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2. 상회사 설립과 상권수호운동
  • 2) 상권수호운동
  • (1) 외국상인의 침투와 상권문제

(1) 외국상인의 침투와 상권문제

 개항 직후 우리 나라와 외국과의 교역은 원칙적으로 ‘거류지 무역’에 의해 수행되어야 했지만,392)杉山伸也,<東アジアにおける‘外壓’の構造>(≪歷史學硏究≫560, 1986) 참조. 거류지 무역기구는 일찍이 1882년부터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거류지 밖으로의 자유왕래거리인 ‘間行里程’은 최초 거류지 밖 10리로 규정되었지만, 1882년에는 50리로 확대되었고, 1883년부터는 다시 100리로 확대되었다. 그나마 1883년 朝英條約에 의해 外商의 내지 행상권이 용인됨으로써 거류지 무역기구는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393)李炳天,≪開港期 外國商人의 浸透와 韓國商人의 對應≫(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85), 140∼160쪽.

 외상의 내륙 행상은 1880년대 후반부터 확대되기 시작하여, 청일전쟁을 전후해서는 內陸에 定住하는 외상까지 나오게 되었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군의 비호를 받은 일상의 불법적인 내륙 정주상업과 행상이 급속히 늘어났다. 또 1897년경부터는 淸商 역시 환류하였으며, 이들은 1899년 한청조약의 체결로 내지정주권을 획득하기까지 하였다.394)李炳天, 위의 책, 123∼124쪽.

 한편 1882년<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을 계기로 서울에도 외국 상인이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서울에서는 육의전이 국가에 대한 應役을 대가로 禁亂廛權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서울 거주 외상들은 국가에 아무런 부담도 지지 않는 존재로서 시전 상인들의 처지에서 볼 때에는 난전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시전 상인들은 1890년 대규모 철시투쟁을 단행하면서 정부에 외상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정부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교섭에 나섰으나 청일 양국의 고의적인 지연책으로 무산되고 말았다.395)金正起,<1890년 서울 商人의 撤市同盟罷業과 示威鬪爭>(≪韓國史硏究≫67, 1989) 참조.

 갑오개혁 이후 외상의 서울내 정주상업은 한층 확대되었지만, 육의전의 특권은 오히려 소멸해 버렸다. 육의전의 금난전권은 일상과 거래하는 非市廛商人을 단속하는 기제로 작용함으로써, 일상의 상권 확대를 억제하는 기능도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로써 시전상인들은 일상에 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까지 박탈당한 셈이 되어 버렸다.

 외상의 불법적인 내륙 정주상업과 행상을 통한 직무역 독점은 국내 수입무역상과 객주, 행상인 등 상인층 일반의 존립을 결정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청상은 고유의 합자조직을 이용하여, 일상은 재한 일본은행의 금융지원을 이용하여 대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반면 韓商은 근대적 금융기관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합자를 통한 자본규모의 외형적 증대, 즉 회사의 설립과 아울러 외상의 불법적인 내륙 침투를 금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광무년간의 회사 설립 증가와 상인층의 상권수호운동은 표리관계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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