, 1898년 6월에는 전국의 주요 광산을 모두 내장원 소유로 하고 외국인에게 광산채굴권을 일절 허가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채택하였다.364)李潤相,<열강의 이권침탈과 경제의 예속화과정>(≪한국사≫11, 한길사, 1994), 288쪽. 동시에 각종 회사의 장정, 규칙에도 “외국인에게 권한을 양도하거나, 외국인과 합작할 경우 허가는 취소하며, 사원은 엄형에 처한다”는 규정을 포함하도록 함으로써 민간 부문에서 외국인에게 이권을 양도할 수 있는 여지를 사전에 봉쇄하였다.365)全遇容, 앞의 책, 97쪽.

 식산흥업정책과 관련하여 특히 활발히 추진된 것은 각종 기술학교의 설립이었다. 1899년과 1900년에<商工學校 관제>와<礦務學校 관제>가 각각 제정되었고, 1899년에는 郵務學堂과 電務學堂이, 1901년에는 잠업시험장이 설립되었다.366)劉奉鎬,<大韓帝國下 實業敎育 展開考>(≪大韓帝國硏究≫2,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1984), 64∼66쪽. 사립학교에서도 실업교육을 확충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어, 1900년에는 漢城織造學校와 私立廣成商業學校·私立鐵道學校가 개설되었고,367)金根培,≪日帝時期 朝鮮人 科學技術人力의 成長≫(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 20쪽. 私立樂英學校내에 工業傳授科와 鐵道科가 설치되었으며,368)≪皇城新聞≫, 1900년 12월 18일, 雜報. 私立興化學校도 量地速成科를 설치하였다. 기술인력 양성을 위해 학교를 분설하는 회사도 생겨나서, 織造緞布株式會社(鍾路織組社)가 기술학교를 분설하였으며,369)≪皇城新聞≫, 1900년 3월 22일, 廣告. 大韓國內鐵道運輸會社도 철도기사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식산흥업정책과 운동에 힘입어 은행업과 운수업을 기축으로 하는 다수의 근대 기업이 설립되었고, 그 설립자는 거의가 고위 관료나 특권적 대상인들이었다.

 그런데 광무년간에는 근대적 기업 뿐 아니라 다수의 都賈가 회사의 이름을 걸고 소상인·수공업자를 수탈하는 양상도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당시 상업·재정정책의 정점에는 내장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370)金載昊,≪甲午改革 이후 近代的 財政制度의 形成過程에 關한 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7) 참조. 내장원은 人蔘·鑛山·庖肆·海稅 등을 전관하는 한편,371)楊尙弦,≪大韓帝國期 內藏院 財政管理硏究-人蔘·鑛山·庖肆·海稅를 중심으로≫(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7) 참조. 상업세 징수를 확대하였다. 그에 따라 내장원 납세를 전제로 도고권을 행사하는 특권회사가 난립하는 양상이 빚어졌던 것이다. 이는 정부 주도로 생산력적 토대를 확충할 수 있을만한 재원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서, 그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소상인·소농민층에 대한 수탈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광무년간 식산흥업정책이 처한 근본적인 딜레마였다. 식산흥업정책의 실질적인 수혜자가 되어야 할 상인·수공업자들이 오히려 집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됨으로써 광무 경제개혁의 지지기반은 심각하게 축소되었고, 개혁을 위해 민중의 역량을 동원하는 데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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