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2. 상회사 설립과 상권수호운동
  • 1) 상회사 설립
  • (3) 상회사의 설립주체

(3) 상회사의 설립주체

 갑오개혁 이후 회사 설립을 주도한 것은 개명 관료들이었다. 관료층이 회사 설립을 주도한 데에는, 첫째 갑오개혁을 계기로 하여 관료의 회사참여가 합법화되었던 점,389)≪官報≫, 1894년 7월 2일, 議案<休官後에 任便營商케 하는 件>. 둘째 회사에 대한 고종의 관심이 매우 높았고, 고종 스스로 회사에 투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점, 셋째 독립협회 등의 식산흥업운동에 일부 개명 관료들이 참여하였던 점, 넷째 관료집단의 수중에 거액의 화폐자산이 집적되어 있었던 점 등이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다만 이 시기의 회사는 관료들이 설립을 주도하면서도 그 운영은 일찍부터 관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부를 축적해 온 상인들이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상인들이 관료들의 자금을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390)全遇容, 앞의 책, 163쪽. 관료와 상인들은 外劃과 같은 신용거래 관계로도 맺어져 있었다. 특권적 경제질서가 강고히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상인층의 입장에서도 고위 관료와 합작하는 것이 유리하였을 것이다.

 광무년간에 관료와 상인층이 합작하여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정치상황의 변화, 회사의 성격 등에 따라 참여하는 층위나 결합하는 방식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갑오개혁 직후에는 정부의 도고회사에 대한 엄격한 단속으로 인해 상인층의 독자적 회사 설립은 극도로 위축된 반면, 주로 개화파 정권에 직접 참여하고 있던 관료층의 회사 설립이 활발하였다. 安駉壽·金宗漢·尹致昊·李采淵 등이 건양·광무 연초에 가장 적극적으로 회사 설립에 나섰던 고위 관료들이었다. 이들과 더불어 金益昇·吳龜泳·禹慶善·鄭顯哲 등 주로 개항장 일대에서 경력을 쌓은 중하급 관료들도 회사 설립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들은 관직을 통한 출세보다는 기업 경영을 통한 치부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면서 전문 경영인으로 변신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의 전제 황권이 체제적으로 확립된 1899년경부터는 황제의 측근들인 李容翊·李允用·李采淵·閔泳煥·閔丙奭·李載純·崔錫肇 등이 회사 설립을 주도하였다.

 관료층의 회사 참여가 정치 정세의 변화에 따라 적지 않은 기복을 보이고 있었음에 반해, 상인층은 그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회사에 참여하였다. 金基永·鄭永斗·李根培·白完爀 등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서울 주변의 거상들과 趙秉澤·趙鎭泰·洪忠鉉 등 일찍부터 세도가문과 연계를 맺어 온 상인들은 정세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각종 회사에 자본을 대고 실무를 담당하는 등 활발한 기업활동을 벌였다.

 광무년간 고위 관료들이 회사 설립을 주도했던 것과는 달리, 통감부시기에는 관직과는 무관한 사람들, 즉 상인이나 지방 지주들의 회사 참여가 급속히 늘어났다. 재정·금융·화폐권이 일제에 장악되고 내장원 재정기반이 해체되는 등 경제주권이 허구화된 상태에서 관료들의 회사 참여가 위축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더욱이 일제는 현직 관료의 회사에 대한 출자나 경영참여를 엄격히 금지함으로써 관료자본이 일제의 의도를 벗어나 사용되는 것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고위관료층의 회사 참여는 큰 폭으로 줄어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권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던 일부 친일파 고관들의 회사 참여는 오히려 늘어났다. 통감부시기 회사 설립에 적극적이었던 고위 관료로는 金宗漢·閔泳綺·兪吉濬·李根澔·李鳳來·李允用·李載克·李埈鎔·李址鎔·李夏榮·張錫周·趙重應·趙羲淵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광무년간 일본에 망명했다가 러일전쟁 이후 귀국한 자들이거나, 乙巳條約 체결에 협력함으로써 일제의 우대를 받던 자들, 또는 종친이나 외척으로 을사조약 이후에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반면 통감부 설치 이후 한인 관료가 지속적으로 축출되었던 사정을 반영하여 중하위 관료 출신자들의 회사 참여는 크게 늘어났다. 특히 군대가 해산되는 1907년을 계기로 이들의 회사 설립이 급증하였는데, 이는 관직에서 쫓겨난 관료들이 새로운 생계수단을 기업경영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통감부시기 기업 경영에 특히 열성적이었던 중하위 관료 출신 인사들은 白寅基·沈宜碩·安國善·吳台煥·尹致晟·尹致旿·鄭鎭弘·崔錫彰·韓相龍·金光濟·金漢奎·林炳恒·鄭寅琥·趙鍾緖 등이었는데, 이들은 국권이 유지되고 있었다면 당연히 관직으로 나아갔을 고위 관료의 자제들이거나(韓相龍·白寅基), 관직에 있으면서 관련 분야의 회사 설립에 참여한 인물(沈宜碩·吳台煥), 또는 관직 생활을 지속하다가 퇴직당한 후 본격적으로 기업활동에 참여한 인물(尹致晟·尹致旿·鄭鎭弘·林炳恒·鄭寅琥·趙鍾緖·金光濟)들이었다.391)全遇容, 앞의 책, 269∼271쪽.

 통감부시기 상인층의 회사 참여 증가는 기본적으로 錢荒으로 인한 화폐의 부족, 외획과 어음의 폐지에 따른 신용거래의 두절 등과 같은 경제질서의 급격한 변동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상인들은 합자를 통해 가용화폐의 총량을 늘림으로써 전황과 금융경색에 대처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개항장 등지의 객주들 역시 내장원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紳商會社 체제가 붕괴함으로써 냉엄한 경쟁의 세계로 내몰리게 되었으며,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합자를 통한 규모의 확대는 절실한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1905년 이후 상인층은 경향 각처에서 활발하게 회사 설립에 나섰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기업 설립에 적극적이었던 인물은 金時鉉·金然鶴·朴承稷·裵東爀·白完爀·成文永·吳榮根·尹晶錫·李鴻謨·趙秉澤·趙彰漢·韓慶履·洪肯燮·洪鍾晥·金溶泰·李學宰·金用集·閔濬鎬·朴基英·呂三鉉·李源植·崔思永·金致允·朴奉燁·劉錫·李重來·鄭國永·鄭斗煥·秦學冑·崔翊煥 등으로서, 시전상인과 경강객주가 대다수를 점하기는 하였지만, 개항장객주나 松商(개성상인)·灣商(의주상인)도 적지 않았다.

 일제는 또한 농공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의 한국 지배에 필수적인 금융기관, 식민회사를 설립하는 데 한인 자본가들을 끌어들였는데,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유력 지주가 반강제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 중 일부는 일시적 참여로 그치고 말았지만, 상당수는 이를 계기로 회사 경영에 눈을 떠 강점을 전후한 시기부터 각 항구 주변에서 객주 영업을 개시하거나 중소규모의 금융기관·제조업회사 등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전북의 朴永根, 경북의 李柄學·崔浚, 전남의 玄基奉, 경남의 金弘祚 등은 모두 수십 정보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농공은행 참여를 계기로 지방에서 회사 설립을 주도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